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여성들은 수 천 년 세월의 길고도 어두웠던 암흑 같은 터널을 빠져나와 희망이 보이는 터널의 끝에 있는 밝은 빛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인종지도

옛날 중국인들은 여자들을 매우 귀하게 여겼나 봅니다. 아내를 얻으면 예쁘게 단장을 시켜놓고 인형공주처럼 집안에만 있게 했지요. 외부에 나다니는 것을 막기 위해 전족(纏足)까지 시켰습니다. 전족이란 여자의 발을 작게 하려는 중국 특유의 전통으로 여자아이가 너 댓살이 되면 발에 긴 천을 감아 엄지발가락만 남기고 모두 동여매어 자라지 못하게 하는 풍속입니다.

이 전족은 당(唐)나라 말엽에 시작하여 한창 유행하다가 청조(淸朝)의 강희제 시대에 와서 금지령이 내려졌다고 하니 족히 2백 년 이상이나 이어온 악습이었습니다. 그 후 19세기 초 왕정체제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되면서 전족의 해방을 부르짖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져 끝내 이 폐습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중국의 그러한 전통은 남성 우월사상의 극치로서 여자를 독점 예속시키려는 발상에서 기인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 당시 중국에서는 가느다란 허리와 전족을 한 여인을 으뜸가는 미인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하니 그 얼마나 잔인한 처사인가요? 전족을 하면 몸을 받쳐주는 발이 제대로 발육하지 못해 뛰지도 못할 뿐 아니라 오리걸음처럼 뒤뚱거리며 걷게 됩니다.

제가 어릴 적만 해도 화교(華僑) 여자들은 중국 전통의상을 입고 거의 다 ‘전족’을 해서 우리 꼬마들한테는 늘 놀림감이 되곤 했습니다. 이렇게 발의 기능을 억제 당한 중국여인은 절로 바깥일을 할 수 없고 집 안 일마저 자유롭지 못해 집 안팎 모든 일은 남자만의 몫으로 여인들은 그냥 장식용 꽃으로만 있게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여 전족이란 말은 아득한 옛날일로만 여겨지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에 오는 ‘유커(遊客)’ 여인들을 보면 ‘미니스커트’ 나 ‘핫팬츠’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이 참으로 격세지감을 금할 수 없네요. 제가 절었을 때만 해도 유교의 전통이 사회 인습으로 굳어져 버린 우리들의 가정 역시 가부장적 권위가 구석구석에 남아있어서 웬만한 집에선 아내를 갖고서도 첩(妾)을 두고 사는 집을 어렵지 않게 보았습니다.

여인들은 일단 결혼만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여져 있어 그것은 사랑의 끈이거나 또 다른 속박의 끈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여인들은 현모양처의 길만이 여성지고의 가치규범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인고(忍苦)의 미덕을 가꿀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 시대 우리네 여인들의 인종지도(忍從之道)는 도(道)가 아니고 굴종(屈從)과 지옥의 삶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첩(妾)’의 사전적인 뜻은 ‘정식 아내 외에 데리고 사는 여자’입니다. 한자의 자원(字源)을 보면 ‘辛’과 ‘女’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辛’은 오늘날에는 ‘매울신’이지만 당초에는 ‘종(노예)’의 이마에 먹실을 넣는 바늘의 모양을 본뜬 글자로, 몸종이라는 뜻도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고대에는 ‘妾’은 ‘죄를 짓거나 전쟁포로로 끌려와 사역을 당하는 여자’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첩은 남편 앞에서 아내가 자신을 낮춰 부르는 의미로도 쓰였습니다. 역사 드라마의 대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첩(小妾)’이라는 말도 같은 뜻이지요. ‘아내가 아닌’ 첩과 같은 뜻으로 ‘소실(小室)’, ‘측실(側室)’, ‘작은집’, ‘작은마누라’, ‘시앗’ 등의 용어로도 불리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일부일처제’가 정착됐으나 본처 이외에 다른 여자, 즉 첩을 들이는 것은 사회적으로 용인된 관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첩이나 첩에게서 낳은 자식, 즉 ‘서자(庶子)’ 또는 ‘서얼(庶孼)’은 신분상 불이익이 컸습니다.

우리네 속담에 ‘시앗을 보면 길가의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편이 시앗을 보면, 여인들이 얼마나 속이 썩었을까요? 1952년 6. 25 전쟁이 끝나갈 무렵 박목월(朴木月 : 1915∼1978) 시인이 중년이 되었을 때, 그는 제자인 여대생과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버리고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가정과 명예. 그리고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라는 자리도 버리고 빈손으로 홀연히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자취를 감춘 것입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목월의 아내는 그들이 제주도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을 찾아 나섭니다. 부인은 남편과 함께 있는 여인을 마주한 후, 살아가는 궁핍한 모습을 보고 두 사람에게 힘들고 어렵지 않으냐며 돈 봉투와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라며 두 사람의 겨울옷을 내밀고 아내는 서울로 올라옵니다.

목월과 그 여인은 그 모습에 감동하고 가슴이 아파 그만 사랑을 끝내고 헤어지기로 한 후, 목월은 서울로 떠나기 전날 밤, 시를 지어 사랑하는 여인에게 이별의 선물로 줍니다. 그때 그 시가 바로 이 노래입니다.

<이별의 노래>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 ~ 아 ~ 너도가고 나도 가야지/ 한 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 ~ 아 ~ 너도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 두고 홀로 울리라/ 아 ~ 아 ~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서울로 올라온 목월은 양심이 찔렸는지 바로 아내와 아들, 딸이 기다리는 집으로 가지 못하고 효자동에서 두 달 동안 하숙생활을 하다가 귀가했다고 합니다. 목월은 평생토록 그 여인의 사랑을 시 속에 심다가 붓을 놓고 갑니다. 그러나 본인이야 애 끊는 사랑을 했는지 모르지만 조강지처(糟糠之妻)인 아내의 가슴은 아마도 새카만 재가 되고도 남음이 있지 않았을까요?

지금 여성들의 ‘인종지도’는 끝이 났습니다. 이제는 여성상위시대입니다. 목월 부인의 인종지도와 넓은 아량에 대한 향수(鄕愁)가 남아 있어서인지 인종지도에 대해 한 번 살펴보았습니다.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여성들은 수 천 년 세월의 길고도 어두웠던 암흑 같은 터널을 빠져나와 희망이 보이는 터널의 끝에 있는 밝은 빛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제 남성들이 장난으로라도 여성에게 잘 못 손대면 아마도 ‘미 투(Me-Too) 운동’의 제물이 될지도 모르니 조심 또 조심 할 바가 아닌지요!

단기 4351년, 불기 2562년, 서기 2018년, 원기 103년 12월 7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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