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은 100년 전 평범한 이들에게 삶의 전환점이었다. 그들은 이날 태극기를 들었고 만세를 불렀다. 그 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3·1운동은 독립운동가들의 ‘혁명학교’였던 것이다.

철물점 주인 김상옥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고, 일본군 장교이던 지청천은 탈영해 한국광복군 사령관이 됐다. 기생이던 정칠성은 여성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했고, 주부이던 남자현은 총독부 관리들의 암살을 시도했다.

학생이던 윤세주는 조선의용대 전사가 돼 중국 타이항산(太行山)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변호사였던 허헌은 독립운동가를 변론하는 벗이 되었고 좌우합작운동 단체인 신간회 결성을 주도했다.

총독부 간호부 직원이던 박자혜는 간호사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했다. 이 모두 3·1운동에 참여한 후 일어난 일들이다.

3·1운동은 ‘사상학교’이기도 했다. 거리에서 근대의 문을 활짝 연 이들은 독립투쟁을 위한 혁명적 이념을 열광적으로 흡수했다.

민족주의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여성해방 등으로 가지를 뻗어나갔다. 학생이던 박열은 스스로를 ‘개새끼’라 부르는 아나키스트가 돼 일왕 암살을 모의했다.

장지락은 민족주의, 아나키즘, 사회주의를 섭렵한 후 중국에서 무장투장을 하며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의 그 ‘김산’이 됐다. 피아니스트였던 주세죽은 사회주의자로 거듭나 국내와 중국·러시아를 오가는 혁명가가 됐다.

혼자만은 아니었다. 이들은 독립운동가들을 잇는 거목들과 만났다. 백범 김구, 단재 신채호, 약산 김원봉, 몽양 여운형, 이정 박헌영은 독립투사들의 ‘허브’였다.

그들의 이념은 달랐지만 독립운동가들의 든든한 우군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이 모든 일들은 3·1운동에서 시작됐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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