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전태일 재단

드르륵 득득,
긴 공장의 밤,
어린 시다들의 여린 손끝이
애처로웠던 청년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살았던 '핫바리 인생'의
절박함이 뼛속에 배여 있기에
열 두어 살 시다들의 고통에 대한
아픔이 더했습니다.

물질이 중요시되는 사회,
가진 자의 폭력과 기만에 몸서리치며,
그것들에게서 여린 마음들을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쓰러지는 그 순간까지 청년은 말합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그리고
'꼭 돌아오겠다'고…

삼십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너무 오래
잊고 지내진 않았는지요,

그리고 청년의 외침과 바램은
그 세월만큼 이루어졌는지 되돌아봅니다.

별난 재단사 전태일

친구들의 눈에 전태일은 참 별난 녀석이었다. 자그마한 체구에 걸음이 무척 빠른 데다 늘 밝고 명랑했다. 넥타이 없는 양복을 즐겨 입고 머리도 단정히 다듬었는데 매일 저녁 이불 밑에 양복바지를 깔아 놓아 아침이면 빳빳이 줄이 선 바지를 입고 나왔다. 생각이 깊어서 여러 사람들 앞에서도 당당했고 욕이나 험한 말은 쓰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전태일이 남달랐던 것은 재단사로서 미싱사나 시다들에게 유난히 친절했다는 점이었다. 재단사는 미싱사나 시다들에게 독하게 굴어야 했다. 그러나 전태일은 인정이 아주 많았다. 여공들에게 잘해준다는 이유로 툭하면 해고를 당했다. 해고되어 돈이 아쉬우면 시장 근처에서 구두닦이를 하기도 하고 아버지가 만든 점퍼를 가지고 나와 팔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친구들을 만나면 어떻게 평화시장 어린 여공들의 근로조건을 고칠 것인가 이야기했다. 자기가 공장을 세워 좋은 조건으로 노동을 시키면 다른 사업주들도 따라 하지 않을까 하는 공상도 나누고, 좋은 재단사들이 모임을 만들어 근로조건개선에 앞장서자는 제안도 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삼동회였다. 청계천 일대의 세 곳의 옷 제조상가 재단사들이 모였다는 뜻이었다. 1970년 가을, 삼동회원들은 매일이다시피 만나서 평화시장의 근로조건개선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짜냈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외로운 객지생활에 좋은 친구들을 만나 술 마시고 노는 데 더 재미를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때문에 친구들은 술과 담배도 하지 않고 만나면 오로지 근로조건 개선 이야기만 하는 전태일에게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한 잔 마셔! 태일이가 술 안마시면 나 삼동회 안 해!”

친구들이 농담으로 떠들면 전태일은 그제야 ‘알았어, 알았어.’ 하며 막걸리 한 잔 마시고 담배도 받아 피우며 씩 웃었다. 그래도 야유회를 가면 ‘맨발의 청춘’ 같은 유행가도 곧잘 부르고 개다리 춤과 바보 흉내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삼동회원들은 이 독특하고도 재미있는 친구를 좋아하고 잘 따랐지만,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죽음조차 두려워 않는 사랑의 정신이 들어있는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하얀 눈 내린 도시락을 먹으며

근로감독관에게 쓴 전태일의 편지(전태일의 일기 중에서)

1970년대 청계천 일대에는 2천여 개의 피복공장이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옷공장 1년이면 집을 산다느니, 3년이면 빌딩을 산다느니 하던 호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밑에서 일하는 2만 7천여 노동자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끔찍한 노동과 가난뿐이었다. 하루 평균 14시간에서 16시간까지, 일요일은 물론 국경일조차 거의 놀지 못한 채 일 년 내내 혹독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의류산업이 호황이라 명절 때 사흘 노는 게 전부일 정도로 일이 많았다. 크리스마스 날, 저녁 6시에 일이 끝나자 다 같이 만세를 부르며 좋아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어떤 집은 한 달에 한 번은 논다느니, 일 잘하는 사람에게 명절 때 쌀 한 포를 준다더라 하는 소문에 솔깃해 옮겨 봐도 가보면 거기서 거기였다.

공장은 숨쉬기도 힘들 정도로 먼지가 많았다.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까면 몇 숟가락 먹기도 전에 시커먼 꽁보리밥 위에 먼지가 눈처럼 하얗게 내려 앉아 흰 쌀밥처럼 보일 정도였다. 마스크가 있어도 덥고 숨이 차서 쓸 수 없는 지경이었는데, 어린 시다가 마스크를 썼다고 건방지다며 따귀를 때리는 사장도 있었다. 대부분의 여성노동자들은 자취방 하나 얻을 돈조차 없어 먼지구덩이에서 공장 바닥에서 새우잠을 자야 했다.

청계천 생활 몇 년 만에 폐병에 걸려 죽어나가는 어린 여성들이 숱했지만 보상이나 산재보험 따위는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 재봉틀 바늘이 손톱에 박히면 펜치로 빼버린 다음 미싱 기름을 발라주고 바로 일을 시키는 사장도 있었다. 노동자는 기계가 되고 손가락은 부품이 된 셈이었다.

마술처럼 쏟아지는 돈에 미친 사장들에게는 노동자들의 고통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국민의 기본권을 짓밟고 들어선 군사독재의 눈에 그 고통이 들어올 리도 없었다. 끔찍한 노동현실을 개선하는 일은 온전히 노동자 스스로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전태일과 친구들이 그 운명의 역할을 맡게 된다.

배가 고프다

전태일 분신 사망 후 운구와 오열하는 참배객의 모습

청년들은 평화시장 곳곳을 뛰어다니며 소리쳤다. 1970년 11월 13일 정오였다.

“나오세요! 모두들 나오세요! 좋은 구경거리가 있으니 국민은행 앞 구름다리로 나오세요!”

삼동회원들이었다. 노동자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평화시장 가운데 구름다리 밑으로 어슬렁어슬렁 모여들었다. 미리 알고 있던 형사들과 신문기자들도 여기저기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삼동회원들은 형사들의 방해를 피해 시장 3층 어두침침한 복도로 모였다.

“꼭 성공해야 해. 플래카드는 잘 챙겼지?”

종이로 만든 플래카드에는 ‘일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햇빛을!’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같은 글귀들이 쓰여 있었다.

“내려가자!”

전태일의 말에 따라 회원들은 일제히 플래카드를 펼쳐들고 밑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2층에서 기다리던 정복 경찰과 형사들에게 곧바로 붙잡히고 말았다.

“어딜 가! 그거 이리 줘!”

형사들은 다짜고짜 플래카드를 뺏으려 들었다. 종이로 만든 플래카드는 바로 찢어져 못쓰게 되었다.

“좋다! 플래카드가 없으면 못 할 줄 알아?”

흥분한 회원들이 형사들을 뿌리치고 내려갈 때였다. 전태일이 이상하리만큼 침착하게 말했다.

“너희들 먼저 내려가서 담뱃가게 옆에서 기다려라. 난 좀 있다 갈 테니.”

회원들은 별 생각 없이 먼저 내려갔다. 전날, 전태일이 아무도 지키지 않는 근로기준법을 불태워 버리겠다고 휘발유를 샀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본인이 분신을 하리라는 데 생각이 미친 사람은 없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화염에 휩싸인 전태일이 소리 지르며 내달린 것은 불과 몇 분 후였다. 바람이 센 날이었다. 불길은 순식간에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를 혹사시키지 마라!”

구호를 외치던 전태일은 불길을 들이마시고 기절해 엎어졌다. 놀란 삼동회원들이 달려가 점퍼를 벗어 불을 끄려 했으나 불길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경비원이 소화기를 가져와 겨우 불길을 잡았을 때, 그의 몸은 이미 회복할 수 없는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다.

“이름이 뭡니까? 요구사항이 뭡니까?”

소문을 듣고 취재하러 나와 있던 기자들이 녹음기를 들이댔다. 전태일은 온 힘을 모아 일어나더니 뭔가 말을 하려 했으나 기도가 불에 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몇 미터를 서성이며 중얼거리다가 다시 쓰러져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한 시간 후, 삼동회원들은 미친듯이 울부짖으며 시위를 벌였다.

“하루 16시간 노동이 웬말이냐?”

“근로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게 하라!”

그들의 손에는 문방구에서 산 백지에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흘러내린 피로 쓴 혈서가 들려 있었다. 이에 분신을 목격한 후 작업장에 들어가지 않고 서성이던 젊은 노동자 수십 명도 합류해 동대문 쪽으로 함께 행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곧장 대기하고 있던 경찰의 곤봉과 구둣발에 무참히 짓밟혀 연행되고 말았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년) 제작비 모금을 위해 만든 팸플릿. 전태일의 어머니 고 이소선 여사가 환하게 웃고 있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이 아들의 소식을 들은 것은 두 시 라디오뉴스를 통해서였다. 평소 어린 여공들의 근로조건을 개선해야 한다며 어려운 노동법을 읽고 이상적인 공장을 꿈꾸던 아들이었다. 하지만 분신까지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제 사십대 초반의 과부인 그녀에게는 너무나 벅찬 일이었다.

“태일이 엄마, 설마 죽겠어요? 어서 병원에 가봐요.”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위로하고 있을 때, 아들의 친구인 김영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택시를 타고 왔다. 김영문은 어서 병원에 가자고 재촉했다. 그러나 이소선은 담담히 말했다.

“영문아, 택시를 그냥 보내라.”

다들 택시를 타라고 했지만 그녀는 끝내 택시를 보내고 버스를 탔다. 자신이 무얼 해야 할지 생각할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아들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아들이 자신에게 남긴 숙제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다.

이소선이 병원에서 아들의 주검을 지키고 있을 때, 정부에서는 작은 빌딩을 한 채 살 수 있을만한 현금을 싸들고 찾아와 조용히 장례를 치를 것을 요구했다. 그녀는 돈다발을 관리들의 얼굴에 집어 던지며 아들의 뜻이 이뤄질 때까지 온몸으로 싸울 것을 맹세했다.

이소선은 분신현장을 지켰던 삼동회원들과 함께 청계피복노동조합을 만들어 아들의 뜻을 지켰다. 그리고 2012년 사망할 때까지 40여 년간, 전태일의 어머니로서, 한국 노동자 모두의 어머니로서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모든 것은 전태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그 뜻을 이뤄낸 것은 어머니 이소선과 친구들, 그리고 수많은 노동자와 양심적인 지식인들이었다.

글 안재성(소설가, 평전작가)
1989년 장편소설 <파업>으로 전태일문학상 수상하며 등단했으며 이후 대표작으로 <사랑의 조건> <황금이삭> <경성트로이카> <연안행> 등의 장편소설과 <이현상평전> <박헌영평전> <이관술>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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