누구보다 일제 강점기 독립을 갈망했던 고종의 손자

▲사진: 조선의 마지막 왕자로 남은 이우왕자: 1912년 ~ 1945년 이우는 고종의 손자이자 순종의 조카이다. 이우왕자의 아버지는 의친왕이다.(의친왕은 고종의 5번째 아들) 일제강점기 하에 11살때 일본으로 끌려갔고일본에서 학교를 다녔다.최종적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을 나왔다. 이우왕자는 일본인과의 결혼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하지만 이를 깨버리고 한국사람과 결혼했다. 이우왕자는 허무하게 죽었다.일본의 침략전쟁 막판 1945년에 하필이면 히로시마에 파견되었고 이때 히로시마 지역에 핵폭탄이 터져서 죽었다. 묘는 남양주에 있으며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어 있다.. 이우 왕자는 두 아들을 얻었다. 이청, 이종 이다. 이청은 경기고 졸업, 미국유학 후 기술자가 되었고, 이후 흥선대원군을 연구했다. 이종은 서울대 졸업, 미국유학 박사과정 중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뉴스프리존= 김현태기자] 일제 강점기, 독립의 필요성은 매우 중요하다. 그동안 우리나라 역사 반 만년 동안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와의 전쟁은 했어도 속국이 되었거나, 아니면 식민지가 되었었던 적은 없었으니까. 또 일제 강점기 때 나라는 일본 앞에서 늘 치욕스러움을 느껴야만 했고, 일본인들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도 모자라 고종황제까지 독살하였다. 이우. 고종의 셋째 아들 의친왕 이강이 셋째 부인 수인당 김홍인씨에게서 낳은 아들로.. 1912년 출생하였다. 

고종황제의 아들인 순종을 마음대로 허수아비 왕을 시켜서 통치에 마구 이용했으며, 순종의 아들인 영천왕은 우리나라의 여성과 이미 약혼까지 한 상태였는데 일본 황실의 명령으로 인해 파혼을 하고, 일본 여자와 사랑없는 무의미한 결혼을 했어야 했다. 이 정도 수모를 겪었다면 독립의 필요성과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다. 또 독립을 한 후에는 이승만 정권이 영친왕과 왕비의 국권을 주지 않았고,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4-19 혁명으로 인해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박정희 정권이 들어섰을 때에는 우리나라 국권을 허락받았으나, 1975년 영친왕은 죽고, 영친왕의 왕비는 경복궁에서 생활하다가 1989년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 TV 서프라지즈의 이우왕자

좀 거슬러서부터 얘기를 시작하면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를 점거했던 일본군 장수의 이름이 모리 데루모도. 우리 식으로 읽으면 모리휘원이다. 그가 이끌고 온 병력 규모는 약 3만명. 선봉대인 소서행장이나 가등청정의 부대보다도 많다. 그의 본거지가 바로 히로시마였다. 그는 히로시마에 거창한 성을 쌓고 위세를 자랑했지만 덕천가강이 정권을 잡는 결정적 계기가 된 ‘관원전’에서 풍신수길의 아들 편을 들면서 적잖은 타격을 입는다. 이때 히로시마는 복도정칙이라는, 임진왜란 때 충청도를 장악했던 일본군 장수의 수중에 넘어간다. 히로시마는 그 시절에도 상당히 중시되는 지방이었고 쟁쟁한 호족의 본거지였다. 2차대전 무렵 그 중요성은 더욱 커져 있었다. 한때 일본군 대본영이 자리잡은 적도 있었고 미쓰비시를 비롯한 군수공장들도 집결해 있었다.

히로시마 포탄에 사망한 이우왕자

그런데 오사카와 도꾜같은 대도시들이 미군의 공습으로 쑥대밭이 되는 가운데 히로시마는 별탈없이 무사했다. 히로시마 뿐 아니라 교또나 고쿠라 등 몇몇 도시들도 그랬다. 그 도시들의 공통점은 평지에 넓게 펼쳐져 있었다는 점. 일본에 원자탄 맛을 보이리라 결심한 이후 미국 정부가 계산하고 있었던 것 중 하나는 폭탄의 위력을 잘 볼 수 있는 지형적 조건이었다. 즉 도시가 어느 정도 쑥밭이 되는지 그 위력을 잘 관찰할 수 있고 폭탄의 위력이 극대화될 수 있는 도시를 찾았던 것이다. 히로시마는 그에 잘 들어맞았고 원폭 투하지 1순위에 오른다. 그리고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상공에는 버섯 구름이 솟았다.

이 폭탄의 위력이 어땠는지를 따로 설명할 생각은 없다. 살아서 지옥의 유황불을 목도한 사람은 히로시마 사람들이 처음이었으리라. 최소 7만 최대 10만 명의 목숨이 재가 되거나 온몸이 타들어가는 고통 끝에 죽어갔다. 사망자는 일본인들만이 아니었다. 포로수용소에 있던 미군들 상당수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2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 노동자들도 히로시마의 원귀가 됐다. 그리고 거기에는 특이한 사람 하나가 끼어 있었다. 이름은 이우. 조선의 왕족이자 일본의 공작이었다.

나무로 깎은 인형들같이 무력했던 대한제국 황실에서 그나마 사람 비슷한 존재로 쳐 준다면 의친왕 이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의친왕 이강은 “아버지보다 훨씬 못하고 형에 비해 훤칠하게 잘생긴 미남 넉넉히 하던 황족이었다. 미국 유학 도중 미국 처녀와 미국 총각 사이에 삼각 관계를 이뤄 결투를 벌였다가 실신하여 안그래도 속시끄럽던 미국 주재 조선 공사관을 발칵 뒤집었고 공사관이 10년은 쓸 돈을 미국 여행에 다 탕진해 버린 개념 없는 황족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3.1항쟁 이후 거처를 빠져나와 상해로 망명을 시도한다. (물론 여기에는 도박 빚으로부터의 도피 여행이었다는 일설도 있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가 썼다는 친서의 일부는 그래도 전주 이씨 왕가의 마지막 일렁임 정도로 봐 주기에 넉넉하다.

의친왕은 이후 쓸쓸이 보낸다. 그 둘째 아들이 이우였다. 일본에 고분고분했던 형과는 달리 이우는 일본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당시 일본 귀족들처럼 일본의 군사 교육을 받고 일본군 장교로 임관했지만 누구와 싸움이라도 할라치면 바로 조선 욕설을 퍼부으면서 팔뚝을 걷어부치던 다혈질이었고 “조선은 독립할 것이다.”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닌 몇 안되는 조선인이었다. “일본은 패망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미국도 소련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니 조선이 걱정”이라는 탄식을 하며 중국 근무 때는 항일유격대와도 비밀 접촉을 했다는 (확인되지 않았음) 이 왕족은 1945년 6월 ‘본토결전’을 위해 일본에 배치된다. 그 부임지가 하필이면 히로시마였다.

▲ 다음 블러그

일본음식조차 싫어했고 일본 여자와 결혼 못하겠다고 버티며 조선인과 결혼한 왕자는 본토 결전의 총알받이가 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지만 결국 히로시마에 가야 했다. 그리고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여름. 차를 타지 않고 말을 타고 출근하겠다며 말 위에 올라탄 그는 버섯 구름과 그 뒤를 이은 태풍에 휘말린다. 온몸에 화상을 입은 그는 다른 이들처럼 지옥같은 고통에 시달리다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이 열린 건 1945년 8월 15일 서울운동장 즉 몇년 전까지의 동대문운동장이었다. 그날 그의 장례식은 원래 좀 일찍 열릴 예정이었지만 오후로 늦춰졌다. 그것은 ‘덴노 헤이까’의 특별 방송 때문이었다. 바로 일본 패망과 조선 해방을 뜻하는 무조건 항복 방송. 장례식 직전 일본의 패망 소식을 들은 그의 혼백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 장례식은 일본 육군장(葬)이었다.

일본을 멀리한 이우왕자

자신의 뜻과 무관한 삶을 살았지만 끝내 그 삶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던 한 기구한 왕족의 사연을 통해 때로 일 개인이란 얼마나 무력한가를 돌이켜 본다. 이우는 일본의 공작이었고 일본군 중좌로 죽었지만 ‘친일파’로 규정되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 계기들을 놓쳤고 자신들이 싫어하던 자들의 일원으로 죽었다. 이건 꼭 왕족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에 고종이 친히 의친왕의 둘째 아들 어린 이우의 손을 잡고 운현궁에 나아가 말하기를.. "이 아이로 하여금 운현궁을 잇게 하라." 하셨다. 고종이 임명한 운현궁의 종주 이우는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흥왕이 되어야 할 당당한 황가의 일원이나. 1910년 나라가 일본에 강제 합병되면서 황실이 왕실로 격하되자, 흥왕이 아닌 공작으로서 불리워 진다.

이우는 세살 위의 형 건이 일본에 순종하여 일본이 정해준 여자와 저항없이 결혼한데 반해 황가의 후손으로서 의기가 넘쳐 결코 일본에 순종하는 법을 보이지 않았고 반드시 일본왕족과 결혼해야 하는 일본의 지침을 거부하고.. 만고끝에 조선인 박찬주와 결혼에 성공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의친왕과 고종황제는 힘앞에 굴복하지 않고 황실의 기개를 보여주는 이우를 대단히 사랑하였다. 그러나 그런 이우도 1922년 10세에 숙부 영친왕과 마찬가지로 일본에 유학갈 수밖에 없엇고.. 1929년에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입교하여 군인의 길을 걷게 된다. 1931년 육사본과 포병과로 입교한 이우는 일본 급우와도 마찰을 일으켜, 일본 정부로서는 요주의인물로 감시당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감시와 군대라는 제한적인 공간에서도 이우는 대한의 황족으로서 전혀 굽힘이 없어, 육사생활에서도 일본말을 거의 쓰지 않고, 한국말을 썼으며, 한국인 육사생도에게는 커다랗게 한국말로 소리치며 호령하곤 하였다.

그런 그는 일본인들에게는 사납고, 난폭하여 경계의 대상이었지만, 한국 동포에게는 항상 부드럽고 따뜻했다고 한다. 이우는 술자리르 가지면, 꼭 '황성옛터'를 불러 고국의 그리움을 달래곤 하였는데 이런 일화 하나가 있다.

이우가 서울에 있을때 하루는 전라도 지방의 농부들이 이우에게 몰려와 호소하였다. 그들이 호소한 것은 일본군이 호남평야의 곡창지대에 작전도로를 내면서 땅을 가로채면서도 보상을 안해준다는 것이었다. 이에 이우는 "내가 해결하겠다."면서 즉각 용산의 일본군사령부로 달렸다. 그리고 당시 도로건설을 담당하던 장군을 만나 공사를 취소하라고 요청하였다. 담당장군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였고, 이에 이우가 해결을 위해 취한 방식이 즉시 권총을 빼어 장군의 머리에 겨누며 "황족이며, 공작인 나는 너 하나 죽여도 감옥에 가지 않는다.

즉시 죽여주마."라고 소리쳤다는 것이다. 전라도 농민의 청원은 이루어졌고 이우는 상관에 대한 항명에도 불구하고, 무사할수 있었다. 이우는 1940년 육군대학 54기를 졸업하는 것으로 군사 교육을 마쳤으며, 북지방면군 제1사령부 정보참모로 근무하며 중좌까지 진급하였다.

이우는 태원에서의 근무 3년 동안 독립운동을 준비한다. 육사동기 이형석 장군에게 보낸 편지에는 "일본군복을 입고 있는 것이 부끄럽다. 우리 군복을 입고 당당히 살때까지 기다리라"고 전하기도 하였다. 이우의 독립운동은 워낙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그것이 알려지기도 전에 히로시마에서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남겨진 기록이 별로 없다.

오로지 주변 증언으로 종합하여 보면, 이우는 근무지 근처에서 태항산 유격대의 조직확장에 은밀히 간여하였다... 이우는 정보참모로 있으면서 판세가 일본에 불리하다는 것이 판단되면 이 태항산의 유격대와 주변 백두산 근방의 독립군들, 일본군내의 한국병사들과 연합하여 일본의 관동군과 전투를 벌일 계획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만약 이 계획이 성공을 거두었다면, 대한은 우리의 힘으로 우리 황족을 중심으로 연합하여 당당히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할수도 있었을 만큼 실효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일본이 이우를 교육참모로 보직을 바꾸고, 히로시마에 발령을 내버렸다. 이에 이우는 이제껏 쌓아놓은 탑이 무너질까 걱정하여 운현궁으로 들어가 장장 6개월을 버티며 전출을 거부한다.

어린 아들 청에게 설사약을 먹여 병간호를 위해 늦게 간다고까지 하면서 히로시마로의 배속을 늦추고자 하였다. 그 사이 이우는 자신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고 자신이 키워놓은 태항산 유격대를 상해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편입시키고자 계속 태항산과 연락을 취하였다.

▲ 다음 블러그

이때 이우의 동계급 부관이며, 일본정부가 임명한 감시원이었던 요시나리는 히로시마로 갈것을 설득하여 6개월만에 이우는 일본에 가게 된다. 요시나리는 애초에 이우를 감시하여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상부에 보고하는 밀정의 임무에 충실하였지만, 후에 가서는 이우의 인품과 배포에 매료되어 이우의 사람이 된 군인이다.

그런 요시나리의 설득에 이우는 운현궁을 나서 일본으로 향하게 된다. 히로시마에 첫 출근하던 날, 바로 그날 아침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이우는 피폭되어 신음하다 일본군에 구조되어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래도 상태가 좋아 호전될 것 같았던 이우를 요시나리는 일본정부에 요청해 정밀한 치료를 위해 도쿄로 이송한다.

그러나 그날 밤 나아질 것 같았던 이우가 갑작스레 악화되어 사망한다. 이우의 임종을 지킨 요시나리는 이우의 장례를 치룬 후 이우의 죽음은 자신의 책임이라며 유서를 쓰고 할복 자살함으로써 상관과 죽음을 함께 했다. 이 우公의 시신은 조용히 귀국하여 경기도 마석에 모셔졌는데, 그의 장례식날에 일왕이 마침내 항복선언을 하니 바로 그날이 8월15일이며, 이 우公은 죽어서야 그토록 열망하였던 조국의 해방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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