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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아픔의 ‘장벽’.. 바르샤바 유태인들의 '게토'를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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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아픔의 ‘장벽’.. 바르샤바 유태인들의 '게토'를 선언
  • 안데레사 기자
  • 승인 2018.11.11 0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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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인간의 성채 '게토' > 1940년 11월 16일

 유태인들의 거주 구역을 일컫는 '게토'의 이름은 그 연원이 오래 되었다. 중세 때부터 유럽인들은 유태인들을 격리시켜 그곳을 벗어나지 않고 살게끔 강조했고 '게토'라는 단어 자체가 사용된 것은 1516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다.

“유대인은 모두 게토에 있는 집단거주지에서 공동으로 살아야 한다. 문은 아침에 열리며 자정에 보초병이 닫아야 한다. 자정 이후에 유대인은 밖을 다닐 수 없다. 보초병에 대한 급료는 유대인들이 지불해야 한다.”

종교 외에는 다를 바 없고, 신앙 이외에는 차이가 없는 이들을 특정 지역에 몰아넣고 외부와의 통행을 금지하고 고립된 삶 속으로 몰아넣는 야만적 격리처를 뜻하는 '게토'를 세계적으로 익숙한 단어로 만든 것은 나찌들이었다. 그들은 1940년 11월 16일 바르샤바에서 유태인들의 '게토'를 선언한다. 이는 유태인 절멸 계획을 위한 시설이 완공되기 이전의 대기실 격이었고 10만명도 수용하지 못할 공간에 50만명을 밀어넣은 아수라장이기도 했다.

3m 높이의 콘크리트 벽으로 외부와 차단된 게토 안에서는 만성적인 식량난과 전염병이 발생했고 유태인들은 속절없이 죽어 나갔다. 그를 탈출하려는 유태인들을 막기 위해 1941년에는 총살령이 발동됐고 유태인들의 필사적인 반란이 일어나기 전 이미 12만명이 넘는 유태인들이 죽어갔다.

오래전에 조갑제라는 보수 언론인이 이스라엘의 전 수상 이츠하크 라빈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조갑제는 억지스럽게도 게토와 강제수용소의 트라우마를 간직한 이스라엘 수상에게 그 공분을 불러 일으키고 북한의 만행(?)을 그의 입을 빌려 규탄하려는 목적으로 북한의 수용소 실태에 대해 설명하려 든다. 물론 유태인 대량 학살과 게토에 빗대면서. 그때 라빈은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우리는 중동 국가더러 민주주의하라고 하지 않소! 그건 그 나라의 문제요. 하지만 유태인 대학살은 한 족속을 절멸시키려는 가공할 시도였소. 무엇도 거기에 비길 수는 없소!". 조갑제는 북한의 수용소 현실도 그에 못지 않다고 항변했지만 라빈의 기세 앞에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아픔을 겪은 민족, 그 참담함을 겪은 민족이 오늘날 게토의 주인공이 된 것은 역사의 장난이라고 해야 할지 심술이라고 해야 할지. 지난 2002년 6월부터 이스라엘은 총연장 640km 길이의 분리장벽 건설을 밀어붙여 왔다. 동예루살렘을 감싸는 8미터 높이의 이 콘크리트 장벽을 이스라엘 총리는 "테러리스트들이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보안 장벽"이라 불렀다. 나찌스와 똑같은 소리였고 그 장벽 안의 팔레스타인인들은 바르샤바의 게토 안의 유태인의 고통을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다.

게토는 바르샤바에만 있지 않고 팔레스타인에만 부활한 것이 아니다. 인디언 보호구역이라는 이름의 오래된 '게토'도 있고 2016년 하계 올림픽을 유치한 브라질 정부는 당시 빈민가를 감싸고 도는 장벽을 건설 했었다. 공사가 끝나 빈민가는 3미터의 장벽이 포위한 게토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게토는 외국에만 있을까. 우리는 그런 야만에서 자유로울까. 애석하게도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 중세기에 전 유럽으로 확산된 게토는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 철폐와 더불어 하나 둘 사라졌지만 러시아와 폴란드, 체코 등지에서는 20세기 들어서까지 그 명맥을 유지했다. 사진은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를 둘러싸고 있던 담장의 일부.

촬영차 한 아파트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난감했던 일은 단정하게 동 숫자가 매겨진 아파트들 사이에서 내가 가야 할 동을 도무지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디. 어찌어찌 문제의 동을 찾긴 했는데 그때껏 내가 걸어온 길에서는 그 동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없었다. 촘촘하게 심어진 아카시아 나무들을 지나 꽤 긴 걸음을 돌아들고서야 겨우 제보자를 만날 수 있었던 나는 무슨 아파트를 이런 식으로 지었냐고 볼멘소리를 토해 냈다. 그때 제보자 아주머니는 씁쓸하고 짤막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여기는 임대잖아요. 출입하는 데가 달라요."

게토(Ghetto)가 그것이다.

게토라는 말의 어원에 대해선 아직도 불분명하다. 사실 유대인 격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시행되고 있었다. 1280년 모로코에선 이슬람교도들이 유대인을 격리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킨바 있다. 1300년대 중반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자 그리스도교인들은 별도의 지역을 정하고, 유대인들을 그곳에서만 거주토록 했다. 유대인들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한다는 명목이었다. 특히 당시 이탈리아에선 유대인 거주지역을 담장으로 둘러싸 다른 지역과 분리시켰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체코의 프라하 등지에서도 유대인 격리 지역이 생겨났다.

그러나 게토라는 말이 직접 사용된 것은 1516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다. 베네치아의 귀족 ‘돌핀’에 의해 제안된 게토는 곧 대다수 시민들의 호응을 얻었고, 일사천리로 처리된다. 그해 3월 29일 반포된 베네치아 시의회의 포고령을 보자.

“유대인은 모두 게토에 있는 집단거주지에서 공동으로 살아야 한다. 문은 아침에 열리며 자정에 보초병이 닫아야 한다. 자정 이후에 유대인은 밖을 다닐 수 없다. 보초병에 대한 급료는 유대인들이 지불해야 한다.”

유대인들이 격리된 곳은 한때 주물공장이 있던 곳으로, 섬이었다. 그래서 학자들은 게토라는 말이 주물을 뜻하는 라틴어 게타레(Gettare)의 베네치아 말 ‘기센’‘기세라이’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게토에 장벽이 세워졌다. 밖으로 연결된 2개의 통로에는 각각 2명씩 모두 4명의 보초병이 배치됐다. 섬 주위에는 6명이 감시용 선박을 타고 수시로 순찰했다. 이들 10명의 급료는 모두 유대인들이 지불해야 했다. 게토에 수용된 인원은 2412명이었다. 100년 후에는 게토 공간을 넓혀 총 5000여 명의 유대인들을 수용했다.

유대인들은 이를 받아들였다. 저항하지 않았다. 자신들에게 좋은 점도 있었기 때문이다. 게토에 머무르는 동안은 타 민족의 폭력으로부터 안전했다. 율법 준수 및 회당에서의 모임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유대인들로부터 그리스도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게토는 동시에 그리스도교인들로부터 유대인들을 보호하는 기능을 했다. 게토는 또 이슬람교도들의 인신매매에서도 안전할 수 있었다. 당시 이슬람교도들은 유대인 납치에 적극 나섰는데 이는 납치당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유대인 사회가 많은 돈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게토의 효용성(?)이 베네치아에서 증명되자, 유럽 각국은 게토 설치에 적극 나섰다. 이후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 각지에 있던 게토는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 철폐와 더불어 하나 둘 사라졌다. 하지만 러시아와 폴란드, 체코 등지에서는 20세기 들어서까지 그 명맥을 유지했다.

그중 유명한 것이 나치 독일이 폴란드 바르샤바에 설치한 게토다. 높이 3m, 길이 18km의 담장으로 둘러싸인 3399㎡의 게토 안에는 50만 명의 유대인들이 수용됐다. 이때 유대인 젊은이들은 ‘유대인 투쟁조직’(Jewish Fighting Organization)을 결성, 1943년 게토 안에서 50여 명의 독일군을 사살하고 강제 수용소로 이송될 예정이었던 수많은 유대인들을 구출했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 뿐이었다. 보복에 나선 독일군은 그해 파스카 축일에 게토에 진입, 5만 6000여 명의 유대인을 체포하고 7000여 명을 처형했다. 당시 바르샤바 게토의 처참함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가 2002년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The Pianist)다.

이와 관련, 가톨릭교회는 유대인들이 받았던 박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통탄했다.

“누구를 박해하든지 간에 박해라면 무엇이나 다 교회가 배격한다. 교회는 유대인들과의 공동 유산을 상기하며, …유대인들에게 대한 온갖 미움과 박해와 데모 같은 것을 언제 누가 감행하였든지 간에 차별 없이 통탄하는 바이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4항)

유대인을 대상으로 하는 게토는 오늘날 사라졌다. 하지만 게토는 또 다른 모습으로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지금 팔레스타인 지역을 게토화하는 작업에 진력하고 있다. 2016년 하계 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브라질도 2010년 초부터 빈민가 판자촌 둘레에 담을 치는 공사에 나섰다. 작업이 마무리되면 빈민가 13곳이 80㎝~3m 높이의 콘크리트 장벽에 둘러싸이게 된다.

대한민국에서 험악하기로 말하자면 역대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을 프로그램의 연출자로서, 눈과 귀에 담기 싫은 풍경과 소리들을 숱하게 접해 봤지만 그날 마주했던 아카시아 담장은 좀체 떨어뜨리기 힘든 악성 종양같은 기억으로 남았다. 한 아파트의 명찰을 달고 있으면서도 출입구가 다르고 다른 동과의 교류마저도 어려운 외딴 동. 그곳은 게토가 아닐까 아닐 수 있을까.

어느 교육열 높은 단지에 이똥처럼 낀 임대주택 단지에 사는 한 학생에게 한 교장이 이렇게 윽박질렀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 " 다른 데 가라고. 너 맡을 선생님이 없다고. 우리 학교 애들 기백만 원 과외 기본으로 받는 애들인데 너 때문에 분위기 망가지고 피해 보면 그건 누가 책임질 거냐고.”. 과연 이 아이의 신세는 노란 별 단 유태인보다 낫고 그의 임대주택은 게토에 비해 백만배 행복할 수 있을까. 게토는 1940년 11월16일 나찌가 만든 그곳에 대한 호칭으로만 남아 있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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