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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의 길따라 사람따라, 죽령을 지나 부석에 가다
  • 정호천
  • 승인 2018.12.04 12:32
  • 수정 2018.12.05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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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에 들를 때마다 나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기차 여행은 오랜만이다. 일요일 아침을 서둘러 깨워 청량리역으로 향했다. 청량리역사 주변 건물에는 유난히 화재 소식이 많았다. 1972년 74년 75년 세 차례나 일어났던 대왕코너 화재를 비롯해서 이후 맘모스 호텔과 롯데 백화점에 이르기까지 화마(火魔)의 방문이 기이할 정도로 잦았던 청량리였다. 땅에도 기운이 있다면 화기(火氣) 충만이리라. 태백과 소백이 갈라지는 자리에 들어앉은 부석사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산들의 파도는 항상 마음의 폭과 깊이를 넓히고 파낸다.  색깔로 구분되는 산줄기들은 해일이 돼서 부석사 안양루까지 들이닥칠듯 넘실대고 바다 안개같은 구름들 사이로 설핏설핏 그 마루들을 드러낸다.  가히 토착민들이 절 못짓는다고 개길만한 명당이고 선묘가 죽은 다음에도 현세에 나타나 의상을 도울만큼 가치 있는 절터랄 밖에.

한참 사진을 찍어대는 딸에게 이야기해 줄 옛 사람 두 명이 떠올랐다. 아마 둘 다 이 자리에 올랐음직한 사람이고 기억할만한 행적을 남긴 고려의 태동기와 막바지의 인물 궁예와 공민왕.   

 부석사의 자랑은 단연 무량수전이다.  봉정사 극락전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最古) 목조건물의 랭킹을 다투며 국사 시험에 단골로 나와 수험생들의 뒤통수를 쳤던 그놈의 ‘엔타시스’ 양식의 ‘배흘림’ 기둥의 위용을 자랑하는 이 무량수전의 현판을 쓴 사람은 공민왕이었다.

1359년 고려는 홍건적의 1차 침입을 받는다.  원나라 군대에 쫓긴 한족 반란군들이었으나 그 기세는 무서워서 서경까지 점령당한다.  고려는 반격에 나서 이들을 몰아냈으나 바로 다음 해 20만 홍건적 대군이라는 어마무시한 폭풍에 휘말리고 만다.

 홍건적 대군은 어렵지 않게 고려의 방어선을 돌파했고 공민왕은 어쩔 수 없이 피난을 떠나야 했다.  그가 경기도 이천에 닿았을 때 개경은 홍건적에게 함락됐다.  이후 공민왕은 발길을 재촉하여 충주 거쳐 부석사 있는 영주 지나 안동까지 가서야 한숨을 돌리게 된다.  무량수전 현판은 그 즈음 쓰여진 것이겠다.  글씨 보는 눈 따위는 동지섣달 장미꽃만큼도 없는 터라 뭐라 평할 깜냥은 되지 않으나 문외한의 눈에도 글씨는 힘차고 유려하다.  서울 버리고 피난 나온 누추한 임금자리의 글씨라고 보기에는 더더욱 그렇다. 

 공민왕은 예술적 기질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글씨도 잘 썼고 그림도 기가 막히게 그렸다.  그래서인지는 모르나 그의 행적을 보면 지극히 충동적이고 자신이 느끼는 ‘감’에 충실한 예술가적인 느낌을 자주 받는다.  고려로 돌아오자마자 몽골 옷 벗어던지고 고려 옷을 가져오너라 호령했던 공민왕은  우리 역사에서 무겁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몽골의 지배라는 ‘적폐’를 청산하는 데에도 기민했다.  기철 권겸 등 친원파를 숙청하는 모습은 거의 오배를 숙청하는 강희제를 연상시킬 정도다.
 
 그러나 그는 개혁가로서는 심지가 굳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팔랑귀’였다.  기철 권겸을 그렇게 전광석화처럼 죽여 버리고 압록강 일대를 경략한 건 좋았는데 원나라가 80만 대군을 동원해 밟아버리겠다고 협박하자 당황하여 자신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장수 인당의 목을 베어 원나라로 보내 버리는 일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인당은 칼을 받기 전에 황당했을 것이다.  “대체 내 죄가 뭐란 말이냐.”   열정에 충만할 때는 누구보다 활기차지만 뭔가 장애물이 나타날 때마다 움찔거리다 못해 뒷걸음치는 리더는 다른 사람에게 믿음을 주기 어렵고, 스스로를 믿기도 어렵다.  

 개혁의 기수로 신돈을 발탁할 때도 마찬가지다.  신돈은 공민왕의 팔랑귀를 꿰뚫어 보았던 모양이다.  신돈은 이렇게 말했다.  “참소를 믿지 않으셔야 복된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공민왕의 귀는 또 팔랑였고 불끈 주먹을 쥐고 말한다. “대사는 나를 구하고 나는 대사를 구할 것이며, 다른 사람의 말에 현혹되는 일이 있을 수 없음을 부처와 하늘 앞에 맹세하노라. 아예 각서로 써 줄게.”  그러나 알다시피 공민왕의 부처와 하늘은 그렇게 수명이 길지 못했고 신돈은 역적으로 몰려 죽으면서 당신이 한 말은 무엇이었냐고 탄식해야 했다.

 공민왕의 시작은 대개 열정적이었다.  시작이 반이라고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공민왕은 ‘가다가 중지하면 아니 간만 못하다’는 속담을 배우지 못했다.  실패한 혁명은 전설이라도 남기지만 꺾여 버린 개혁의 깃발은 걸인의 발싸개보다도 못한 처지가 된다.  결국 공민왕의 개혁은 저무는 왕조의 화사한 저녁노을일 뿐이었다.  

 무량수전 앞에는 국보 17호인 통일신라시대 석등이 있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 창으로 다시금 공민왕의 흔적인 무량수전 현판을 넘겨다 본다.  그런데 공민왕 이전 무량수전에는 또 다른 이의 현판이 걸려 있었을 터이고, 무량수전 이전에는 또 다른 건물이 있어 석등의 창으로 그 현판이 오롯이 드러나 보였을 것이다.   공민왕보다 450년쯤 앞서서 한 사람이 석등의 창 너머로 무량수전 (또는 다른 건물)의 현판을 올려다본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은 둘이 아니라 하나였다.  고려 이전의 왕국 태봉의 왕 궁예다.

 궁예는 상당히 유능한 사람이었다. 오늘날 경기도 안성 지역의 기훤에게로 갔다가 영 전망이 보이지 않자 원주의 양길에게로 갔고 그에게 신임을 사서 군대의 지휘관 노릇도 하게 된다. 주인이 아닌 것 같아 새 주인을 찾는 건 조자룡도 한 일이지만 궁예는 조자룡의 충성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양길이 준 병력으로 강원도 일대를 쓸고 다니며 자신의 세력을 구축한다. 애꾸눈이었지만 전투를 보는 눈이 일목요연했고 서해안의 호족 왕륭 왕건 부자가 항복할 정도로 세력을 떨쳤다. 그리고 마침내 옛 주인 양길까지 무찌르고 나라를 세운다.

 견훤과 왕건 궁예 셋 중에서 스스로에 대한 믿음만큼은 궁예가 최고였다.  그의 후반기가 광인으로 묘사돼 있으나 이는 왕건의 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한 장치일 가능성이 있고 그가 보여 준 ‘광기’는 오히려 그가 지닌 지나친 자의식의 발현일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유명해진 그의 ‘관심법’이나 미륵 자칭은 자신에 대한 과도한 믿음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세상에 안되는 일이 없어 보였을 것이다.

 자신이 미륵처럼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고 그에 거스르는 석총 따위 중놈들은 때려 죽이면 그만이었다. 나라 이름은 곧 정치적 지향일진대 그는 나라 이름도 분주히 바꿨다. 처음에는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했다가 (후고구려) 남쪽을 아우른다는 뜻의 마진이랬다가 (이건 하나의 설일 뿐이다 정확하지는 않다) 좀 통 크게 ‘태봉’으로 바꾸기도 했다. 분명히 작은 성공을 거두었지만 견훤도 눈이 시퍼렇고 신라도 엄연한 판에 그는 오버액션을 한다. 그 오버액션이 바로 부석사에서 일어났다.

 궁예는 어느 날 영주 부석사를 방문한다. 소백산맥을 넘어 옛 신라의 본거지라 할 경상도 경계에까지 세력을 뻗친 것이다.   그런데 부석사에는 신라 왕의 진영(眞影)이 보관돼 있었던 모양이다.  신라 왕의 버림받은 아들이라고 기록된 궁예는 이 초상화 앞에서 격노한다.  그는 칼을 들고 그 초상을 난도질했다.  아울러 명령을 내린다.  “신라 놈들은 다 죽여라.” 그는 신라를 멸도라고 부르며 신라에서 항복해 오는 자들은 다 죽였다.  

 궁예 역시 천년 묵은 신라를 대신할 새로운 나라를 꿈꾼 사람이었다.  미륵 신앙은 그의 자의식의 발현이면서 동시에 신라에 드리우고 있던 구 질서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다.  법상종의 지도자 석총이 “하나같이 사악하고 괴상하여 논할 가치도 없다.”고 죽음을 무릅쓰고 반발한 배경일 것이다.  그러나 신라 왕의 초상을 찢고 신라의 귀순자를 죽임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성공 가능성을 제 손으로 깎아 내렸다.  이른바 ‘확장성’을 포기했다고나 할까. 궁예는 자신의 성취를 아우르지 못했고 초반의 성공을 키워내지 못했다.  특정 지역의 지지에 안주했고 자신의 방식을 절대화했다.   결과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다.    

 부석사를 찾았던 두 군주.  명민했으나 추진력이 약했고 행동은 재빨랐으나 그 귀가 너무 얇아 자신의 성과마저 끊임없이 의심한 개혁 군주 공민왕과 난세에 태어나 몸을 일으켜 후삼국 중 가장 유리한 입지를 구축했으나 구 세력에 대한 경멸과 증오가 앞섰고 끝내 고립 속에 정권을 잃고 만 비운의 창업자 궁예.  두 사람은 무량수전을 앞에 두고 돌아서서 자신에게 밀려드는 산줄기들의 파도를 어떤 마음으로 지켜보았을까.

 필시 절경에 대한 감탄만 늘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고비를 넘으면 또 다른 고비가 닥치고 우여곡절로 잔 파도를 넘기면 어김없이 해일 같은 파도에 휘말리는 일은 둘 모두에게 일상이었다.  빛이 다르고 색이 틀린 앞뒤로 빽빽한 산물결들 앞에서 공민왕은 붓을 들었고 궁예는 칼을 휘둘렀다.  그 모습들을 보며 선묘각에 모셔진 선묘는 슬며시 웃으며 말했으리라.  “의상 대사님을 그렇게 소망했으나 이루지 못한 나를 보시게. 그대들 역시 그럴 운명이라네.”  

 무량수전을 떠나 경사 막급의 돌계단을 조심스레 딛고 다음 목적지로 떠난다.

정호천  starrain4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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