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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조선 정부 초청 중추원 고문 금의환향
  • 정호천
  • 승인 2018.11.07 00:02
  • 수정 2018.11.07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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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한 혁명가 피제손 타계 > 1951년 1월 5일

1884년 갑신년 바람의 냄새가 가을에서 겨울로 바뀌던 음력 10월의 어느날, 우정국 낙성연이 성대하게 열렸다. 근대적 우편업무를 담당할 이 관청의 출발을 축하하며 각국의 공사들과 조선의 고관대작들이 몰려들었다. 서양의 예복과 조선의 관복들이 어우러져 술잔을 나누며 취흥은 도도히 피어올랐다. 그때 별안간 밖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영문을 알아보러 나갔던 척신 민영익이 칼을 맞은 채 비틀거리며 돌아왔다. "자객이다". 갑신정변의 시작이었다.

갑신정변의 주모자인 김옥균조차 나이 서른 넷의 홍안이었으니 그 아래의 행동대원들이야 말할 것이 없겠지만 그 가운데 눈에 띄게 용감하게 뛰어다니고 칼질을 하는 이가 있었다. 나이 스물의 서재필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임금에게 알현을 청하는 대신을 호통쳐 내몰았고 환관 유재현이 임금 앞에서 죽어갈 때 칼을 들었다. 일본 도야마 유년학교에 유학했던 바, "우리 도야마 출신들은 유난히 용감하여 두려움없이 일을 해 나갔다."고 하니 탁월한(?) 행동대원이었을 것이다. 그는 거사 후 병조참판 자리를 꿰차지만 청나라군이 개입하면서 그 관직은 이틀도 누려보지 못하고 해외로 망명한다.

그가 정착한 곳은 미국이었다. 영특하기로 이름났던 김옥균이 감탄을 금치 못할만큼 명석했던 그의 머리와 돌아갈 곳 없는 절박함이 강요한 노력은 그를 조선인 최초의 서양 의사로 만들었고 아울러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된다.

이후 조선 정부의 초청을 받고 중추원 고문으로 금의환향한다. 그는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했으며 독립협회에 관여하는 등 개화 운동에 앞장섰다. 독립신문 영문판 논설을 쓸 정도로 영문에 정통했던 영문의 영향을 받아 국문 띄어쓰기를 최초로 도입하기도 했다.

이후 친러파 정부와 알력을 빚은 끝에 중추원 고문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서 평생을 미국인 의사로 살지만 재미 한국인들의 조직에 얼굴을 내밀었고 독립운동을 경제적으로도 지원하는 등 고국과의 인연을 단절하지 않았고 나이 여든에 해방을 맞아서는 귀국하여 5만여 인파의 환호를 받기도 했다. 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을 뽑던 당시 반세기를 미국에 살았던 그의 이름은 당당히 대통령 후보로 올라 있었고 실제로 그를 해방 정국을 추스를 인물로 손꼽는 이도 많았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 여든 일곱에 눈을 감았지만 그의 뜻을 기리려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그 유해가 봉환된 바 있다. 이만하면 격동기에 조국의 개화와 해방을 위해 힘쓴 젊은 시절의 혁명가, 개화 사상가로 일컬을 수 있을 게다.

그런데 그가 미국에서 처음 들어왔을 때 놀라운 일이 있었다. 그가 갑신정변의 행동대원이었을 때가 나이 스물이었고 돌아올 때 30대 초반이었는데 한때 동료였던 윤치호가 기절초풍할만큼 조선말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일상 언어도 영어였을 뿐 아니라 이름조차 서재필이 아닌 '필립 제이슨'의 음차인 피제손이라 칭했으며 국왕 앞에서도 외교관들이 칭했던 '외신'이라 자처했다. 독립신문에서 각처의 의병 토벌을 중계(?)하면서 도적놈 몇 명이 어디서 죽었다는 식의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아무리 고된 이국 생활을 한 이라도 나이 스물에 고향을 떠난 이가 10년만에 모국어를 깡그리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추측컨대 그는 조선에 대한 책임감은 있었으되 조선을 경멸했고 조선을 변화시키고 싶어했지만 그 일원임을 의식적으로 거부했던 기묘한 왕년의 혁명가였다. 그가 조선 정부와 틀어져 미국으로 돌아갈 때 조선인 친지들에게 남긴 말은 참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귀국 정부가 나를 거부하기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조국을 '당신들의 나라'라고 부르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해가 가지않는 바는 아니다. 요즘도 미국 시민권자라면 아 그러세요 한 수 접는 판에 한창 세계적 강국으로 부상하던 미국 시민으로서 조선이 어떠했을까. 하지만 불과 10년 전 왕 앞에서 수구대신들을 베어 버리던 혁명가의 변신은 너무나 비극적으로 드라마틱했다.

해방 뒤 그 앞에 몰려든 군중들 앞에서 그는 단 한 마디의 한국어도 하지 못했다. 그가 재미한인들과 조직을 함께 하고 독립 운동을 위해 가산을 소진했다는 소리가 곧이들리지 않을만큼. 그는 그 앞에 모여든 조선 사람들에게도 냉정했다. "비누 하나 만들지 못하면서 무슨 독립이오."

그만을 탓할 수는 없겠지만 서글픈건 어쩔 수 없다.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자신의 옛 조국이 전쟁에 휩싸여 있었던 1951년 1월 5일 죽었다. 그가 서재필이었던 것은 20년이었고 필립 제이슨 피제손이었던 것은 67년이었다

정호천  news@pcs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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