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리’ 1932년 5월호에 실린 ‘서전 경제학사 최영숙 양 일대기’.

[뉴스프리존= 안데레사기자] ‘노동’과 ‘여성’에 대한 개념조차 없던 1930년대. 26세의 최영숙은 핍박받는 조선의 노동자와 여성을 위해 일하겠다는 일념으로 5년간의 스웨덴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귀국길에 오른다. 하지만 5개 국어를 능란하게 구사하는 인텔리 여성에게 고국이 허락한 일자리는 고작 콩나물장수.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던 그녀는 결국 귀국 5개월 만에 숨을 거둔다.

1932년 4월 24일, 동아일보에 한 여인의 부고 기사가 실렸다.그녀가 죽고 난 뒤 그녀의 뱃속에 인도인의 피가 흐르는 ‘혼혈 사생아’가 있었음이 알려지면서 ‘최영숙 씨. 지난 23일 자택에서 별세.’ 최영숙(1906~1932)은 서대문 밖 작은 점포에서 배추, 감자, 콩나물을 팔던 소시민이었는데 왜 일간신문에서 부고 기사까지 냈을까?

조선의 여인, 최영숙

최영숙과 미스터 로가 정식으로 결혼한 사이였는지, 약혼한 사이였는지, 그저 연인 사이였는지 확실치 않다. 미스터 로의 정체 또한 모호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최영숙이 투철한 민족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였고, 여성운동가, 노동운동가가 되기를 희망했고, 조국을 위해 쓰이기를 바랐고, 스톡홀름대학에서 경제학 학사학위를 받았고, 한 남자를 뜨겁게 사랑했고, 조선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고, 비참하게 죽었고, 죽어서도 손가락질 당했다는 사실이다.

무엇이 시대를 앞서간 인텔리 여성을 이처럼 비참한 죽음에 이르게 했을까. 따지자면 최영숙에게 잘못이 없지는 않았다. 여자로 태어났고, 너무 시대를 앞서갔고, 이방인을 사랑했고, 혼혈아를 임신했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원하지도 않는 조국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왔다. 최영숙에게는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

만일 그가 스웨덴에 눌러앉았다면, 국왕의 총애를 받으며 한평생 공주처럼 살았을 것이다.

만일 그가 인도에 남았다면,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아름답게 늙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최영숙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조선에 돌아왔고, 27세 꽃다운 나이에 비참하게 죽었다. 30년 만에 고국을 찾은 하인스 워드의 어머니가 “그때 내가 워드 데리고 한국 왔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그 놈 거지밖에 안 됐겠지?”라고 말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최영숙의 삶보다 더 비극적인 것은 최영숙이 74년이 지난 오늘날 태어났다 하더라도 똑같은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현실이다.

인도청년 ‘미스터 로’와 최영숙. 결혼사진이라고 공개되었지만, 실제로 결혼사진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그녀는 이화학당을 졸업한 뒤 중국 난징에서 4년 동안 유학 생활을 하였다.
이후 스웨덴 여성학자 엘렌 케이에 매료돼 1926년 스웨덴 스톡홀름대학으로 혈혈단신 유학을 떠난다.

‘동양인 최초 스웨덴 여성 유학생’이자 ‘조선인 최초 여성 경제학사’로 영어,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 스웨덴어까지 능숙하게 구사하던 인재로 당당하게 고국으로 금의환향했다.

하지만 아직 여성의 사회진출이 어려웠던 시대, 더구나 1920년대 말 불어 닥친 경제 대공황 속에 그녀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결국 먹고사는 일마저도 힘들어진 그녀는 여성 소비조합을 인수해 매장을 열어 콩나물 등을 팔며 학생을 위한 교과서 ‘공민독본’을 편찬하느라 동분서주하다 영양실조와 임신중독증으로 2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남녀평등권이 실현된 그들의 생활. 여성들이 행복하고 자유스러운 사회활동이 참으로 부럽습니다. – 최영숙 –

그 어느 때 보다 뛰어나 인재의 노력이 절실했던 시기에 그녀가 이루지 못한 무한한 일들을 펼치지 못해 안타까움이 더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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