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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23세의 투옥 17번의 옥고 치룬. 목놓아 부르다 간 시인민족시인 이육사가 대구에서 거처했던 남산동 대구집이 철거 위기에 놓였다
  • 김현태 기자
  • 승인 2018.11.06 00:02
  • 수정 2018.11.06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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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지붕에서 1인 시위하는 고경하 시인, 노현아 시민운동가 / 사진 = 문해청 기자

[뉴스프리존= 김현태기자] 시인 이육사(1904~1944)에게 문학은 부차적인 일이었다. 퇴계 이황 가문에서 태어나 열다섯에 이미 흉중에 오천권을 품었다고 할 정도로 공부에 자부심이 컸다. 그러나 식민지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20대에 일본 유학을 다녀왔고, 베이징에서는 중국의 항일투쟁을 목도했다. 귀국하여 민족혁명운동에 투신했다. 1927년 ‘대구 조선은행 폭탄사건’에 연루돼 1년7개월 감옥을 살았다. 다시 난징으로 건너가 조선의용대장 김원봉이 세운 정치간부학교를 다녔다. 그의 본업은 독립운동이었다. 본명 이원록. ‘이활’ ‘이육사’라는 필명으로 시와 평론을 썼다. 문필활동은 또 다른 독립운동이었다. 1943년 가을, 이육사는 서울에서 일본 헌병대에 체포돼 베이징으로 압송됐다. 그리고 둥창후퉁의 지하감옥에서 고문과 취조에 시달리다 이듬해 1월16일 숨졌다.
영화 속에서 대개 시인이라는 이들은 창백한 낯빛에 뿔테 안경을 쓰고 섬세한 성품에 쉽게 상처 받으며, 비쩍 곯아서 맨날 줘 터지지만 깡다구는 있어서 목소리는 카랑카랑한, 그러다가 더 두들겨 맞는, 그런 캐릭터일 때가 많다. 물론 시인도 사람 따라 개차반부터 성인군자까지 천차만별이겠지마는, 보통의 이미지가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이미지를 벗어나는 시인 하나가 있었다. 시인이면서 명사수였고 글쟁이이면서도 폭탄 다루고 침투 훈련까지 받은 사람, 이육사가 그다. 본명 이원록.

▲ 이육사 생가. /사진제공=문화재청

그는 진성 이씨다. 우리나라 유학의 태두이자 일본에서까지 명성을 떨친 퇴계 이황의 후손이다. 그의 형제는 다섯이었는데 육사 말고 그 가운데 문학적으로 뛰어나 이름을 남긴 이가 넷째 원조다. 소설 <태백산맥>에도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강조하는 공산주의 문학가로 등장하고, 이육사의 유고집을 냈던 이원조는 명랑하고 재기발랄했던 반면 이원록(육사)는 좀 엄숙하고 우직한 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원록은 곧잘 이원조의 ‘밥’이었는데 하루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이육사가 책을 집어던졌다. 그러나 이원조가 냉큼 할아버지에게 이르기를 “책은 성현의 말씀을 담은 것인데 책을 던지는 것은 성현을 집어던지는 것”이라고 열변을 토해 또 한 번 형을 골탕먹였다는 일화가 있다. 이원조의 재기도 재기지만 이원록(육사)의 ‘한성깔’을 드러낸 일화.

안동 출신의 민족시인 이육사가 대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20년 17세가 되던 해 가족과 함께 대구로 이사오면서부터다. 1937년 서울로 옮겨갈 때까지 17년간 대구에서 보냈다. 17년 기간 중 영천에서 혹은 일본 동경에서의 대학생활 시절도 있었으나 대구에서의 거주 기간이 적지 않았다. 일본과 중국 유학후 1927년에 귀국한 이원록은 조선은행 대구 지점을 날려 버리려던 장진홍 의거에 연루되어 1년 7개월의 첫 옥고를 치른다. 하지만 그가 이 의거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다. 눈이 뒤집힌 일본 경찰이 그야말로 저인망으로 훑어서 감방에 처넣은 결과일 뿐, 재판에서도 나온 판결은 "혐의 없음"이었다. 그 뒤 신문기자로 활동하다가 조선일보에 처음 시를 발표하는데 이때만 해도 그는 '이활'이라는 필명을 썼다. 그런데 광주학생운동의 후폭풍으로 일어난 대구 격문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또 옥살이를 한다. 이 투옥 이후에야 그는 스스로를 이육사라 일컫기 시작한다.

264 수인번호에서 그 이름이 나왔다는 말은 정설로 돼 있지만 그 속내는 여러 번 바뀌었다. 처음에는 역사를 도륙낸다는 뜻의 육사를 썼고 다음에는 "고기먹고 설사한다"라는 뜻의 육사를 썼다. 전자가 자신이 겪어야 했던 현실에 대한 분노라면 후자는 '그래봐야 별 수 없다'는 냉소가 아니었을지. 그러다가 한 친지가 "역사를 도륙낸다는 건 혁명의 뜻을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니 평평한 육지로 만든다는 이름을 써라"고 권유하면서 우리가 아는 그 육사로 스스로를 일컫게 된다. 그리고 그는 '역사를 평탄케 하는' 노력에 몸을 던진다.

▲안동 이육사 시인 문학관 / 사진 = 문해청 기자

민족의 슬픔과 조국 광복을 염원했던 항일 민족시인 이육사를 기리는 이육사문학관이 그의 고향인 안동에 세워진 것이 2004년의 일이다.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 소박하게 지어진 문학관 뒷산에는 그의 묘소도 있다. 생가터 옆에는 시비 동산도 만들어져 있다.

이육사가 대구에서 거처했던 남산동 대구집이 철거 위기에 놓였다. 대구시가 활용 방안을 놓고 고심하던 사이 아파트 재개발 지역에 포함된 것이다. 이미 건물 외벽이 허물어지는 등 건물로서 가치를 상실한 현장을 본 시민들의 마음이 왠지 착잡하다.  대구, 이육사 청년기 생가 철거 경북 안동, 이육사 문학축전 개최

대구와 깊은 인연을 맺었던 민족시인 이육사의 역사적 흔적이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없어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다. 그의 역사적 체취가 남아있던 그곳에 그를 기억할 작지만 의미있는 기념물 하나가 있으면 좋겠다. 역사란 후손이 다듬고 보존할 때 그 가치가 커지는 법이다. 시인이 머문 안동과 대구는 이뿐만이 아니다. 안동에서는 갈선대 절벽을 밑에서 올려다 볼 때 칼처럼 날카롭게 보인다고 해 '칼선대'라고 한다. 이육사 생가 근처에 도산서원이 있고 이육사문학관도 자리 잡고 있다. 이육사는 ‘광야’ ‘청포도’ 등의 시가 유명하지만 문학사적 업적에 비해 전하는 친필원고가 극히 드물다. 그래서 5월 친필 시 원고 ‘편복’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현실을 동굴에 매달려 살아가는 박쥐에 빗댄 시인데 당시 일제의 사전 검열에 걸려 발표되지 못한 것이 해방 후 1956년 출간된 ‘육사시집’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갈선대는 안동 출신의 민족저항시인 이육사가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절정'의 시상을 떠올린 곳이라고 한다.

일제 치하 암울한 시기에 이육사는 갈선대를 찾아 생가를 내려다보며 시상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명작이 탄생했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갈선대에 서면 낭떠러지 아래로 원천리 물돌이 마을을 내려다볼 수 있다.

원천리 물돌이 마을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하회마을과 견줄 만한 경치를 자랑한다. 멀리 이육사 생가터와 문학관도 희미하게 보인다.

갈선대 정상에서 가물가물 보이던 이육사 문학관에서는 나라 잃은 울분을 노래하던 이육사의 시혼을 느껴볼 수 있다.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나리쟎는 그 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자거려
제비 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이육사 <꽃> 중

 그는 툰드라 속에서 제비떼 오기만을 기다리지 않았다. 의열단원 윤세주를 만나 중국 난징으로 가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다녔고 이때 사격술, 변장술 등 무장 투쟁에 필요한 훈련까지 몸에 익혔다. 시와 글이 무기였던 그의 손은 방아쇠와 폭탄 던지기에도 익숙해졌다. 또 자신을 교양시켰던 의열단장 김원봉마저 "레닌의 뜻에 어긋난다"고 비판하는 열혈 사회주의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이육사 시인: 1944년 먼 이국 땅 베이징의 감옥에서 삶을 마친 시인 이육사(李陸史, 1904~1944)다. 그는 일제 말기의 어두운 시대 상황 속에서도 명징한 언어로 꺼지지 않는 독립 의지를 노래하는 한편, 나라를 위해 입이나 머리가 아니라 몸을 던져 싸움으로써, 민족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준 실천적 문학인이다.

그는 이른바 '빵쟁이'였다. 나이 마흔에 열 번 넘게 감옥을 들락거렸고 중국과 조선을 분주히 오가며 살았다. 그의 시 <절정>은 지독히도 추운 날 압록강을 건너며 또는 만주벌판을 헤매며 그가 내지른 비명같은 탄성이 뭉쳐서 나온 시인지도 모른다.

매운 계절(季節)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그는 그의 시 가운데 <청포도>를 좋아했다. "내가 어떻게 저런 시를 썼는지 모르겠다." 는 자화자찬 비슷한 소리를 할 만큼 말이다. "내 고장은 조선이고, 청포도는 우리 민족인데,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우리 민족이 익어간다고. 그러면 곧 일본도 끝장난다고.". 후세의 평론가가 갖다붙인 것이 아니라 시인이 자신의 입으로 한 자작시의 해석이다

▲제713호 이육사 친필 시 원고 ‘편복’ /사진제공=문화재청

 그러나 그는 끝내 해방을 보지 못했다. 죽은 뒤에 발표된 그의 시 <광야>에서처럼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목놓아 불렀으나 그는 초인을 만나지 못했고 <청포도>에서처럼 하이얀 모시적삼 식탁에 올려 놓지 못했다. 1943년 조선에서 체포되어 거꾸로 중국으로 압송 1944년 1월16일 짧지만 매웠던 생명을 다한다. 고문과 악형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그는 그가 쓴 수필의 이 구절을 되뇌지는 않았을까

"나에게는 진정코 최후를 맞이할 세계가 머리 한 편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타오르는 순간 나는 얼마나 기쁘고 몸이 가벼우리까"

김현태 기자  kimht100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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