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자연 유기농 농산물매장과 마을주민공동체가 함께하는 마을기업 설립, 마을협동조합 설립

산천재 / 사진 =  문해청 기자

[뉴스프리존,대구=고경하 기자] 대구 마을 만들기 '그루터기'(대표 문해청)는 주민공동체 활동을 통하여 공동참여 공동나눔 공동운영을 목표로 최근 경남 산청 간디숲속마을공동체, 대원사, 남명기념관, 산천재, 남사예담촌을 기행했다.

대구라는 척박한 도시에서 자신이 살아가는 남구 대명동 주민과 함께 마을공동체를 풍요롭게 하고 행복을 찾아가는 꿈을 꾸었다. 꿈 꾼 동기는 남구도시재생지원센터 마을주민학교를 통해 마을 만들기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장상훈 촌장강의 / 사진 = 고경하 기자

마을주민 교육 이후 마을 주민 50명 이상 참가해 대구 마을 만들기 ‘그루터기’ 주민모임 비영리단체(고유번호증)를 만들었다. 그리고 대구광역시 마을 만들기 공모사업을 신청했고 마을 만들기 사업 단체로 ‘그루터기’가 선정 되었다.

대구도시재생지원센터 최 연구원과 이 강사의 지원을 받아 마을주민공동체를 위해 우선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주제로 2달 간 모임을 마무리하고 마을공동체 문화기행을 결정했다.

유기농 닭장 / 사진 = 고경하 기자

우선 문화기행 이후 마을 만들기 공동사업을 통한 마을기업 설립 및 마을협동조합 설립을 한다. 친환경 유기농 농산물매장 공동운영을 목적으로 마을 만들기 주민공동체와 주민생활에 건강식품을 제공하고 이웃사랑과 나눔을 목표로 한다.

이런 목적과 목표로 친환경 유기농 농산물생산지를 탐방하고 농촌직접거래를 통한 이익을 마을공동체로 환원한다. 마을주민공동체의 의견을 모아 지난 주말 경남 산청 간디숲속마을공동체 친환경 유기농 농산물생산지를 탐방했다.

먼저 간디숲속마을공동체는 13년 전 간디마을학교와 함께 조성된 귀농귀촌인의 마을공동체다. 초기 몇 가구가 들어오고 조금씩 마을로 들어와서 현재 39여 가정이 생활하고 있다.

간디숲속마을공동체 초대 촌장 장상훈(53)은 귀농 귀촌인이 자연스럽게 모여 교육생태마을공동체를 지향하는 중론을 모았다. 간디숲속마을공동체는 영농협동조합을 만들었고 몇 가지 원칙을 세웠으며 마을공동체 형성했던 과정을 밝혔다.

부부회화나무 / 사진 = 고경하 기자

첫째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하지 않은 이유는 몸에 나온 것을 더럽게 버려 자연을 오염시키는 것보다 배설물을 퇴비화하여 거름으로 자연의 흙으로 되돌린다. 화장실은 부엽토나 톱밥 혹은 미생물들을 잘 활용하여 퇴비로 만들어 사용한다. 자연으로 오염되지 않게 되돌리는 일을 실천하고 있다.

둘째 가로등을 설치하지 않은 이유는 해발 250여 미터 산의 나무와 산짐승 벌레 등 자연이 고요한 달빛 아래 깊은 밤 편히 쉴 수 있는 조그만 배려를 한다고 밝혔다.

셋째 산업공단에서 생산한 화학재료로 만든 공산품으로 제초제,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다. 각종 비누, 세제는 천연세제를 사용해서 생태계에 화학화 산성화를 최대한 줄이자는 실천이다.

간디숲속마을공동체에서 버려지는 모든 것을 잘 부식시켜 숙성하면 좋은 퇴비로 사용이 가능하다. 농사에 활용되지 않으면 그냥 자연의 흙으로 되돌려 주면 된다. 불편한 점은 조금 있지만 자연과 인간의 생명존중의 사상으로 생활하면 충분히 지내기가 괜찮은 곳이다.

처음 마을에 입주한 사람이 살아가는 일을 고민하다 시작한 것이 친자연 방목 유정란 생산이다. 처음부터 홈페이지를 통해 도농공동 농산물직접거래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유기농계란 / 사진 = 고경하 기자

간디숲속마을 30%는 유정란 등 농업관련 일하고, 30%는 공무원, 교사 등 직장 다니는 분, 나머지 자영업을 하시는 분, 주말부부로 생활한다. 이어서 장 촌장이 운영하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산중턱 방목 닭장에 갔다.

숫닭 암닭 연령이 같아야 서로 싸우지 않는다. 숫닭 암탉이 살며 유정란을 낳는데 닭은 수명이 20년 이다. 초계, 중계, 노계 순으로 연령끼리 각각 다른 닭장에서 살며 알을 낳고 있다.

친자연 유기농 신선한 달걀을 위해 1년에 한 번씩 모든 수탉 암닭을 교환한다. 인심 좋은 장 촌장은 토종보리수에 모과와 단감까지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다음은 경남 산청군 유평리 천년고찰 대원사로 이동했다. 이 절은 신라 진흥왕 9년 창건했다.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다 1948년 여순민란사건 때 일어난 화재로 돌로 만들어진 다층석탑을 제외하고 전소되었다.

잿더미가 된 터에 유일하게 남은 다층석탑은 9층 석탑으로 석재에 철분이 많아 검붉게 보인다. 다층석탑 아래쪽 각 모서리의 석인상 4명이 탑을 머리로 이고 있는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보통 탑의 석인상은 사천왕 형상인데, 대원사 9층 다층석탑은 무덤 앞에 세우는 석인상과 비슷하게 생겨 무슨 의도로 석공이 이런 모습으로 만들었는지 궁금하다. 지금은 보수공사로 인해 그물망과 철파이프 지주대로 견고하게 가려져 있다.

잿더미가 남은 터만 남은 이곳에 1955년 비로소 ‘지리산 호랑이’라 불리던 만허당 법일 스님이 비구니 선원을 개설했다. 지금에 이르러 50여명에 이르는 비구니들이 참선하는 청정도량이 되었다.

깊은 산속에 위치한 산사를 찾아 올라오다 보면 대원사계곡은 고산식물과 큰 바위들이 어우러져 있다. 가을 단풍길 따라 걷다보면 사회에서 보기 힘든 절경을 감상할 수 있고 영원히 간직해야 할 좋은 자연환경이다.

대원사 범종각 / 사진 = 고경하 기자

다음은 남명 조식기념관과 산천제로 이동했다 남명 조식 선생(南冥 曺植, 1501년~1572년)은 경상우도(慶尙右道) 삼가현(지금의 경남 합천) 토동에서 태어났고 퇴계 이황은 1501년(연산군 7년) 경상좌도(慶尙左道) 예안현(지금의 경북 안동) 온계리에서 태어났다. 16세기 학파형성기에 영남학파의 두 거봉이 되었다.

16세기 학파 형성기에 영남학파의 두 거봉이 된 이들은 같은 해에 태어나서 퇴계는 70세, 남명은 72세까지 장수를 했다. 퇴계가 경상좌도 사림의 영수라면 남명은 경상우도 사림의 영수로서 이 두 사람의 제자들은 동인 정파를 형성했다. 그러나 영남학파를 바탕으로 한 이 동인 정파는 다시 퇴계학파의 남인과 남명학파의 북인으로 분립되었다.

16세기는 사회적으로 성장한 사림과 기성 정치세력인 훈구파의 대립과 갈등 속에 사화가 연속적으로 발생한 시기다. 한 세기에 걸쳐 정치적, 경제적 기득권을 향유하면서 귀족화한 훈구파와 사회 개혁을 요구하면서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부상한 사림파의 격돌은 필연적이다.

정치판의 물갈이라는 절실한 시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신파인 사림과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의 격돌은 언제나 사림이 피를 흘리는 사화로 결말 났고, 그런 상황은 연속되었다. 칼자루는 언제나 정치적, 경제적 우위였던 훈구파가 쥐고 있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신진사림인 조광조가 등장하여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위한 대개혁을 추진했지만 학문적 미성숙성과 과격성 때문에 실패했다. 이때도 정권의 승자는 중종반정의 훈구 세력이었다. 훈구파의 전횡에 질려 신진사림에 힘을 실어 주려 했던 왕도 두 세력의 대격돌에 결국 훈구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남명매 / 사진 고경하 기자

사림이 미래라면 훈구파는 현실이었다. 왕이 추구하는 미래가 사림에게 있다 하더라도 왕은 자신의 오늘이 있게 한 훈구파를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권이 훈구파에게 넘어가면 사림은 귀향하여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를 키우면서 때를 기다리게 된다.

향촌 사회에서 때를 기다리던 사림이 다시 중앙 정계에 진출하게 된 것은 중종 후반기에 이르러서이다.

퇴계는 1534년 34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서 사대부의 길을 걷게 되고, 남명은 1539년 39세로 초야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는 유일(遺逸)로 인정받아 국가의 부름을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선비가 수기(修己)하면 당연히 치인(治人)의 단계로 가서 학자관료인 사대부가 되는 것이 상식인 그 당시에 퇴계는 그 길을 걸었지만 남명은 그 길을 거부하고 재야 지식인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다음은 남사예담촌으로 이동했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제1호'로 지정된 '산청 남사예담촌'은 18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지어진 전통 한옥 40여 채가 등록문화재 제281호로 지정된 옛 담장과 잘 어우러져 있다.

최씨 가문 고가는 마을의 중앙에 자리 잡은 가장 큰 집으로 안채와 외양간채, 사랑채가 'ㅁ'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다. 1930년대 지은 집으로 남녀 사용공간에 독립성을 부여한 배치로 사대부가의 유교적 전통을 엿볼 수 있다.

이씨 가문 고택으로 향하는 길목 선비나무로 불리는 두 그루의 회화나무가 있다. 서로에게 빛을 더 잘 들게 하려고 몸을 구부리며 자란 나무다. 부부가 나무 아래를 통과하면 금실 좋게 백년해로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부부나무로 불린다.

이씨 고가 바같채 돌담장옆에는 450년 이상 된 회화나무가 있는데 굵은 줄기에 커다란 구멍이 있고 배꼽을 닮아 삼신할머니 나무로 불린다. 아이를 낳기 원하는 여인은 구멍에 손을 넣고 소원을 빌면 애기를 갖게 된다고 한다. <네이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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