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 손우진 기자] 이탄희 판사(41·사진)가 사표를 29일제출했다. 2017년 2월 법관사찰에 반발해 법원행정처로부터 국제인권법연구회 학술대회를 저지하라는 지시를 받은 뒤 사표를 내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이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를 제공한 이다.

▲뉴스영상 갈무리

이 판사의 사표를 계기로 법원 내부에서 법관사찰 의혹이 터져 나왔고, 이 판사는 29일 법원 내부통신망에 글을 올려 “이번 정기인사 때 (판사직을) 내려놓자고 마음먹은 지는 오래되었다”며 “작년 이맘때쯤 다시 마음을 다잡아봤지만 다시 1년을 겪었다. 2년간 유예됐던 사직서라 생각하겠다”고 했다.

결국 양승태 전 대법원장까지 구속됐지만, 이 판사는 좀체 의견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판사는 사법농단 사태를 비판해온 지난 2년의 시간을 돌아봤다. 그는 “지난 시절 행정처를 중심으로 벌어진 헌법에 반하는 행위들은 건전한 법관사회의 가치와 양식에 대한 배신이었다고 생각한다”며 “법관이 추종해야 할 것은 사적인 관계나 조직의 이익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공적인 가치”라고 말했다.

"2년간 유예됐던 사직서"를 냈다며 법원 내부 통신망에 사직 인사를 남겼다. 이 판사는 “판사가 누리는 권위는 독립기관으로서의 권위라고 생각한다”며 “조직원으로 전락한 판사를 세상은 존경해주지 않는다”고 했다. 이 판사는 “미래의 모든 판사들이 독립기관으로서의 실질을 찾아가길 기원한다”며 글을 마쳤다. 2017년 2월 법원행정처 기획2심의관으로 발령난 이 판사는 이규진 당시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으로부터 국제인권법연구대회 학술대회를 저지하라는 지시를 듣고 사표를 냈다. 이 판사는 "판사가 누리는 권위는 독립기관으로서의 권위"이고 "조직원으로 전락한 판사를 세상은 존경해주지 않는다"고 경계했다.

재판거래까지 의혹이 일파만파로 번졌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이 판사를 원래 근무하던 법원으로 다시 보냈고, 이 같은 이례적인 인사가 언론에 보도(경향신문 2017년 3월6일자 11면 보도)되면서 파장이 일어났다.

다음은 이탄희 판사가 29일 법원 내부 통신망 코트넷에 올린 사직 인사 전문

 존경하는 모든 판사님들께

 무엇보다, 오랜 기간 동안 전화와 메일 등으로 격려해주신 많은 분들께 먼저 터놓고 상의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1월 초에 이미 사직서를 제출하고도 말씀을 드릴 수 없어 마음 앓았습니다. 어쩌다 보니 제 처지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번 정기인사 때 내려놓자고 마음먹은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저에게는 회복과 재충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2년이 길었습니다. 작년 이맘 때 쯤 다시 마음을 다잡아봤지만, 다시 1년을 겪었습니다. 2년간 유예되었던 사직서라 생각하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미련도 두려움도 줄어서 좋습니다.

처음부터 정의로운 판사를 꿈꿨던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저만의 지기 싫은 마음으로 판사가 된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일단 된 이상은 가장 좋은 판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랬듯이 단 하나의 내 직업, 그에 걸맞은 소명의식을 가진 판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이상이 있는 판사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선배들의 좋은 모습만 닮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럴수록 선배들도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후배들에게는 영감을 주는 선배가 되고 싶었습니다. 소속감을 주는 건전한 법관사회가 제 주위엔 분명히 있었습니다.

지난 시절 행정처를 중심으로 벌어진 헌법에 반하는 행위들은 건전한 법관사회의 가치와 양식에 대한 배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법관이 추종해야 할 것은 사적인 관계나 조직의 이익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공적인 가치입니다. 가치에 대한 충심이 공직자로서의 명예라고 생각합니다. 가치에 대한 배신은 거부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번 물러서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좋은 선택을 한 뒤에는 다시 그 선택을 지켜내는 길고 고단한 과정이 뒤따른다는 것을, 진실을 밝히는 과정이 끝없는 노력과 희생을 요한다는 것을, 그때는 다 알지 못했습니다. 한때는 ‘법원 자체조사가 좀 제대로 되었더라면...’ 하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단 하루도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인생이잖아요. 시작만 혼자였을 뿐 많은 판사님들 덕분에, 그리고 나중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분들 덕분에 외롭지 않았습니다. 모든 분들이 자기의 뜻을 세워 하신 일입니다. 하지만 또 제 입장에서는 덕분에 외롭지 않았습니다. 드러난 결과는 씁쓸하지만, 과정을 만든 한분 한분은 모두 존경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판사가 누리는 권위는 독립기관으로서의 권위라고 생각합니다. 조직원으로 전락한 판사를 세상은 존경해주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말대로, 성운처럼 흩어진 채로 모여 있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래의 모든 판사들이 독립기관으로서의 실질을 찾아가길 기원합니다. 제 경험으론, 외형과 실질이 다르면 단단해지지 않습니다. 나의 생각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더 큰 공적인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우리의 미래가 어둡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난 2년간 배운 것이 많습니다. 한번 금이 간 것은 반드시 깨어지게 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결국 인생은 버린 사람이 항상 이긴다는 것을 저는 배웠습니다. 깨진 유리는 쥘수록 더 아픕니다. 하루라도 먼저 내려놓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도 무엇을 하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생활하겠습니다. 저 자신에게 필요한 일이 무엇인가부터 먼저 생각해보려 합니다.

그동안 마음으로 응원하고 지지해주신 너무나 많은 분들, 그 한분 한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최소한 밖에 하지 못하고 일어나게 되어 미안합니다.

다시 뵐 때까지 항상 건강하세요.

- 판사 이탄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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