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았다. 우리 선조들이 100년 전 오늘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분연히 떨쳐 일어나 독립의 기초를 닦은 것으로 평가되면서 그 의미는 뜻 깊다. 3.1 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일어났지만 가장 큰 피해가 컸던 곳 중의 하나가 화성 제암리 학살 사건이다.

화성 수원 일대의 격렬했던 만세운동의 중심에는 차희식(1870.11.10~1939.10.18) 선생이 계신다. 선생께서는 2천명이 넘는 주민들을 조직해 일본 순사를 살해했는가 하면 주재소를 불 지르기도 하는 등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에 일제는 대대적인 검거를 벌이는 한편 4월 1일 제암리에서 23명 고주리에서 6명을 학살하는 등 계획적인 보복만행을 자행하였다. 선생께서도 소요등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징역 15년형을 언도 받으셨다.

9년 2개월 만에 출옥한 선생은 출옥 후 오랜 옥고의 후유증으로 고생하시다가 결국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69세를 일기로 눈을 감으셨다. 정부는 이 같은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차희식 선생의 손자인 광복회 차창규 전 사무총장. 독립운동가 3대째인 그는 3.1 만세운동 100주년의 의미를 어떻게 새기고 있을까? 인터뷰는 지난 2월 19일 서울 광화문역 인근에서 이루어졌다.

◆화성 수원지역 3.1 만세운동 이끌었던 ‘차희식’

차희식 선생의 손자 광복회 차창규 전 사무총장은 조부에 대해 말해 달라는 질문에 “조부께서는 한학을 조금 하셨다고 한다”면서 “힘이 장사시고 사교에 능하셔서 사람들하고 사교를 많이 하시면서 할아버지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 당시 화성시 우정면 서포리란 곳에 차 씨 마을에 100여호 이상 살았다. 할아버지가 촌수가 높아서 조카뻘 되는 차병혁 차병완씨 등 몇 사람하고 만세운동을 주도하셨다”면서 “100년 전 우정면 인구가 2,000명이었다. 한 집에서 한 사람씩 의무적으로 나와 가지고 만세운동을 하게 하자 해서 동네마다 책임자를 두어 가지고 만세운동을 했다”고 말했다.

또 “전국에서 제일 치열하게 만세운동이 되어가지고 34인의 한 분이라고 하는 스코필드 박사라고 하는 분이 와가지고 카메라로 찍어 전 세계에 알렸다”고 설명했다.

계속해서 제암리 사건과 관련해 “만세운동을 치열하게 하니까 수원 헌병대에서 일본 헌병들이 와가지고 집집마다 불을 놓고 사람들을 패 죽이고 밤새 살타는 냄새가 났다”면서 “수천 동민들을 집합을 시켜서 교회 기도하는 것을 한번 들어봐야겠다고 하면서 교회로 모이라 해놓고 문을 잠그고 불을 질러 23명이 타죽는데. 그중에서 몇 명이 살아서 도망 나오니까. 칼로 찔러서 죽여 몰살을 시켰다”고 설명했다.

이어 조부 차희식 선생의 공훈과 관련해서는 “2500명을 이끌고 장안면사무소 문서를 불태우고 화수리 초등학교 있는 곳에 파출소가 있는데 소장을 타살했다. 보안법 위반, 건축물 파괴, 방화, 살인으로 15년의 징역을 사셨다. 15년 징역 언도 받고 9년 2개월 미결수 구금일 까지 해서 10년 이상 서대문 형무소에서 징역을 살고 나왔다”고 설명했다.

차 전 사무총장은 독립유공자 후손으로서 바라보는 국가 보훈정책의 문제점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28살에 군대에 갔다가 온 후 광복회에 들어갔다”면서 서훈 체계와 관련해 “지금은 7등급이지만 그 당시에는 4급 밖에 없었다. 훈장은 1,2,3급 그리고 4급은 표창장이었다. 3등급 훈장은 최소 징역 5년 이상 살고 독립운동 주모자가 될 수 있는 분들이 1~3등급이었다. 독립운동이 미미한 분들은 4급으로 표창장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대우를 했다.

이어 자신이 광복회 사무총장으로서 수행했던 역할에 대해서는 “후손들이 못 살면서도 자존심만 있었다”면서 “‘독립운동한 집안은 3대가 망한다’ 해서 못 살고 하니 그분들의 자제들의 학비를 면제해주고 취업시켜주고 이런 일을 했다”고 말했다.

계속해 “세월이 가다보니 훈격이 달라져서 4등급 훈장은 애국장, 5등급 훈장은 애족장, 6등급은 포장, 7등급은 표창 등으로 늘리면서 그분들 대우가 향상됐다”면서, “그 당시 표창장이 훈장이 되면서 연금을 못 받다가 현재는 연금을 받게 됐다. 제가 50년간 광복회에 있으면서 후손들을, 국가를 위해 혁혁한 일을 해왔으면 좋겠는데 그런 일을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독립 유공자 후손은 몇 명 정도냐를 묻는 질문에는 “훈장을 받으신 분은 1만 5천명 미만”이라면서 “정부가 찾아서 훈장을 줘야하는데 해당 유족, 손자들이 자신의 할아버지, 아버지의 공적을 찾아다가 제출하라고 한다. 일제 36년 하에 독립운동을 하면서 자신의 근거를 남기지 않으려고 남기면 자식이나 손자들이 보복을 당하니까. 그런데 그 근거를 갖고 제출하라는 게 보훈처의 취지”라고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어 “근거를 만들지 못하고 공적을 찾지 못해서 독립운동을 했더라도 빛을 못 보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얼마 전에 징역 산 사람들이 1만 2~3천명 된다는 기사를 봤다. 그 징역을 산 사람들 가운데 5~6천명이 서훈을 받았고 나머지는 받지를 못했다”고 현실을 지적했다.

3.1절 100주년 의미를 묻는 질문에는 “지난 1세기는 우리 한민족의 치욕의 백년”이라면서 “21세기 이번 백주년은 8천만 한 민족이 다시 한 번 깨어나서 후세에 남겨줄 것이 있다. 통일”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만 분단국가다. 21세기 100년은 통일의 물꼬가 터지고 있으니 전 국민이 단합해서 3.1독립정신을 가지고 통일에 앞장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사상에 의해 독립유공자를 인정받지 못하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독립운동은 사상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조상들은 민주주의 공산주의 등 사상을 초월해서 독립운동을 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북은 김일성이가 독립운동과 혁명 열사들은 철두철미하게 전 세계를 뒤져서 다 찾아다가 교육도 시키고 그 분들의 후손이나 이런 사람들을 정부기관 요직을 시키면서 혁명 열사들이 주도해서 나라를 이끌고 가기 때문에 독립후손들은 금수저로 잘 살고 있다. 그러나 남한의 후손들은 못나서 친일파들이 집권한 세상에 살기 때문에 기를 못 피고 흙수저로 지금 헤매고 있는데 앞으로의 100년에서는 고생을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촉구했다.

극우 인사들이 백범 김구 선생님이나 유관순 열사를 테러리스트라고 비하를 하는 등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그런 정신이나 생각을 가진 것은 우리 국민이 아니다”면서 “국민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유관순 열사의 서훈 문제와 관련해서는 “유관순 열사는 3년 징역 받았다가 옥사를 했지마는 15년 복역한 할아버지하고 똑같은 3등급 독립장”이라면서 “그래서 내가 이의신청을 하고 훈장 재심을 하자고 하니까 똑같은 훈장이라는 이유를 들어 재심이 없다고 했다. 유관순 열사의  등급을 올리게 되면 할아버지도 자동적으로 올릴 기회가 되지 않겠는가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건국절’ 문제와 ‘건국유공자’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나라는 5000년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다. 3.1독립 선언서에서도 조선건국 4252년이라고 5000년 이상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거를 지금 70년이다 100년이다 싸움을 하고 있다. 얼빠진 소리”라고 일축했다.

이어 “자기 득세 내지는 정치적으로 유리하게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라면서 “우리나라가 건국된 게 70년이면 독립운동한 사람들은 일본나라 찾으려고 독립운동했습니까?”라고 따져 물으면서 1948년 건국절 제정 움직임의 모순점을 지적했다.

차 전 사무총장은 마지막으로 민족혼을 일깨우는 바람직한 방향을 묻는 질문에 “민간 주도로 해서 국민운동을 해야 한다”면서 “각계각층에서 333명을 정해 국민대표 롤모델로 해서 그분들을 중심으로 뭉쳐야 되지 않은가? 그래서 통일 운동도 하고 3.1 독립정신을 계승시켜서 발전시킬 수 있게 끔 해야 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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