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로부터 고경하 시인 . 필자. 박종희 회원 / 사진 = 문해청 기자

[뉴스프리존=CNB국회방송 호남총국 편집국장 배경식]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육사는 1904년 5월18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에서 아버지 이가호와 어머니 허길(왕산 허위장군 후손)의 6형제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으로 퇴계 이황 선생의 14대 손이다.

그는 어린 시절 보문의숙 이라는 신식학교를 운영했던 할아버지 이중직 선생으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가세가 기울자 이사를 거듭하고 제차 대구로 이사한 뒤 서하가로 명성을 떨치던 악령시장 한약사 서병오 에게 그림을 배웠다.

17세 되던 해 영천출신 안용락의 딸 안일량과 결혼을 하였고 처가에서 가까운 백학학원에서 공부한 뒤 원삼이라는 이름으로 학원에 남아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23년 19세의 나이로 단신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라 니혼대학 전문부등에서 공부했고 1925년에 귀국한 이육사는 대구 독립운동가인 서상일이 민족계몽운동을 위해 세운 조양회관에서 주최한 신문화 강좌에 참여했다.

그는 이곳에서 이정기. 조재만을 만났고 그들과 수시로 중국을 드나들며 독립운동을 모색했다. 이때 필명으로 대구사회단체개관이란 글을 발표했고 1931년 1월 3일에는 이활 이라는 본명으로 그의 첫 시 ( 말 )를 발표했다.

1933년 7월에는 국내에 잠입 하여 은밀하게 독립운동을 펼치던 시기에 육사라는 필명으로 잡지 신조선에 시 황혼을 발표하는 등 문단계의 한 획을 그었다.

1946년 해방 이듬해 동생 이원조에 의해 유고시집 육사시집 으로 초간본이 서울출판사에서 발간되어 그의 작품 20여편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때 서문은 신석초. 김광균. 오장환. 이용학이 썼고 같은 해 조카 이동영에 의해 육사 시집이 재간본 되었으며 22편의 시를 편집했으며 청마 유치환이 서문을 썼다.

이육사란? 1934년 3월 군사간부학교 출신임이 밝혀지면서 검거 되었고 이육사는 대구형무소에 수감 되었을 때 죄수번호 264번을 대구 이육사라 칭했다. 분단으로 형제가 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졌으며 생존해 있는 딸 이욱비 여사는 현재 안동 이육사 문학관에 계시는 것으로 밝혀져 있다.

필자가 1인 시위현장인 생거터에서 고경하 시인을 만난 것은 지난 11일 오후2시쯤 되었다. 중구 중앙대로 67길 19-12 골목 으슥한 담장 밑에서 초초한 걸음을 동동 구르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그 곳에서 지나는 학생들도 이육사 시인의 생거터임을 지적하고 있음에도 뒷북치고 있는 행정관서의 무관심을 보았고 개발에 눈이 먼 업자들에 의해 벽이 허물어지고 완파될 위기의 순간에 이를 발견한 이웃주민과 고경하시인의 아찔한 순간을 떠올리며 씁쓸한 마음 감출 길 없었다.

인용한 바에 의하면 그동안 대책위가 결성되었고 1월 16일은 이육사 시인의 75주년 순국일이 된다며 이육사의 자주독립운동 정신계승과 추모 행사를 거행하겠다고 하였다. 문화행사로 거듭나 전국적인 문인들의 안식처를 만들겠다는 각오를 다짐하고 있음을 밝혀주었다.

행정관서. 개발업자. 대책위간의 상호협력이 절실함을 보여줄 때이니 만큼 슬기롭게 해결되어 문인들의 발걸음이 끊임없이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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