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오전 11시 서울 용산 백범기념관 대회의실에서 대일 항쟁기 언론인, 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단재 신채호(申采浩·1880~1936) 선생 순국 83주기 추모식이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회장 유인태) 주관으로 독립운동 관련 단체 대표 및 회원, 유족, 시민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선생의 뜻을 기렸다.

이날 추모식 의미는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자 일제로부터 국권을 회복하고 경제적 독립을 지키기 위해 전개됐던 국채보상운동 112주년을 기념하는 기념식도이날 오후 2시 대구 북구 엑스코 오디토리움과 서울 종로구 서울YMCA에서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상임대표 신동학) 주관으로 동시에 열린다.

▶ 신채호선생은 누구? 뛰어난 단재 선생은 민족사학자이며,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로서 우리 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1880년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리미의 진외가(外家)에서 출생한 선생의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1905년 26세에 성균관 박사가 됐으나 관직에 관심이 없던 선생은 위암 장지연 선생의 초빙으로 '황성신문'에 논설기자로 입사하면서 본격적인 언론활동을 시작했다. 1906년에는 영국인 베델 선생이 사주로 있는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진이 됐고, 일제의 침략 정책과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자유롭게 비판했다. 논설기자로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은 주필이 됐다.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일본의 삼대충노', '서호문답', '영웅과 세계' 등 애국적 계몽논설과 사론을 집필하고 '이순신전', '최도통전' 등 역사물을 연재했다. 글을 통해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한 셈이다.

조직활동에 관여 안창호 선생과의 인연은 선생은 언론활동뿐 아니라 여러 활동에도 직접 참여했다. 1907년 안창호 선생이 만든 신민회 창립위원으로 참가했으며, 전국적으로 일어난 민족경제수호운동인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했다. 선생이 애국계몽사상가로서 보다 확고한 위치를 다지게 된 것은 민족역사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다. 선생은 민족사적 영웅들의 전기를 통해 국가 위기의 상황에서 제2의 을지문덕, 이순신, 최영을 고대하는 민족자존의 방도를 강구했다.

▲신채호 선생 며느리 이덕남 여사와 회장 유인태
▲축사하는 도종환문화부 장관
▲축사하는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회장 유인태)

해방 이후에도 그는 줄곧 식민사학 극복과 민족사학 수립을 주장했다. 그의 아이 때의 이름은 '채호(寀浩)'였는데 나중에 '채호(采浩)'로 개명했다. 1880년 충청도 회덕현 산내면 어남리(현 대전 중구 어남동)에서 태어난 신채호 선생은 구한말 독립협회에서 활동했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 논설을 쓰며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비판하고 국권회복운동을 주창했다. 1907년 안창호, 이갑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 창립에 기여했고, 대구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10년 신민회 동지들과 중국으로 망명해 무관학교 설립과 교관 양성 등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

박은식, 신채호, 정인보로 이어지는 민족사학의 계통을 세우고, 8세가 되던 1887년 부친상을 당한 선생은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로 이사했다.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교민단체인 ‘권업회’를 조직하고 기관지인 ‘권업신문’의 주필을 맡아 재러동포들의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권익을 옹호하는 등 항일 언론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독사신론,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등 역사서를 펴내며 민족의식 고취에 힘쓰던 선생은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도 참가했다. 선생은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고자 대만으로 가던 중 일제에 체포돼 중국 랴오닝성 다롄에 있는 뤼순 감옥에 수감됐고 1936년 옥사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신채호 선생의 말이 떠오른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라던 그의 말이 생각난다. 요즘 보수정당의 역사 인식 점수가 몇 점이나 될까?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보수의 비율이 몇 퍼센트다 하는 수치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역사를 되새기고 그들을 잊지 않는 우리들의 마음이다. 지식이 아닌 진심 어린 마음이 역사를 기억케 하는 최고의 원동력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1909년과 2009년, 100년의 교감을 한번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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