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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박사 원병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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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박사 원병오 이야기
  • 안데레사 기자
  • 승인 2018.11.13 11:3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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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나라로 간 새 박사 > 1970년 10월 3일

경기도 개성에서, 해방 이전 한국 유일의 조류연구가였던 원홍구의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조류학을 공부하게 된 것은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산과 들로 새를 쫓아다닌 경험 덕이었다.  1947년 김일성대학 농학부 축산과에 입학하였고, 단과대학으로 분리가 된 원산농업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월남하였다.  전쟁 기간 육군 포병장교로 참전하였으며, 중위 때 당시 3군단 포병단장이었던 박정희 대령의 전속부관을 지냈다.  전역 후 경희 대학교 생물학과를 거쳐 1961년, 일본 홋카이도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예일대학 대학원의 특별연구원, 경희대 문리대학장 및 교육대학원장, 경희대 부설 한국조류연구소장 및 자연사박물관장, 산림청 임업연구원, 문화관광부 문화재위원, 국제조류보호회의 본부 간사 및 한국본부장을 거쳐 아시아지역 회장, 국제자연 보호연맹 종족보존위원회 위원 및 생태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1994년 경희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할 때까지 학술논문 150여 편과 학술서 18권을 냈다.  50여종의 새로운 조류종을 발견했고, 이동실태나 계절적 분포를 새로 밝혀낸 것이 100여 종이나 된다.  국내 조류학계를 이끄는 학자들 대부분이 그의 제자들. 부자의 인연을 이어준 철새를 위해 한국과 러시아의 철새보호협정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명예교수이며, 한국조수보호협회 회장, 국제환경과학연구소 이사장, 국제조류학회 이사이기도 하다. 무인도의 벼랑에서 국내에서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새의 둥지와 알을 발견했을 때 “만세를 부르다가 줄을 놓쳐 죽을 뻔했다.”고 웃던 그분은 1년에 몇 달은 집에 들어가지 않고 새를 찾아 헤매고 계셨다. “왜 그렇게 새를 좋아하세요?” 하니 우선은 팔자소관, 두번째로는 ‘자유로움’을 들었다. “호랑이만 해도 휴전선을 못넘잖아요. 고속도로 하나만 나도 짐승들은 길이 끊겨요. 하지만 새는 다르잖아요? ” 그럴싸했다. 특히 1970년 10월 3일 북한에서 세상을 떠난 국내 1세대 조류학자 원홍구 박사에게도 그 이유는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원홍구 박사는 조선 조류 연구의 선구자이자 유일하다시피 한 존재였다. 그 아들들도 부전자전, 장남 병휘는 만주와 조선의 쥐 연구의 대가였고, 아버지의 뒤를 항시 따라다니며 새에 관심을 보이던 막내 병오는 원산농업대학을 졸업하며 아버지의 후학이 될 채비를 한다. 그런데 전쟁이 이 가족을 갈라 놓았다. 아버지와 딸들은 북한에 남았고 아들들은 남쪽에서 터를 잡게 된다.

하지만 원씨 가족은 운이 좋았다. 양쪽 다 국가 최고 지도부의 신뢰를 받으며 안정적인 연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북한의 김일성은 주택과 승용차를 제공하는 등 최상의 대우를 했고, 남쪽의 아들 원병오는 군 복무시 박정희의 부관이 됐던 인연으로 이후 박정희의 전폭적 지원을 받는 행운을 누린 것이다. 각설하고.

아버지처럼 조류학자가 된 아들 원병오 교수는 1963년 쇠찌르레기라는 철새에 가락지(알루미늄 링)를 끼워 날려 보낸다. 그 이동경로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 가락지가 국산이 없었던지라 아들 원 박사는 일본 농림성 마크가 찍힌 가락지를 채울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새가 2년 뒤 평양 만수대에서 발견된다. 당시 북한 생물학연구소장은 가락지를 보고 놀란다. “아니 쇠찌르레기는 일본까지는 가지 않는데 이거 어캐 된 거이가?” 북한은 일본 동경 소재 국제조류보호연맹 아시아 본부에 이 기이한 발견에 대해 문의한다.

새 박사 원병오 이야기』는 세계적인 조류학자 원병오 선생님이 평생토록 새를 사랑하며 연구해 온 자신의 삶을 구수한 입말로 들려 주는 새로운 형식의 인물 이야기입니다. 이전의 위인전이 이미 죽은 인물의 일대기를 시간 순으로 서술한 것에 비해 이 책은 생존해 계신 원병오 선생님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손주인 수영에게 들려 주듯 풀어 써서 생동감을 더해 줍니다. 특히 여섯 살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새 공부를 시작한 뒤 여러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기 위해 새를 연구하고 조사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모습이나, ‘북방쇠 찌르레기’ 의 다리에 가락지를 날려 보내 한국 전쟁 때 남북으로 헤어진 아버지와 소식을 나누는 이야기는 매우 감동적입니다. 원병오 선생님의 새를 사랑하는 마음과 삶을 통해 아이들은 자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확인 결과 가락지를 단 사람은 서울의 원병오 교수였다. 그런데 북한쪽에서 한 번 더 문의가 온다. “한자는 어캐 쓴답니까.” 북한 생물학연구소장의 각별한 관심에는 이유가 있었다. 소장의 이름이 원홍구였기 때문이다. 사실은 곧 밝혀진다. 아들이 날려보낸 쇠찌르레기가 자유롭게 휴전선을 넘어 2년 넘게 노닐다가 아버지의 손에 들어간 것이다. 15년 동안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던 자식이 자신의 뒤를 잇는 조류학자가 되어 가락지를 끼워 보낸 새의 지저귐을 들으면서 노학자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아버지와 아들은 조류학자들의 국제적 교류 과정에서 생사를 확인하고 서신도 교환한다. 그러나 그 이상은 감히 꿈꾸기 어려웠다. 올림픽이라는 평화의 무대에서도 남한의 아버지와 북한의 육상 선수 딸이 단 몇 분을 만나고 갈라진 것이 그 1년 전이었고, 김신조가 청와대를 까러 온 것이 그로부터 3년 뒤였던 엄혹하고 칼날같던 냉전의 땅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새들 뿐이었다. 평양 표식의 가락지를 단 새가 서울에서 발견됐고 아들이 날려보낸 새들은 북한 산야를 아무렇지도 않게 누볐지만 정작 새들을 함께 연구했던 부자는 끝내 상봉하지 못한다. 1970년 10월 3일 아버지 원홍구 박사가 어릴 적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새 이름을 외우던 막내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눈을 감은 것이다. 이 부고조차 일본 학자의 전언을 통해 들었던 아들은 북쪽을 향해 엎드려 대성통곡한다.

그로부터 20년 뒤, 고 원홍구 박사의 기일인 1990년 10월 3일. 같은 분단국가였던 독일의 통일이 선언된다. 그 찢어질 듯한 환호와 열광의 도가니 앞에서 아버지의 20주기를 맞은 노학자가 어떤 마음이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새 발목에 맨 가락지로 아버지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고 평양이 새겨진 가락지를 찾으며 아버지의 흔적에 가슴 떨어야 했던 날들이 딱다구리의 부리가 되어 그 폐부를 쪼아 댔을 것이다. 새들만도 못한 분단국가의 국민된 처지가 검독수리의 발톱처럼 눈가를 후벼 팠을 것이다.

서두에 언급한 조류학자는 촬영후 술자리에서 노래 한 곡을 청하는 내게 이 노래를 불렀었다. 어쩐지 그 노래가 원병오 박사의 마음을 담은 것 같아 옮겨 둔다. 지금은 우리 곁에서 사라진 새 “따오기”.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따옥 따옥 따옥 소리 처량한 소리
떠나가면 가는 곳이 어드메이뇨
내 아버지 가신 나라 해 돋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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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오기 2018-11-26 09:06:09
원병오박사님 새사랑은 경남 창녕에서 복원하고 있는 따오기에게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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