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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와 싸운 페미니스트 교사, 16개월간의 생존기전교조 페미니스트 교사 최현희 씨 인터뷰
  • 박다솔 기자
  • 승인 2019.01.07 07:48
  • 수정 2019.01.08 07:48
  • 댓글 0

▲사진: 월간 워커스

2017년 8월, 초등학교 교사인 최 씨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정치 이야기가 아니었다. 학교 운동장을 남학생들이 전유하는 현상을 지적한 것이었다. 학년이 높아질수록 여학생들은 운동장과 멀어졌다. 최 씨는 이 같은 현상이 우리 사회의 왜곡된 여성성, 여성 몸에 대한 규범, 그리고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 등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최 씨는 학교 현장에도 페미니즘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예상치 못한 백래시가 몰아쳤다. 페미니즘을 비난하던 이들은 타깃을 찾은 듯 그녀를 공격했다. 그녀의 트윗은 조각조각 분해돼 평가 당했고, ‘나쁜 선생님’이라는 낙인찍기가 시작됐다. 폭풍 같은 16개월이 지났다. 한바탕 쓰나미가 휩쓸고 간 듯한 시간이었다. 모든 것이 텅 빈 것 같은 자리에서, 그녀는 또 다시 페미니즘 교육을 일구어낼 준비를 한다. 《워커스》는 최현희 선생님을 만나 그간의 이야기와 페미니즘 교육에 대한 고민을 들었다.

쏟아지는 공격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묻고 싶다

말하기 시작한 이후로 3~4개월까지는 아픈 줄도 모르고, 상처받는 줄도 모르고 저돌적으로 이야기했다. 여기저기 지지를 요청하고, 강연 요청이 오면 빠짐없이 갔다. 하지만 개인의 일상이 없어진 채 사회적 자아로 하루 24시간을 살다 보니 급격하게 약해졌다. 게다가 함께 대응해온 학교도 상황이 어려워졌다. 몇몇 학부모들이 찾아와 공격적으로 민원을 넣고, 외부세력과 결탁해 괴롭혔다. 그러자 학교 측에서도 내게 외부활동을 자제해달라고 요구했다. 믿었던 동료로부터 ‘네가 문제를 일으키고 튀어나와서 이렇게 됐다’는 식의 말을 듣고 외로워지기 시작했다. 정치권과 교회 등 보수집단도 계속 나를 압박했다. 거기다 재판에도 대응해야 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 반년 후부터는 먹는 것마다 토하고, 위경련이 와서 두 달 만에 8kg이 빠졌다. 내 이야기가 논란이 되기 시작하면서 정신과를 꾸준히 다니고 있었는데 병원 가서 펑펑 울었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이 때문에 금방 접었지만,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바닥을 쳤다.

여러 폭력에 노출됐을 것 같다. 사고는 없었나?

‘어디 끌려가서 맞아 죽겠다’라는 공포가 심했다. 온라인 커뮤니티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사건을 모르지 않았다. 일베부터 오유, 이종, 엠팍 등의 커뮤니티에 쉴 새 없이 나에 대한 게시물이 올라왔다. 공황장애 증상이 와서 외출이 힘들었다. 사람이 많은 곳도, 인적이 드문 곳도 무서웠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카페에서 날 빤히 보는 남자 알바생은 무슨 생각을 할까’, ‘길을 걸을 땐 아주 극단적인 사람으로부터 폭행당하지 않을까’ 이런 공포들. 이 불안감이 과장됐는지 여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 상황을 전혀 모르는 사람과 나는 온도 차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어떻게 회복했나

내게 벌어진 일이 쓰나미처럼 나와 주변을 훑고 가지 않았나. 기대도 무너지고, 분노도 지나간 자리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니 회복이 되더라. 대부분 전교조 서울지부 여성위원회 선생님들이다. 그동안 나는 CMS 조합비만 내는, 두드러진 활동이 없는 조합원이었는데 전교조에서 뭔가 역할을 해보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최근 조선일보를 상대로 낸 정정보도 청구소송 1심에서 일부 승소했다. 이후 진행상황은 어떤가

조선일보는 정정보도문을 게재하지 않은 채, 바로 항소했다. 기본적인 취재조차 이뤄지지 않은 기사라 그나마 남은 상식에 기대어 유리한 판결을 얻었는데 역시나 소모적으로 끌고 간다. 논점을 흐리고, 피해자를 위축시키는 방식이다. 잃을 것 없다는 오만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10월 26일 최현희 씨가 조선일보와 소속 기자 등을 상대로 낸 정정보도와 손해배상 소송에서 조선일보와 기자가 함께 최 씨에게 4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책임을 물은 것이다. 조선일보는 해당 보도에서 최 씨가 직접 ‘메갈리아’ 회원임을 트위터로 밝혔으며, 이에 대한 비판이 불거지자 남성 혐오 관련 트윗 1,000여 건을 삭제했고, 평소에도 남학생들을 질책했다고 썼는데 재판부는 이러한 보도를 ‘허위사실’이라고 판단했다.)

왜 조선일보를 대상으로 소송할 마음을 먹게 됐나?

가장 화가 났던 건 기사 발행 시기였다. 나에 대한 공격이 심해질 때, 학교도 한바탕 들썩였다. 하지만 혁신학교인 만큼 나와 함께 대응 전략을 마련하며 수습해 나갔고 사건이 일단락 돼 가고 있었다. 그래서 하루는 교사들끼리 모여 서로 다독이며 ‘우리 힘든 시기 지났으니, 학생들 더 열심히 가르치자. 더 잘 가르쳐서, 행복하게 만들자’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다음 날 새벽, 조선일보 기사가 났다. 학교가 다시 한 번 와르르 무너진 듯했다. 한 개인이 감당해선 안 될 혐오를 공동체가 해결해가고 있었고, 간신히 한숨 돌릴 찰나에 허위로 가득한 기사가 나간 것이다.

학교가 흔들릴 정도였다니

어지간한 페미니스트들이나, 조선일보와 싸워본 전교조 선생님들은 조선일보가 두렵지 않다. 원래 그런 식으로 싸움을 걸고, 팩트도 주무르는 곳이니까. 하지만 학교 관리자들과 일반 선생님들에게 조선일보는 주류 중의 주류다. 이들에게는 주류에 대한 신뢰가 남아 있기 때문에 타격이 컸다. 그래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언론에 이런 짓을 당한 사람 중 나보다 더 힘든 피해자도 있을 것이었다. 전교조가 지원하고,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 내가 태클을 걸어야 한다는 사회적 책임감이 있었다. 7차 변론까지 힘든 시간이 이어졌지만, 1심 판결을 보고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판 분위기는 어땠나

이번 재판에서도 내가 메갈 회원인지와 ‘한남충’이라는 말을 직접 썼는지가 쟁점이 됐다. 결국 내가 직접 쓴 것이 아닌 리트윗으로 밝혀졌는데, 또 다시 ‘리트윗’을 직접 작성한 것으로 간주할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로 부각됐다. 보수적인 상식으로 합의된 법에서는 그렇게밖에 사건을 다루지 못한다. 내가 리트윗한 건 한남충이란 단어 자체에 동의했다기보다 그 맥락에서 그 단어를 쓸 수밖에 없던 트윗 작성자의 감정에 공감한다는 것이었는데 나를 변호할 수가 없었다. 지금 법정은 본질적인 쟁점을 가지고 다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중년 남성이었던 피고의 변호사는 트위터의 원리, 메갈의 운영과 쇠락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위세를 떨치는 집단이라고 하는데 그곳은 이미 폐쇄된 상태였다. 심지어 한남충이란 말을 ‘메갈리아’ 회원들만 쓴다고 주장을 하더라. 정말 논의 수준에 대해 회의가 들었다. 그래서 김지은 씨 생각이 많이 났다. 여성들이 법정이라는 낡은 틀 안에서 자신의 경험과 언어를 말하는 게 너무 불리하다.

미투 이후의 변화를 체감하나?

위례별 초등학교는 백래시에 직격탄을 맞았고 위축될 수 있을 만큼 위축됐다. 혁신학교로서 가장 앞선 학교가 가장 후퇴한 꼴이 돼버렸다. 다른 학교에선 오히려 페미니즘 이슈들이 희미하게나마 퍼져 조심하고, 각성하고, 이야기하는 선생님이 생겼는데 우리 학교에선 누가 페미니즘 이야기를 할까봐 겁내는 분위기가 생겼다. 학교가 표적이 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퇴행 같다. 나는 학교를 나와 내 운동을 하기로 했다. 학교와 분리하니 편하다. 나중에 복귀해서 함께 할 수 있다면, 그렇게 또 하는 거고.

사회적으론 스쿨미투도 한창이다. 얼마나 심각한 문제로 보나?

정말 스쿨미투가 ‘핫’한지 역질문을 던지고 싶다. 미투운동은 주요 인사에게 치명타를 입혔고, 세상을 뒤집어 놨다. 그런데 스쿨미투는 주요한 이슈로 다뤄지지 않는다. 스쿨미투는 공교육 제도 안의 청소년들이 부모, 선생, 친구, 미디어라는 벽을 뚫고 낸 용기다. 하지만 그에 비해 사회는 너무 조용하다. 사회에 이슈가 너무나 많으니 그럴 수 있다 치자. 그래도 뜨거워져야 할 집단이 있다면 그곳은 전교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재 전교조 안에서 스쿨미투가 왜 생겼는지, 폭로한 학생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전교조가 성찰할 건 없는지 이야기 되고 있나. 성평등 강령이 말에만 그쳤다는 것을 반성하는 계기가 될 줄 알았는데 너무 조용했다. 전교조 조합원들도 외모 품평하고, 졸업식에서 젊은 교사에게 꽃을 들게 하고, 나이를 묻고, 결혼 여부를 묻는다. 이는 스쿨미투의 대상인 이상한 교사들을 잔존케 하는 토양이 된다.

최근 전교조 위원장 선거에 페미니즘 선본이 출마했다. 어떤 과정을 거쳐 선본이 꾸려졌는지 궁금하다.

전교조 여성위원회가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서서히 살아났다. 밀물이 서서히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전교조 성폭력 사건 때, 피해자 지지모임 활동을 하다 상처받고, 싸우다가 지친 선생님들이 계신다. 하지만 이분들은 계속 남아 싸웠다. 이들은 내 사건에도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연대할 수 있었던 토대였다. 여성위원회에서 2회에 걸쳐 페미니스트 교사 캠프를 열고, 서울 퀴어축제에서 부스도 차리고, 페미니스트 연수도 열고, 책모임도 활성화하는 등 재밌는 사업을 해나갔다. 그러던 중 전교조 위원장 선거 기간이 찾아왔다. 한 선본에서 4년째 여성위원장을 하고 있는 선생님에게 수석부위원장을 제안했는데 결국 거절했다. 그 선생님은 여성이 양념이 돼 버린 남성 중심의 선거판에서 여성 위원장 후보로 출마하겠노라 했다. 그러면 러닝메이트 수석부위원장도 여성으로 추대하자는 마음이 모여 굉장히 급하게 선본이 꾸려졌다. 여성-여성 후보팀은 최초다. 나는 페미니즘 선본에서 정책을 맡고 있다. 눈에 띄는 정책들이 많다. 활동가 육아 지원을 소개하고 싶다. 활동가들이 경력 단절 없이 일할 수 있도록, 탁아방을 만들고 돌봄강사를 배치하는 것이다. 활동가에겐 일할 수 있는 권리를, 아이에겐 안전한 공간에서 교육받을 권리를 함께 생각한 것이다. 그동안 전교조는 행사 규모에 따라 탁아방을 운영하고, 나이에 제약을 두기도 했다. 예산을 여성정책 분야로 포함시켜 계속 후순위로 밀렸다. 하지만 탁아방은 필수여야 한다. 육아 중인 선생님들은 곳곳에 잠복해 있다. 돌봄의 가치를 높이고, 이를 공유하는 일을 하고 싶다.

법외노조를 비롯해 전교조의 큰 과제들은 어떻게 풀 건가?

화염병 던지고 싸우던 이전 세대 전교조 활동가들은 분명히 투쟁력이 있다. 하지만 우리도 생존을 위한 싸움을 계속해 왔다. 여자들이 맞아 죽고, 찔려 죽을 때 한 줌의 페미니스트들이 목숨 걸고 연대해 목소리를 낸다. 그런 절박함이 있어서 우리는 더 잘할 수 있다. 전교조의 싸움을 지금보다 확장시켜야 한다는 측면에서도 우리는 다른 차원의 싸움을 해 볼 수 있다. 페미니스트는 집회, 시위 나와서 아쉬워하며 돌아가는 존재들이다. 주요 활동가들이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성과급 폐지, 비정규직 문제 등의 대정부 싸움을 해나갈 것이다.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아무래도 내 삶의 중심 이슈인 전교조 이야기로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다. 내가 극심한 인신공격, 사이버 폭력, 협박, 교육권 침해를 넘어서는 인권 탄압을 받을 때 전교조는 어디 있었는지 묻고 싶다. ‘페미니즘이 필요한데 얘는 한남충이라고 했대’ ‘메갈이란 말이 있어’라는 말을 전교조 조합원들도 한다. 전교조가 ‘빨갱이’라는 말을 듣지 않고 운동할 수 있었을까? 전교조가 페미니즘 의제를 받아 안고 적극 실천한다고 하면 오해와 매도에 시달릴 거다. 하지만 그런 반작용이야말로 운동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증거 아닌가. 요즘의 전교조는 그렇게 날 선 비판도 받지 않는다. 나에게 여러 낙인과 오해가 씌워지는 데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알아보고, 맥락을 짚으려는 노력이 없었다. 다행히 여성위 선생님들이 눈물을 흘리고, 함께 발 동동 구르며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연대해줘서 여기까지 왔다. 전교조의 치열했던 역사를 이어가고 싶다.[워커스 49호]

박다솔 기자  yoursolmate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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