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호 부회장.

명종과 광해군 때 오성 부원군 벼슬을 했던 이항복은 폐모론(廢母論)을 극구 반대하다 북청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그가 북청으로 귀양 가는 도중 철령에서 읊은 시조 편에, “철령 높은 고개 쉬어 넘는 저 구름아/고신(孤臣) 원루(寃淚)를 비 삼아 띄어다가/임 계신 구중(九重) 심처(深處)에 뿌려 준들 어떠리.” 라고 당시 심정을 피력한 구절이 유명하다.

독재 군주 하에서 벼슬살이에 참다운 신하 치고 유배나 사사(賜死)를 겪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되었겠나. 간언(奸言)과 간언(諫言)을 구별 못하는 군주에 대한 원망과 개탄스러움이 묻어 난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지방 정치꾼들의 단면을 보니 한편의 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 정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닌 것을 번연히 알면서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유배 길에 오르는 어리석음을 우리는 목견(目見)하고 있다.

기울어진 새벽달이 되어 힘없이 서녘으로 향하는 모습을 볼 때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재판결과야 어찌됐든 상식선에서 금도(襟度)가 부족한 행위라 여겨진다.

직위를 이용해 향락을 충족한 패륜적 막장행위에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것은 이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마 동물이 이성을 가졌다면 사람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교도소 앞에 두 줄을 서서 특정인을 기다리는 일부 제천시민의 코미디도 그렇고,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극치라고 보여 진다.

일반 공무원이나 언론인이 몇 십만 원 드시고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 갔다 오면 쥐구멍으로 빠져야 되고 고급 벼슬아치나 군주는 억 소리 나게 드시고 갔다와도 환영받는 풍조는 어느나라 방식인지 매우 궁금하다.

국정이나 시정에 대해 간언(諫言)하는 언론인을 적대시 하고 ‘마이웨이’했던 정치인 치고 정도를 지향했던 사람은 없다. 그들의 최후는 우리가 겪어 왔듯이 처참한 몰골로 삶의 종말을 위한 서곡이 울려 퍼지지 않았나.

욕심이 화를 부른다. 독선이 화를 부른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금욕을 하지 못하고 끝없는 환락의 영상 속을 헤매다 보면 인생은 나락에 떨어져 버린 뒤 후회를 하나 이미 때는 늦다.

4,5년을 ‘기쁨조’옆에서 사는 것 보다 평생을 마누라와 자식 옆에서 작으나마 오순도순 살아가는 삶 중 어떤 것이 더 값진가? 부질없이 부귀영화를 꿈꿔본들 인간들의 작간(作奸)에 휩쓸려 최후를 맞이하는 슬픈 운명은 누가 보상해 주나?

나뭇잎이야 떨어지면 오는 봄에 다시 피지만 인생은 어디 그런가. 한 번 떨어지면 영원히 떨어져 버리는 것 아닌가. 지위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4,5년 남짓 군림하다 떨어질 인생인데 그 4,5년을 못 참고 종횡무진 진행하다 보면 낭패를 당한다.

백세인생이라 가정하자. 4,5년 군림하다 4,5십년 개밥신세가 되어 살아가면 뭣하나. 제 잘난 맛에 산다고 하지만 글쎄? 저승 갈 때 싸가지고 가는 것도 아닌데 씁쓸함이 엄습해 온다.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이란 태산이 떠나갈 뜻 요동 쳤으나 뛰어나온 것은 쥐 한 마리뿐이란 뜻으로 예고는 거창하게 했으나 결과가 보잘 것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주위를 돌아보자. ‘태산명동서일필’이 얼마나 많은가? 지금 국가나 지방사정이 그렇지 않은가? 인간들의 뻔뻔함에 더욱 옷깃을 여미고 살아야 할 것 같다. 정치인들은 얼어붙은 땅바닥에 엎드려 삼배하지 않고 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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