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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4년 한양 천도 막전막후, 조선건국
  • 정호천
  • 승인 2018.12.04 11:55
  • 수정 2018.12.04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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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양 천도 막전막후, 조선건국과 한양천도 >

몇 년 전 행정수도 이전의 문제가 정국을 달군 적이 있다. 고려 공양왕으로부터 왕위를 선양 받은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최고 의사결정기관인 도평의사사에 한양으로의 천도를 명하였다. 실제로 한양천도가 최종 확정되고 현실화되기까지는 2년 여의 기간이 더 걸렸지만 조선 건국 초기부터 한양은 새로운 도읍지로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2002년 대통령 선거의 뜨거운 쟁점이었으며, 이것이 ‘수도’ 서울의 위상과 관련하여 논란의 대상이 된 끝에 헌법재판소는 서울이 ‘관습상의 수도’라는 판결을 내린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관습상’ 수도는 고조선 이래 수도였던 평양이나 천년 신라의 고향인 경주가 돼야 하지 않는가 따위의 의문은 들지만 차치하고, 일단 확실히 할 수 있는 얘기는 당시 헌법 재판소의 판결은 이 나라의 수도는 ‘서울’이라는 강고한 의식을 드러낸 실례의 하나라는 것이다.

이 집착(?)은 심지어 북한 정권에서도 보인다. 북한 정권 역시 1948년 제정된 그들의 헌법상 명기된 수도는 그들이 정권을 휘두르던 평양이 아니라 서울이었던 것이다. 그게 고쳐져서 평양을 수도로 한 건 1972년 12월, 그 이전까지 북한 사람들이 생각하던 수도 역시 평양이 아니라 서울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서울’이란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서 ‘셔블’이 되고 ‘서울’이라는 이름에 이른,  ‘수도’(首都)의 순 우리말이다. 그런데 이 ‘서울’이 한강을 끼고 북악을 머리에 인 오늘날의 서울이 된 것은 불과 600여 년 전이었다. 그리고 이 역사를 만든 건 조선 태조 이성계였다.

태조 이성계가 이렇게 천도를 서두른 이유는 고려의 지배층이 엄존하고 있는 개성을 떠남으로써 구지배세력의 영향력을 배제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것이 조선왕조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을 속히 떠나려고 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어째서 한양으로서의 천도를 추진했는가에 대해서는 또 다른 설명이 필요하다. 조선 왕조가 탄생한 것은 물론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으로부터 이성계가 왕위를 물려받은 (또눈 빼앗은) 날로부터 시작했다 하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아니다. 여전히 이성계는 ‘고려’의 왕이었고 그 수도는 우리가 개성이라고 부르는 개경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무려 ‘오백년 도읍지’의 개경.

아마 요즘의 ‘관습 헌법’이상으로 개경을 서울로 여기는 관념이 강력했고 왕이 되긴 했지만 여전히 이성계를 동북면 시골뜨기 취급하거나 왕씨 고려를 추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으리라.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서 태조는 천도를 결심한다.

한양천도에는 신라 말이래 정치적, 사회적 혼란기마다 대두되었던 풍수지리설의 영향이 컸다. 개성의 지덕(地德)이 이미 다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논리인데, 한양은 언제나 주요 후보지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천도를 정당화시키고 대내적 동의를 얻어내기 위한 방편이라는 성격이 켰다. 한양을 도읍지로 선택하게 된 가장 실질적인 요인은 한양이 갖추고 있는 인문 지리적 조건이었다. 이성계의 마음은 꽤 급했던 것 같다. 용상에 앉은지 달포도 안돼 천도 얘기를 꺼내든 것이다. 이때 언급한 장소는 고려 왕조 시절 남경이었던 한양. 북으로 북악산, 동으로 지금의 동대문 근처 낙산, 남으로 용산 지역까지를 망라했던 이 한양 땅은 문종, 숙종, 충선왕 등 고려 왕들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던 곳이기도 했다. 이 일대에 남경이 설치된 것은 까마득히 옛날인 고려 중기 때부터였으며 공양왕은 실제로 이 지역에 천도를 시도한 바 있었다. “송도 왕씨 다음은 한양 이씨”라는 도참설은 이미 까마득히 옛날의 무신 정권 시절부터 집권자 이의방이나 이의민을 들뜨게 했었거니와 ‘ 실제로 나라를 얻은 이성계가 천도를 생각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또 남경이 설치된 지 200년 가까이 됐으니 건물이나 도로 등 기본적인 도시 기반이 갖춰져 있었으리라 짐작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성계의 천도 의사는 신하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친다. 판중추부사이자 개국공신 남은의 반대론의 일부를 들어보자. “신 등이 공신에 참여하여 높은 지위에 오르는 은혜를 입었사오니 새 도읍으로 옮기더라도 무엇이 부족한 점이 있겠사오며, 송도의 토지와 집은 어찌 아까울 것이 있겠습니까? 하오나....” 흔히 듣는 변명 중의 하나로 “내 사적 이익을 떠난 공익적으로” 반대한다는 논리이지만 우리는 그 변명이 대개 사실이 아님을 안다.

하물며 송도에 토지와 집이 있는 사람은 남은만이 아니었다. 개국공신 가운데에도 개경에서 태를 묻고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태반이었고 생활 근거지 또한 개경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천도라니. “내 재산과 토지 때문이 아니오라.....”를 내세워 반대할 밖에. 그러나 태조의 마음은 달랐다. 이후 불거지는 새로운 도읍 결정 과정에서 나온 푸념이긴 하나 이성계는 이렇게 대신들을 몰아붙이고 있다. “도읍을 올기는 일을 명문세가들이 모두 싫어하는 바를 내 어이 모르겠느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를 중지시키려는 심산이다.”

그러나 천도 과정은 시행착오와 번복과 재번복의 연속이었다. 즉위한 다음 해에 풍수도참에 능하다는 권중화라는 이가 계룡산 지역의 신도읍지도를 만들어 바쳤고 이성계는 이에 마치 사랑에 눈먼 남자처럼 다급하게 대처한다. 임금의 부인이 아프다는 이유로, 그리고 황해도와 평안도에 도적들이 들끓는다는 핑계로 계룡산 남하를 만류하던 신하들을 무시하고 계룡산에 이른 이성계는 수도를 그리로 정하고 필요한 공사 건설을 지시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겠다는 것이 태조 이성계의 속내였을 것이다.

새 술을 담을 새 부대가 너무나 부실하게 장만된 것이 문제였다, 지역의 입지나 교통의 문제, 조세 징수의 편리함 등에 대한 다각적인 분석과 신하들의 의견 공유도 없이 일단 땅부터 파고 봤던 일종의 14세기판 불도저 정책이었다. 주변 백성들도 죽을 맛이었다. 계룡산이 있는 충청도 백성들만이 아니었다. 인근의 타도 사람들도 징발돼서 난데없이 계룡산 자락에 모여들었고 특히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로 전라도는 인적 물적 자원의 주요 징발 대상으로 부상한다.

계룡산 공사는 강행됐다. 고역에 못이긴 사람들이 탈주를 감행하고 그들을 잡는 대로 목을 치면서도 궁궐의 기초를 다지고 성벽이 들러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새 수도 건설을 밀어붙이던 이성계는 10개월 뒤 한 장의 상소문을 받는다. 경기도 관찰사 하륜의 것이었다. “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하는데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 있으며 풍수를 고증해보면 물길의 방향이 좋지 못하옵니다.” 하륜의 논리정연한 설명에 감탄한 태조는 계룡산의 도성 공사를 중단시켜 버린다. “이곳이 아닌갑다.” 류의 돌변이었다.

충남 계룡시에는 ‘신도안면’(新都案面)이라는 면이 있다. 바로 새 도읍지로 결정되어 근 열 달 동안 백성들이 죽을둥살둥 궁궐 공사에 동원됐던 곳이다. 그 공사에 쓰인 돌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이 신도안은 오늘날 육해공군 본부가 들어와 면 전체가 군사보호구역이 되어 있으니 여느 땅과는 다른 팔자(?)를 지닌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하륜은 계룡산 천도에 반대하면서 국토의 남쪽에 치우쳐 있다는 것과 풍수상 오히려 계룡산 지역이 좋지 못하다는 논의를 폈다. 신도읍으로 계룡산을 점찍은 가장 큰 이유가 풍수였는데 오히려 풍수가 좋지 못하다고 하니 그제야 나라의 남쪽에 치우친데다 큰강도 끼고 있지 않아 교통도 불편하고 기타 등등의 여건들이 태조의 눈과 귀에 들어온 듯 했다. 다시 고려의 남경, 즉 한양 지역이 수도 후보지로 떠올랐고 하륜이 새 도읍 후보지로 제시한 곳은 무악이었다.

무악이란 오늘날의 무악재와 안산 사이를 말하는 지역이다. 만약 이 무악으로 도성이 결정되었다면 오늘날 신촌골에 들어서 있는 것은 연세대학교 캠퍼스가 아니라 경복궁과 창덕궁일지도 모른다.

태조 이성계는 장군으로서 전투를 지휘할 때도 그랬지만 한 번 마음 먹으면 그에 대한 집착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어찌 되었든 개경을 빨리 떠나고 싶었던 태조 이성계는 몸소 그곳을 둘러보러 나선다. 더위가 가시지 않은 음력 8월. 이성계는 무악으로 행차하여 야영을 하면서 도읍지 후보 시찰에 나선다.

한강변에 위치하고 나라의 중심에 위치하기는 했으나 무악에도 문제가 있었다. 한 나라의 도읍지가 들어서기에는 좀 협소하다는 것이 하나고, 둘째는 역시 풍수였다. 풍수지리를 맡아보던 서운관 관리들은 무악이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상소를 연이어 올렸다. 그러자 한때 고려를 호령하던 맹장이었던 터프가이 이성계가 드디어 분노를 폭발시킨다.

“그대들은 입만 열면 불가하다는 말만 들먹이는데, 그 근거가 도대체 뭐란 말이냐? 만약 이곳이 불가하면 대체 어느 곳이 가하단 말이냐?”

풍수가 어떻고 무엇이 길하고 불길하고 하는 논의에 질릴 대로 질린 빛이 역력한 왕이었으나 서운관 관리 유한우는 그 앞에서 대놓고 이렇게 대꾸한다.

“고려 태조는 명당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후 임금들이 다른 곳에 궁을 지어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송도(개경)의 지덕(地德)이 아직 쇠하지 않았사오니 다시 궁궐을 지어 도읍을 정하심이 좋겠습니다.”

유한우의 속내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르나 그 결기 하나는 알아줄 만하다. 하지만 이성계의 분노는 활활 타오를 밖에. 그는 근처에 그렇게 길한 땅이 없다면 옛 백제 수도든 신라의 수도든 그리고 갈 것이라며 어깃장을 놓으며 신하들을 압박했다.

한양천도에는 신라 말이래 정치적, 사회적 혼란기마다 대두되었던 풍수지리설의 영향이 컸다. 개성의 지덕(地德)이 이미 다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논리인데, 한양은 언제나 주요 후보지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천도를 정당화시키고 대내적 동의를 얻어내기 위한 방편이라는 성격이 켰다. 한양을 도읍지로 선택하게 된 가장 실질적인 요인은 한양이 갖추고 있는 인문 지리적 조건이었다.

하나의 왕조가 도읍지를 선택하는 데는 무엇보다 인문 지리적 요인이 중시 되지 않을 수 없다. 한양은 산으로 둘러쌓여 있는데다가 서쪽이 바다요, 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있어 무엇보다 군사적인 방어에 유리한 지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군사적인 이점에 더하여 또 하나의 중요한 요건이 교통의 편리함이었다.

당시는 경제생활의 대부분을 농업에 의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세금으로 거두어들이는 농업 생산물이 국가 재정의 기반이었다. 정부는 조세곡(租稅穀)을 거두어 수도로 운반해 오는데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육상교통은 극히 빈약했기 때문에 육로를 통해 곡물을 운반하는 것은 매우 곤란했고, 조세곡의 대량 수송은 수상교통에 의존해야만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국가의 도읍지는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하면서도 조세 운반이 편리한 곳에 자리잡아야 했다. 이 점에서 한강 유역에 위치한 한양은 다른 어떤 곳과도 비교될 수 없는 이점을 갖추고 있었다.

어디가 길하고 어디가 흉한지를 주로 따지던 논쟁에서 새로운 논거를 끌어들인 것은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중국의 고사를 들어가며 이렇게 주장한다.

“국가의 치세가 잘 이뤄지고 그렇지 않고는 결국 다스리는 사람에 따르는 것이지 풍수지리상의 성쇠에 갈음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지기(地氣)의 성쇠를 말하는 자들은 그 마음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옛 사람의 말을 다시 읊는 것에 불과하며, 신의 말한 바도 옛 사람들이 경험한 것입니다. 어찌 술사들의 말은 믿고 선비의 말은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스리는 사람이 어떻게 다스리느냐가 문제지 땅의 기운 따위가 무슨 영향을 미치겠는가. 가히 정도전다운 말이다. 21세기에도 어디가 터가 안 좋고 기가 세서 어떤 결과가 나온다는 소리가 횡행하는 요즘에도 귀 기울일 말일 터이고.

무악을 떠난 태조 이성계가 다시 주목한 것이 한양이었다. 나라를 열자마자 도읍지를 옮겨보려고 했던 바로 그 땅. 이성계는 한양이 마음에 들었다. 한양이라는 지명의 뜻은 한강 이북 고을이라는 뜻이다. 북은 양(陽)이었고 남은 음(陰)이기 때문이다. 말썽 많은 서운관 관리들도 “개경이 제일 좋지만 그 다음으로는 이곳 한양”이라며 거들었고 임금이 왕사로 대접하던 무학대사 역시 “사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평탄해서 도읍지로 적당할 것 같습니다.” 고 한양을 지지한다.

이성계는 얼굴을 편다. “이제 이곳의 형세를 보니, 왕도가 될 만한 곳이다. 더욱이 조운하는 배가 통하고 사방으로 통하는 거리도 고르니,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다.” 즉 한양은 풍수상으로도 좋았다고 하지만 결국은 실용적인 견지에서 도읍지로 낙점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 결정이 내려진 것은 무악에 들렀다가 서운관 관리들에게 불호령을 내린 다음날이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따르면 한양 도성 성벽에는 이런 전설이 전해진다. “도성을 쌓을 자리를 결정짓지 못해 고민하던 어느 날 밤 큰 눈이 내렸다. 그런데 어느 선 바깥쪽은 눈이 쌓이는데, 안쪽은 곧 녹아 사라졌다. 태조는 이를 이상하게 여겨 눈을 따라 성터를 정하도록 명했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성 모양이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하나의 진실을 담고 있다. 이 한양성을 쌓았던 것이 엄동설한의 겨울이었다는 것.

도읍지가 결정된 뒤 태조 이성계의 행동은 그야말로 불도저와 같았다. 성벽 공사가 시작됐고 종묘와 궁궐 건설도 흡사 ‘속도전’을 벌였다. 1395년 8월 경기좌도의 인부 4,500명, 경기우도 인부 5,000명, 충청도 인부 5,500명을 징용하여 경복궁 건설을 시작했는데 두어 달도 안 지난 9월 29일에 이를 1차로 완성시킨다. 물론 제대로 된 궁궐이 아니었지만..... ‘도성축조도감’이 설치됐고 1396년 정월에 도성 공사가 시작됐는데 11만 8천명의 인력이 투입돼 1월 9일부터 2월 29일까지 단 49일만에 대충의 성벽을 두르는 1차 공사를 끝냈다. 설 추위 속에 진행된 초강행군이었다.

비록 성문조차 달리지 않은 미완성의 공사였지만 인왕산, 낙산, 남산을 에두르는 한양성벽은 이때 완성됐다. 모든 성벽을 97 구간으로 나누어 진행했고 각 지역을 표시하여 지역민들이 쌓은 구간에 문제가 생기면 다시 불러올려 수리를 시켰다고 하니 백성들의 고충을 알만하다.

개경에서 벗어나려는 태조 이성계의 마음은 그렇게 조급했다. 눈 앞의 욕망과 이익 때문에 밀어붙이는 개발과 공사의 뒷감당은 고스란히 백성들이 하게 마련이다.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고 거니는 18킬로미터 성벽의 기초가 단 49일만에 완성됐다는 사실을 돌이켜보자. 그 성벽이 튼튼할 리 없었다, 결국은 세종 때 30만명의 인력을 동원한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해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부실 공사는 필연적인 재앙이 되어 후대를 덮쳤던 것이다. 하지만 한양이 수도로 굳어지기에는 아직 우여곡절이 많이 남아 있었다.

만약에 조선 오백년 수도 한양을 상징하는 인물의 동상을 세운다면 이 사람을 빼놓고는 논할 수 없을 것이다. 삼봉 정도전. 일찍이 고려말 동북면 촌구석에까지 찾아가 이성계의 군대를 보고 “이런 군대로 못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라고 대담한 소리를 내뱉아 이성계의 야망을 어루만졌던 정도전. 그는 이성계의 제갈량이었고 장자방이었다. 풍수가 좋다고 수도를 국토 남단의 산골짝으로 들어가는 주장을 막았던 사람도, 안산 옆이 좋으냐 인왕산 아래가 좋으냐, 왕이 남향(南向)으로 좌정할 것인지 동향(東向)으로 앉을 것인지 등등 중대한 논의부터 시시콜콜한 시비까지 빠지지 않고 참여하여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킨 사람도 정도전이었다.

훗날 태종 이방원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500년 동안 역적의 이름이 되어, 그 시를 좋아하는 것조차 불온한 사상을 지닌 것으로 치부되는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이 바로 이 혐의를 썼다.) 비극의 주인공. 하지만 그가 신생 왕조 조선의 기틀을 세우고 그 수도 한양의 초석을 닦았음은 부인할 수 없다. 세종 때 명신 신숙주는 이렇게 정도전을 표현하고 있다.

“개국 초에 무릇 나라의 큰 규모는 모두 선생이 만들었으며 영웅 호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으나 선생만한 사람이 없었다.”

오늘날까지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경복궁, 창덕궁 등의 궁궐 이름과 숭례문, 돈의문 등 한양 도성 성문의 이름을 몽땅 다 지어 바친 것도 그였다. 그 중 경복궁의 정전이라 할 ‘근정전’(勤政殿)이라는 이름을 지은 이유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동시에 매우 교훈적이다.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게 됨은 필연한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하온데 하물며 정사와 같은 큰일이야 더 말할 나위 있겠습니까. (중략)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 이를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이 임금의 부지런한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어진 이를 구하는 데에 부지런하고 어진 이를 쓰는 데에 빨리 한다 했으니, 신은 이것으로서 이름 하기를 청하옵니다.”

풍수 어쩌고 하며 계룡산이 좋네 송도가 좋네 하는 사람들에게 “풍수 따위가 아니라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라 일갈했던 정도전. 그 모습 그대로 정도전은 그 명명을 통해 왕의 할 일을 깨우쳐 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시대의 ‘신(新)수도 건설본부장’ 정도전의 명운은 길지 못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수도 한양은 또 한 번 크게 흔들린다. 이성계의 후계자로 어린 막내아들 방석을 밀었던 그는 태종 이방원의 ‘왕자의 난’ 최고의 목표물이 되어 죽었던 것이다.

종로구에 가면 재동이라는 동네가 있다. 이 재동의 어원은 잿골이다. 동네 이름이 잿골이 된 것은 뭔가를 감추기 위해 잔뜩 재를 뿌리면서 생긴 이름이었다. 왕자의 난 때 죽어간 병사들의 피가 강물을 이뤘고 피비린내를 지우기 위해서 재를 뿌려댔으며 그것이 동네 이름으로 굳어진 것이다. 그 피 가운데에 신수도의 건설자도 끼어 있었다.

이 피 냄새가 싫어진 이들 가운데는 조선의 두 번째 왕 정종이 있었다. 그는 어머니 신의왕후 한 씨의 무덤을 찾는다는 핑계로 개성으로 돌아간 후 한양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사실상의 재천도였다. 수십만 인력을 동원하여 성을 쌓고 궁궐을 지은 지 수년만에 한양은 또 다시 버려질 위기에 처한다. 그 수도를 다시 한양으로 옮겨 온 것은 태종 이방원이었다.

한양은 이방원 스스로 권력의 정상에 올라섰던 왕자의 난의 무대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태종을 도와 공을 세운 하륜이 또 다시 무악 천도론을 외치고 나오면서 문제는 또 다시 혼란에 빠진다. 불과 몇 년 전까지 5백년 도읍지였던 개경, 이방원의 1등 공신이라 주장하는 하륜이 주장하는 무악, 이미 백성들의 피땀으로 성벽을 쌓고 궁궐도 지은 한양. 이 셋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태종은 기상천외한 수법을 사용한다. 바로 동전던지기.

이 역사적인 동전던지기에서 한 곳은 2길 1흉 (2번이 길하고 1번이 흉한)의 점괘가 나와 나머지 두 곳의 1길 2흉(하나만 길하고 두 가지는 흉하다)을 누르게 되는데 이 2길 1흉의 주인공이 바로 한양이었다. 이미 “점을 쳐 놓고도 딴 소리하는 자는 종묘를 능멸하는 이들이다.”는 임금의 선언이 있은 뒤라 군말도 투덜거림도 나오지 않았다. 이때가 태종 4년인 1404년이었으니 왕조 개창 이후 시작된 천도 논의가 무려 10년에 걸쳐 종결된 것이다.

태종 이후에야 한양은 500년 도읍으로서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청계천이 뚫려 도시를 관통하게 만든 것도 이때였고 시전행랑을 만들어 상업지구를 조성하고 도시의 미관과 생활 환경을 고려한 명실상부한 도성의 모습을 갖춘 것이 이 시기 이후의 일이다. 청계천이 동서를 가르고 종로통에 상점이 운집하고 광화문 앞에 관청들이 늘어섰던 오늘날의 서울의 원형이 확립된 것이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지로 점찍은 것도 바로 교통 조건을 중시했기 때문이었다. 그 자신이 한양의 형세에 대해 말하기를 “조운(漕運)하는 배가 통하고 사방이 이수(里數)도 고르니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라고 하였다. 조선후기의 지리서인 『택리지』에서도 “한강변의 강촌들은 모두가 서해의 이점을 이용하여 팔도의 배가 모이는 곳”이라 하여 수운의 편리함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한강은 서해의 바닷길을 서울까지 이어주는 내륙수로였던 것이다.

한양은 외적방어를 위해서도 유리한 지형을 갖추고 있었다. 한양은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중앙이 평탄한 분지지형인데다가, 남쪽으로 한강이 감싸고 흘러 외적을 방어하기에 좋았다. 한강은 수로로서는 교통로의 역할을 하지만, 육로의 측면에서 보면 육로를 끊는 일종의 장애물이었다. 이 점은 방어의 측면에서는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인 유리함에 바탕 하여 한양은 조선왕조의 도읍지로 선택되었다. 1394년 10월, 드디어 조선왕조는 새 도읍지인 한양으로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이렇게 해서 서울은 한반도의 정치적, 경제적 중심으로서 본격적으로 역사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이후 한양은 조선왕조 5백여 년 동안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의 중심무대가 되었으며, 조선왕조가 멸망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그 역할을 지속하고 있다. 또한 중앙집권적 통일국가의 수도가 한강 유역에 위치하게 됨으로써 한강은 명실상부하게 한반도의 역사적 삶을 응축하는 상징으로 자리 매김하게 되었다.

이렇듯 조선의 계획 수도 한양은 10년의 세월과 치열한 입씨름과 수만의 백성들의 피땀 어린 노고를 거쳐 형성됐고 유지되고 오늘로 이어지게 된다. 한 나라의 수도가 풍수가 좋다는 이유로 계룡산으로 들어갈 뻔도 했고, 다시 개경으로 도로아미타불 되기도 했고, 결국은 동전던지기로 결정된 역사가 좀 겸연쩍긴 해도 서울은 우리나라 역사의 가장 생생한 순간을 함께 한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정호천  newsfreezon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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