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은 지난 2007년 10만원 고액권 지폐 인물로 선정됐다. 당시 여론조사에서도 압도적 지지를 받았을 정도다. (정작 지폐 발행은 이명박 정부 이후 10년 넘게 중단된 상태지만.. )

한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로서, 남북분단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던 백범은 지난 1949년 6월 당시 육군 소위였던 안두희에게 암살됐다. 서북청년단 간부였던 안두희는 미군 방첩대(CIC)의 정보원이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안두희가 옥에 갇힌 지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그는 잔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소위로 복직 이후 대위까지 진급했다. 휴전 이후 육군 소령(혹은 대령)으로 예편했고, 강원도 양구에서 군납업을 하며 떵떵거리며 살았다고 한다. 당시 사단장이 부임하면 그에게 ‘알아서’ 찾아와 인사했다고 한다. 당시 그의 납세 신고액이 강원도에서 두 번째로 많을 정도로 엄청난 부를 누렸다고.

1955년 당시 일본에 주둔하던 미 육군 ‘308방첩대’의 정보보고서에는 안두희에 대해 "이승만에 가장 충성 바치는 지지자, 이승만 반대파 탄압을 위해 청부폭력단을 조직하고 지휘함, 이승만이 가장 총애하는 측근"이라고 서술했다. 그만큼 백범 암살 이후 강력한 권세를 누렸단 증거다.

그런데, 최근 < 서울의소리 > 응징취재 도중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 서울의소리 > 취재진이 ‘백범은 빈라덴 같은 테러리스트’라는 막말을 한 지만원을 응징하러 가던 도중, “안두희가 애국자”라고 아주 당당하게(?) 답한 한 중년 남성이 있어 참 어이를 상실하게 했다.

아무리 독재자인 이승만을 ‘국부’로 추종하는 뉴라이트 세력도, 일본군 출신 독재자인 박정희를 떠받드는 사람이라도, 아무리 백범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라도 감히 안두희가 애국자라고 얘길 하는 건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1996년 10월, 안두희가 박기서씨가 휘두른 ‘정의봉’에 맞아 죽었을 때 안두희의 빈소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영정조차 없이 이름 석 자만 덩그러니 붙어있었다. 얼마나 사회적인 공분을 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박기서 씨의 정의봉에 맞아죽은 안두희의 빈소, 아무도 찾지 않았다. 영정도 없었다. ⓒMBC

또 안두희를 처단한 박기서 씨를 동정하는 여론도 거셌다. 박씨에 대한 변론을 맡겠다는 변호사들이 줄을 이었고, 그의 가족들을 돕겠다는 사람도 많았다. 당시 안두희를 쓰러뜨린 '정의봉' 이란 말이 한동안 유행어가 된 것도 "안두희는 맞아 죽어도 싸다"는 여론이 굉장히 강했다는 걸 보여준다.

최근의 황당한 상황을 보고 나니, 22년전 안두희를 처단했던 박기서 씨가 문득 떠올랐다. 지난 13일 박기서 씨를 < 저널인미디어 > 스튜디오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정말 도저히 생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자기 주체적이 아닌, 허수아비 같은 삶을 산다면…”

박기서 씨는 최근 현실에 대해 “어떤 사람은 전두환 정권 때가 좋았다는 사람도 있고, 박정희를 아예 신으로 추앙하는 사람도 있다”며 “백범 선생을 테러리스트 취급한 지만원뿐만 아니라, 저런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부천 남부역에 가면 박근혜와 박정희 사진, 그리고 성조기와 태극기를 걸어놓고 입당원서를 받고 있더라. 그런 걸 버젓이 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그는 나아가 “어느 절의 주지스님이란 분이, 박정희 육영수를 신처럼 모시고 살고 있다고 한다. 이런 세상에 같이 살고 있다”고 거듭 개탄했다. 특히 “많이 배웠다고, 제대로 된 역사관이 적립되는 것은 아니다. 자기 확증에 매몰돼 있어서 자기 생각을 남에게 주입시키려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며 답답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 지만원은 과거 백범선생을 '테러리스트'에 비유하며 "김구는 빈라덴"이라는 역대급 망언을 했다. ⓒ노컷뉴스

박 씨는 ‘백범은 테러리스트’라고 한 지만원이나 ‘안두희를 애국자’라고 한 남성에 대해 묻자, “어렸을 때 한학을 배우면서 성인들 말씀에도 참 깨우침이 많다는 걸 느꼈다. 돌아보면 나름의 인문학, 인간교육이 아닐까 싶다. 그 때부터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배웠는데, 저들의 삶은 내가 정말 생각할 수 없는 인간상이다. 이해할 수가 없다”고 꾸짖었다. 그러면서 ‘주체적인 삶’에 대해 강조했다.

“사람이 육신적으론 한 번 삽니다. 한 번 밖에 살지 못하는데, 제대로 살아야지 않겠습니까? 자기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고, 타의에 의해 허수아비 같은 삶을 산다면, 그게 과연 잘 사는 사람일까요?”

박 씨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책을 썼지만, 꼭 답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정의롭게 살아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바르게 사는 건가, 깊이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박정희가 무조건 ‘절대적인 영웅’으로 강제되던 시절..”

“모든 비극은 결국 ‘분단’으로부터 왔구나”

“38선 베고 쓰러질지언정.. 백범의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 상징적으로”

박기서 씨는 자신의 유년시절, 청년시절을 회상하며 많은 이야길 했다.

“저는 정부수립 할 때인 1948년에 태어났어요. 유년시절에는 한 끼 밥을 먹기 위해 사는 게 참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고 할까요. 가난이라는 게 참 가장 힘들었어요. 그 다음엔 사람에게 자유로운 생각과 사상을 갖지 못하도록 옮아 맸던 것이 힘들었어요. 박정희가 보릿고개 넘겼다고 경제개발 다 시켰다며 박정희를 무조건 영웅으로 만들던 때였죠. 거기에서 다른 생각을 갖지 못하게 했어요. 그 때 힘들게 고생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박정희가 절대적인 사람(영웅)으로 (세뇌)돼 버렸어요”

그는 “제 일생을 돌아보니까, 유년시절에는 가난에 그렇게 힘들었고 성장해서는 자유로운 생각과 사상을 갖지 못해 힘들었다”고 말했다.

▲ 박기서 씨가 안두희를 내리쳤던 정의봉, 안두희의 피가 선명하게 묻어있다. ⓒ KBS

그는 안두희를 처단했던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이를 더 먹고 나서 모든 비극이 어디에서 오는가라고 생각해보니까 분단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 협력하지 않겠다며) 분단을 막으려던 백범 선생님의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서라도 안두희를 상징적으로 처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그런 인간을 처단하는 값어치가, 소시민으로서 누리는 마음을 상쇄하고도 남을 수 있는 영광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설령 내가 살인자가 될 지라도, 내 진심을 알아줄 날이 있겠지라는 마음으로 결의했다”고 회고했다.

오늘처럼 낀 묵주반지를 보며 다짐..

“한 인간을 죽인다는 것보다, 이 땅의 모든 불의를 응징하는...”

그는 안두희를 처단했을 당시 주변 반응에 대해 “집사람과 자녀들, 친구들, 형제들, 회사 동료들, 고향 동창이나 집안 어른들.. 안 놀라는 사람이 없었다. 처음엔 ‘악행을 했다’고 하신 분도 있었지만, 지금은 ‘우리 기서가 정말 큰 일을’ 다들 이렇게들 말씀하신다”고 말했다.

박기서씨는 자신이 가톨릭 신자임을 밝혔다. 안두희를 ‘정의봉’으로 쳤을 당시 심경을 이같이 떠올렸다. 한 손에 낀 묵주반지를 보여주면서.

“그 날도 오늘처럼 묵주반지를 끼고 갔어요. (안두희가 머물던) 아파트 문 앞에서 문 열리길 기다리던 그 몇 시간동안 가톨릭에서 하는 기도를 했죠. 문이 열린 뒤에 안두희를 처단 헀는데, 당시 한 인간을 죽인다는 것보다 모든 악행을 처단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거 같아요. 이 땅의 모든 불의를 응징하는 그런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니, 두려움이나 망설임 없이 결행하게 됐어요”

그는 묵주반지를 보여주면서, 한편으론 같은 가톨릭 신자인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 문재인 대통령은 언제나 왼쪽 약지에 묵주반지를 끼고 있다. 문 대통령은 어머니로부터 선물 받은 묵주반지를 애장품으로 꼽는다. ⓒ 서울경제

문 대통령도 왼손 약지에 늘 묵주반지를 끼고 있다. 문 대통령은 20여년전 어머니가 선물한 묵주반지를 애장품으로 꼽기도 했으며 과거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묵주반지를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제 천주고 세례명은 시몬(하느님께서 들으셨다)이고, 문재인 대통령의 세례명은 디모테오(하느님을 공경하는 이)죠. 성경에 보면 디모테오 전서가 있지요. 문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집무 보면서 사인하시는 걸 보면 묵주반지가 딱 보여요. 작은 것이지만, 그런 데서도 정말 문 대통령 신앙심이 정말 하느님의 뜻에 충실히 따르는 종이다. 요즘 또 바쁘게 외국에도 다녀오시고, 힘들게 대통령 임무를 수행하고 계신 참 그런 성품이 마음에 와 닿아서, 정말 기쁘게 행복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백범으로부터 배운 ‘독립’.. 45년 운전기사로서의 삶”

“남이 세워주는 게 아닌, 홀로 선다는 것”

칠순을 넘긴 박 씨는 지금도 택시기사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 무려 45년을 버스기사와 택시기사로 일했다고 한다. 그런 긴 시간동안 운전을 했음에도 ‘무사고’ 경력을 자랑한다.

그는 “시골에서 상경했을 때 처음 운전을 배우게 됐는데 참 재밌었다. 또 계속 운전하면서 즐거웠다. 당시엔 차가 몇 대 없었으니, 운전기사도 드물던 때”라며 운전하는 게 지금도 즐겁다고 한다.

그는 백범 선생을 통해 가장 깊게 배운 가치를 역시 ‘독립’이라고 강조했다.

“독립은 홀로 독(獨)자, 설 립(立)자죠. 혼자 선다는 얘기입니다. 인간이 혼자 선다는 얘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갓 태어난 아기가 우뚝 서서 두발로 걷는 거 보면 신기하죠? 그 독립이란 것을 무언가 물질적인 도움을 받아서 한다던가, 남이 세워준다 하면 오래 서질 못해요. 저는 인생에서 독립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생각해요. 그걸 백범이라는 분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게 됐습니다. 앞으로 남은 생이 얼마나 될지는 몰라도, 계속 그렇게 살 것입니다”

한국에선 소위 친일파 후손들, 이어 군사독재정권에 부역한 이들이 처벌받기는커녕 부와 권세를 크게 누리며 사는 경우가 정말 많다. 뻔뻔하게도 재산을 되찾겠다며 국가상대로 소송을 남발하기도 한다. 조상의 행위에 대해 고개 숙여 사과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며, 오히려 그 부를 자신이 정당하게 얻은 것처럼 뻔뻔하게 강변하곤 한다.

반대로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굉장히 가난한 경우가 많다. 오죽하면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정말 개탄스러운 말은 세계에서 유독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말이 됐다.

▲ 친일파들의 재산환수, 아직 제대로 이뤄지지도 않고 있다. 오히려 뻔뻔하게 땅을 돌려달라고 소송 거는 후손도 있다.     © YTN

박기서 씨는 “그런 사람들 보면 똑바른 정신이 박히지 않았다”면서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내가 힘들게 벌지 않아도 풍요가 찾아오면 나태해지기 마련이다. 독립을 할 수 없게 되는 거다. 공것을 바라고, 또 힘 덜 들이고 많은 걸 취득하는 게 관성이 돼버린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안두희가 한동안 양구에서 엄청난 부를 누리고 살았던 데 대해서도 강하게 분노하기도 했다. 그는 “세계사를 돌아봐도 그런 암살자들은 반드시 제거됐다. 대한민국에서만 그런 암살자가 부를 누렸다”고 분개했다.

소원은 효창공원의 ‘성역화’.. 정신 드높여져 후세에 전해지길
‘부민관 의거’ 조문기 지사와의 뜻깊은 일화

박 씨는 앞으로 가장 소망하는 것이 백범 선생의 묘소가 있는 효창공원이 하루빨리 독립기념공원으로 성역화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를 통해 효창공원에 묻힌 독립운동가들(백범,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정신을 드높여서 앞으로 커나갈 청년학생들에게 그분들의 정신을 심어주는 것이라 했다.

박 씨는 “설령 험하고 힘든 일일지라도, 바르게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편하게 가려하고 쉽게 가려하다보면 잘못 가게 된다. 또 내가 바르게 가야한다고 외쳐도, 옆에서 '그곳은 바른 길이 아니야' 라며 밀고 당기는 사람들도 있고 여러 가지 장애요소도 있다. 그래도 자기 의지가 굳세야 한다. 그래야 바른 길로 간다”고 말헀다. 그러면서 “효창공원에 계신 분들은 정말 바르게 가신 분들”이라고 강조했다.

박 씨는 최근 안두희를 내리쳤던 피 묻은 ‘정의봉’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으로 가입한 지 20년이 넘었다고 밝힌 뒤, 가입하게 된 일화를 소개했다.

▲ 지난달 박기서 씨는 안두희에게 휘둘렀던 정의봉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 연합뉴스

“제가 안두희를 치고 나서 감옥갔을 때,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님께서 찾아오셨어요. (일제 강점기 마지막 의거인) 부민관 폭파 의거의 주역이시기도 하죠. 당시 처음 뵈었어요. 창살이 가운데 막고 있어서 바로 뵙지는 못했지만, 당시 제게 ‘박기서 동지, 우리 박기서 동지는 이 시대의 독립운동가요’ 라고 하셨어요”

“광복회 부회장도 하시고, 평생 친일파 청산에 앞장서셨어요. 말씀도 행동거지도 참 바르셨습니다. 정말 고개가 숙여지는 분이셨어요. 그 때 제게 ‘박 동지, 회원으로 와야 돼’ 하시더군요. 그래서 민문연 회원으로 가입하게 됐고, 지금도 함께하고 있어요. 최근에 많은 동지분들이 식민지역사박물관 생겼으니 정의봉 기증하자 권유하셔서, 동지들 뜻대로 기증하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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