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복지 논쟁이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지난 2010년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촉발한 ‘무상급식’ 파동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 한강아라뱃길, 세빛둥둥섬 등등 천문학적 예산이 들어가는 토건사업과 서울시 홍보비에는 아낌없이 돈을 퍼부어놓고는, 학생들에게 주는 밥 한 끼에 대해선 ‘과잉복지’ ‘복지 포퓰리즘’이라고 원색 비난하는 이중 잣대를 보이며 여론의 비웃음을 사면서다.

오 전 시장은 자신의 주장이 맞다는 걸 증명해보이겠다며, 시장직까지 거는 주민투표를 강행하다 결국 주민투표가 무산되며 시장 직에서 물러난다.

▲ 토건사업엔 막대한 돈을 쏟아붓던 오세훈 전 시장은 자신의 주장이 맞다는 걸 증명해보이겠다며 주민투표를 강행하다, 결국 주민투표가 무산되며 시장직에서 물러났다. ⓒ한겨레TV

보편적 복지에 대해 맞서, 당시 자유한국당과 그와 궤를 같이 하던 언론들이 만들던 프레임은 ‘이건희 손자에게도 무상급식을 줘야 하느냐’ 가 대표적이다. 세금을 제대로 납부했으면, 급식이라는 권리를 받을 권리도 있는 것임에도. 그리고 그 정도의 부유층이 전체 국민의 몇 퍼센트나 될까?

‘무상급식’은 사실 그보다 한참 전에 등장한 화두였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 각 후보들이 ‘무료급식’ 관련 공약을 했다. 특히 재벌회장인 정주영 통일국민당 후보의 공약이 가장 파격적이었는데 ‘국민-중학교 전면 무료급식’이었을 정도다. 거의 20년 전에 나왔던 이야기가 참 뒤늦게도 실현된 것이다.

‘보편적 복지’ 불붙자 박근혜가 쏟아낸 온갖 복지 정책들

‘경제민주화’ 김종인까지 영입하며 “내가 대통령되면 다 하겠다”

‘오죽하면’ 노회찬 “내가 박근혜 10대 공약을 앞장서서 입법”

보편적 복지 프레임에 밀리기 시작하면서, 자한당 전신 한나라당, 새누리당도 복지 정책을 잇달아 발표하기 시작했다.

특히 박근혜가 2011년 말 19대 총선을 약 100여일 가량 앞두고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취임했을 당시, 한나라당은 청·장년층의 구직활동을 장려하기 위해 일정기간 월 30만∼50만원의 ‘취업활동수당’을 지급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 2011년 말 19대 총선을 앞두고 박근혜가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취임했을 당시, 한나라당은 청·장년층의 구직활동을 장려하기 위해 일정기간 월 30만∼50만원의 ‘취업활동수당’을 지급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당시 뉴시스 기사 ⓒ뉴시스

당시 29세 이하 청년 9만명에게 약 30만원씩, 49세 이상 장년층 16만여명에게 약 50만원씩을 지급하자며 예산을 반영하자고 했다. 이 공약대로 4개월 동안 수당을 지급할 경우, 연 4천억원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됐다. 결국 진통 끝에 1529억원이 예산으로 책정됐다.

이는 지난 2015년 한참 새누리당과 언론에서 ‘포퓰리즘’이라고 공격하던 박원순 서울시장의 청년수당이나, 이재명 경기지사가 성남시장 시절 벌인 정책인 청년배당보다 훨씬 많은 액수가 소요되는 복지사업이다. 청년수당+청년배당 소요 예산이 총 200억 가량인 것을 감안하면 7배를 넘는다.

또 박근혜 측은 김종인 전 의원을 대선캠프에 영입하면서 ‘경제민주화’ 공약까지도 내걸며 온갖 복지 공약들을 내걸었다. 구체적인 맞춤형 복지 공약들에 여론이 들썩일 정도였다.

18대 대선 토론에서 문재인 후보는 “증세하지 않고 어떻게 복지재원을 마련하나. 그게 가능하나”라고 박근혜 당시 후보에 물었다. 그러자 박근혜 후보는 아주 자신만만하게(?) “내가 대통령이 되면 다 할 거다”라고 맞받았을 정도니.

▲ 박근혜는 2012년 말 18대 대선 토론회에서 “내가 대통령이 되면 다 할 거다”라는 아주 자신만만(?)한 답을 하기도 했다. ⓒKBS

박근혜 측이 내놓은 공약은 장밋빛 미래를 국민에게 제시하나 싶었지만, 지켜진 걸 찾는 것이 훨씬 어렵다. 분명히 지켜지지 않은 것도 지켰다고 강변한 것은 넘쳐났지만.

이에 대해, 오죽하면 故 노회찬 전 의원이 2016년 20대 총선 출마를 앞두고 “3년이 지난 지금 박근혜 정부는 경제민주화 공약을 지키지 않은 채 ‘재벌 대기업의 대변인’이 되었고, 대다수 국민들은 심각한 소득불평등과 불공정, 경기침체의 늪에서 안간힘을 쓰고 있는 실정이다”라고 지적하며, “박근혜의 경제민주화․ 사회정의 10대 공약을 앞장서 입법하겠다”고 했을 정도다.

생전 촌철살인의 대가였던 그는 이를 ‘진박 10대 공약’이라고 이름붙이기까지 했다.

이명박 “선거 때는 무슨 말을 못해” 홍준표 “국민은 공약 믿고 투표 안해”

김무성 “우선 당선되고 봐야 하는데” 김성태 “공약 100프로 실천하면 나라 망한다”

정치 불신 가중시키는 행태들.. ‘투표율 낮아야 유리’하니 고도의 전략?

‘최저임금 1만원’ 미뤄지자 사과한 문 대통령

공약을 파기했으면, 혹은 시도는 했지만 지키지 못했다면 최소한 사과하는 태도라도 보여야 한다. 하지만 자한당 측 인사들의 ‘공약 파기’에 대한 뻔뻔한 태도는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 이명박은 정권 초기였던 2008년, 방미 중에 “선거 때는 무슨 말을 못하겠느냐"라는 말을 했다가 구설에 올랐다. 당시 프레시안 기사. ⓒ네이버 캡쳐

대표적으로 이명박 정권 초기인 2008년 11월, 이명박이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 당선자를 워싱턴에서 접했을 당시 “오바마는 시카고의 자동차 업계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당선됐는데, 선거 때는 무슨 말을 못하겠느냐"라는 말을 했다가 구설에 올랐다.

선거 때 표를 얻기 위해서라면, 가짜 공약이든 부도수표든 마구 남발해도 상관없다는 식의 망언이기 때문이다.

2011년 2월 당시 한나라당 최고위원이었던 홍준표 전 자한당 대표도 라디오 인터뷰에서 “공약을 갖다가 100% 지켜왔는지 공약이기 때문에 해라,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나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했다가 구설에 올랐다.

▲ 홍준표 전 자한당 대표는 2011년 “나는 대통령 공약이나 그 공약을 국민들이 100% 믿고 투표행위를 한다고는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가 구설에 올랐다. ⓒ국민TV

이에 당시 진행자였던 손석희 JTBC 대표이사가 “앞으로 공약을 안 믿는 상황이 벌어지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렇게 말씀하시나”라고 묻자, 홍 전 대표는 아랑곳 않고 “나는 대통령 공약이나 그 공약을 국민들이 100% 믿고 투표행위를 한다고는 보지 않는다”고 답해 논란을 자초했다.

김무성 자한당 의원이 밝힌 일화도 있다. 그는 지난 2014년 2월 박근혜 정권 당시 대한변협 강연에서 “박근혜는 참모들이 써준 공약을 그대로 읽었다"며 "'내가 당선되면 어르신 여러분 한 달에 20만 원씩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노인들 표가 많이 나왔다"라며 18대 대선 당시 일화를 전한 바 있다. 그러면서 ”박근혜가 '자, 20만원씩 드리라'(고 했는데) 돈이 있어야 주지 않겠냐. 돈이 없는데 어떻게 주냐“라며 박근혜를 옹호했다.

그는 특히 "국민 여러분 내가 당선되면 이런 거 해주겠다. 여기에 속아 가지고 (국민들이) 표 찍어주고 대통령, 국회의원에 당선됐다"라고 밝혀, 박근혜 캠프에서 공약 이행이 불가능한 사실을 알면서도 거짓 공약을 남발했음을 시인했다.

▲ 김무성 자한당 의원은 2014년 “정치인들에게 국가재정건전성을 감안해서 공약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우선 당선되고 봐야 하는데"라며 공약의 현실성보단 ‘당선’이 우선임을 강조한 사실이 알려져 구설에 올랐다. ⓒ국민TV

그는 또 “정치인들에게 국가재정건전성을 감안해서 공약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우선 당선되고 봐야 하는데"라며 공약의 현실성보단 ‘당선’이 우선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최근의 예도 있다. 김성태 자한당 원내대표는 지난 1월 MBC라디오 인터뷰에서 “대선 공간에서는 유권자인 국민들에게 표를 받기 위해 대선 후보들은 때론 좀 무리한 공약을 내건다”라며 “대선 공약대로 실천하면 그 나라는 망하고 만다고, 대선에서 공약 내걸었다고 대선 공약을 액면 그대로 100% 실천해버리면 대한민국 재정은 거덜 날 것이고 나라는 망한다. 국민들이 다 아는 것”이라고 말했다가 또 구설에 올랐다.

▲ 김성태 자한당 원내대표는 지난 1월 “대선 공약을 액면 그대로 100% 실천해버리면 대한민국 재정은 거덜 날 것이고 나라는 망한다. 국민들이 다 아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가 구설에 올랐다. ⓒTV

그런 주장대로라면, 그가 지난 9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내걸었던 공약인 ‘신생아 1인당 1억원 지급’도 말 그대로 “대한민국 재정 거덜 내는 일”일 것이다.

오로지 ‘표를 얻기 위한’ 무책임한 공약 남발의 피해는 결국 유권자가 진다. 저런 자한당의 오랜 행태는 정치에 대한 유권자의 불신을 무한히도 불러온다. 정치에 대한 불신은 투표율의 저하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투표율이 낮아야 자신들에게 유리하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어떤 정당에겐, 또 대중들이 정치에 무관심하길 바라는 기득권층에겐 이런 행태가 자연스럽고, 또 당연한 전략일지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했던 공약이라면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맞다. 노력하다 결국 달성하지 못했다면, 표를 줬던 유권자에게 솔직히 사과하는 것이 맞다. 그러면 유권자 입장에서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고, 정치를 외면하지 않게 된다. 정치의 신뢰를 높이는 것이기도 하다.

▲ 문재인 대통령은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을 지키지 못한 데 대해, 지난 7월 대국민사과를 했다. 그러면서도 “정부는 가능한 조기에 최저임금 1만원을 실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 KTV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7월,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을 지키지 못한 점에 대해 “결과적으로 대선공약을 지키지 못하게 된 것을 사과드린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최저임금위원회는 작년의 최저임금 대폭 인상에 이어 올해에도 두자리수의 인상률을 결정함으로써 정부의 최저임금 정책에 대한 의지를 이어줬다”며 “정부는 가능한 조기에 최저임금 1만원을 실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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