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1987년 대선 정국 집어삼킨 ‘KAL기 폭파 사건’ 진실은?

전두환 정권이 지난 13대 대통령 선거일을 불과 17일 앞둔 1987년 11월 29일, 승객 115명을 태우고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향하던 KAL 858기가 미얀마 상공에서 교신이 끊기고 실종됐다는 급보가 한국을 뒤흔들었다.

과거32년전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을 정략적으로 활용하려 한 정황이 외교문서를 통해 확인됐다. 〈뉴스타파〉에 따르면, 이틀 뒤인 12월 1일, 경유지였던 아부다비에서 내렸던 승객 15명 가운데 일본여권 소지자 2명(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이 위조된 여권을 이용한 사실이 확인됐다. 이들은 바레인 공항에서 출국을 저지당했고, 조사 과정에서 음독자살을 시도했다. 신이치는 현장에서 숨지고 마유미는 살아났다(이들의 한국 이름은 김승일과 김현희다).

대선 직전 범인 김현희를 국내로 데려오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쓴 이유는 한국 정부는 이들이 북한 공작원이라고 판단하고 김현희(마유미)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바레인 정부와의 협상에 돌입했다. 결국 김현희는 13대 대통령 선거 하루 전인 87년 12월 15일 오후 김포공항을 통해 서울로 압송됐다. 김현희 압송 장면은 대선 투표 당일 대다수 조간신문의 1면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등 대선 이슈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17년 만에 치러진 직선제 대통령 선거의 승자는 전두환의 후계자인 노태우였다.

대통령 선거일 조간 신문들의 1면을 장식 김현희의 서울 압송 모습

전두환 정권이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사건...‘대선 활용’위해 공작한 사실 드러나

그 결과 김 씨는 선거 하루 전 입국했다. 87년 대선 정국을 집어삼킨 KAL 858기 폭파 사건은 여러 의문점 때문에 의혹이 끊이질 않았다. 전두환 정권 때 안기부가 군사정권 연장을 위해 기획한 조작극이었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어떻게 선거에 이용하려 한 것인가? 이에 따라 노무현 정부 당시 국정원 과거사위원회가 3년 동안 KAL기 사건 진실 규명을 위한 조사를 벌였다. 결과는 KAL 858기 폭파는 북한 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의 범행이라는 기존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국정원 과거사위원회는 전두환 정부 당시 안기부가 KAL기 사건을 87년 대선 때 여당 후보 노태우의 승리를 위해 활용했다는 사실을 안기부가 작성한 이른바 ‘무지개 공작’ 문건 등을 통해 확인했다.

안기부의 ‘무지개 공작’ 문건

1987년 11월 29일 대선이 3주도 채 남지 않은 시점, 김현희의 음독자살 기도 다음날인 12월 2일 작성된 ‘무지개 공작’ 문건에는, KAL기 실종을 북한의 폭탄 테러로 규정하고 대규모 궐기 대회를 조직하는 등 대통령 선거에 유리한 환경을 만드는 것이 공작의 목적이라고 기재돼 있었다.  또 대통령 선거일 전에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한다는 계획도 담겨 있었다. 이런 계획을 효과적으로 실행하기 위해서는 당시 바레인 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던 김현희를 최대한 빨리 서울로 압송해 국민들에게 실물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김현희 압송을 위한 바레인과의 협상 과정이 담긴 기밀 해제 외교문서들

대선을 위해 비밀 해제 외교문서 속 ‘김현희 압송 작전’

다음 달 16일이 대통령 선거일 김현희를 국내로 데려오기 위해 공을 들인 것.김현희 압송을 위해서는 당시 외무부를 중심으로 하는 외교 협상이 필요했다. 생산된 지 30년이 지나 최근 공개된 외교문서에는 바로 KAL 858기 관련 자료 만여 페이지가 들어 있는데 김현희 압송을 위한 바레인 정부와의 협상 관련 문서도 여기에 별도 항목으로 묶여 있었다.

12월 5일 최광수 외무부 장관이 바레인 주재 한국대사에게 보낸 전문

당시 김 씨의 신병을 확보한 바레인 측이 "인도가 성급하다"고 언급하기도, 우선 1987년 12월 5일 밤, 당시 최광수 외무부 장관은 바레인 주재 한국대사에게 전문을 보내 김현희의 신병 인도를 바레인 정부에게 문서로 요청하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곧바로 박수길 1차관보를 바레인으로 급파해 협상을 지휘하도록 하는데, 김현희를 대선 전날인 12월 15일까지 인수하는 것이 임무라고 기재돼 있다.

박수길 당시 외무부 제1차관보가 바레인 도착 후 보낸 첫 번째 전문

특사로 파견된 박수길 차관보는 안기부 수사관 3명과 함께 12월 7일 바레인에 도착한 뒤 다음날 첫 번째 전문을 보냈다. 여기엔 안기부 수사팀이 김현희 압송 일정으로 10일 밤 출발, 11일 밤 출발, 12일 가능한 시간에 출발 등 3가지 안을 마련해 바레인 측에 비공식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보고 내용이 담겨 있다.

바레인 정부의 김현희 인도 최종 결정 사실을 본국에 보고한 전문

뉴스타파의 이어 하지만 막판에 이송 일정이 연기되자 12월 10일이 되도록 바레인 정부는 확답을 주지 않았다. 박 차관보는 “늦더라도 15일까지 김현희가 서울에 도착하려면 12일까지는 바레인 정부의 신병 인도 통고를 받아야 한다”면서 “만약 시일이 계속 미뤄질 경우에는 차라리 바레인 정부가 김현희를 조사하도록 하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니까, 대선 전날인 15일까지 김현희를 데려올 수 없다면 굳이 신병 인도 협상에 매달리지 말고 바레인 정부가 조사를 이어가게 놔둘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자 정부는 사우디 정부에 바레인에 영향력을 행사해 줄 것을 요청하고, 그러면서 박 차관보는, 바레인 내무장관이 자신을 만나 대통령 선거 때문에 귀국을 서두르는 것이냐고 문의하는 등 대선을 의식한 발언을 했다고 보고했다. 이어 박 차관은 바레인 측이 신병 인도 결정을 미루고 있는 것은 한국 대선 이후에 김현희를 넘겨주라는 미국 측의 압박 때문일 수도 있으니 김현희 인도 문제에 관해 미국 측에 너무 소상한 정보를 주지 않는 게 좋겠다는 의견까지 덧붙였다.

하지만 결국 12월 12일, 바레인 측은 김현희를 내주기로 결정했다. 박수길 차관보는 바레인 내무장관과 합의한 신병 인도인수 일정을 즉시 이를 본국에 보고하면서 김현희를 수송할 특별기를 12월 13일 저녁까지 바레인 공항으로 급파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일정이라면 김현희는 12월 14일 오후 2시쯤 김포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외무부는 바레인과의 공동발표문 문안을 작성하고 청와대에 보고하는 등 바쁘게 움직였다.

그런데 갑자기 변수가 발생했다. 바레인 정부가 돌연 김현희 신병 인도를 24시간 연기하겠다고 통보해 왔기 때문이다. 박 차관보의 보고 전문을 보면, 바레인 내무장관은 뚜렷한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보류를 통보한 것으로 돼 있다. 만약 14일 오후까지 바레인 정부가 신병 인도를 최종 결정하지 않는다면 김현희를 대선 전날인 15일까지 서울로 데려오는 것은 불가능해지는 상황이었다.

바레인 정부가 김현희 신병 인도를 24시간 보류하자 외무부가 준비한 2가지 버전의 발표문

박수길 차관에게서 이 같은 내용을 보고받은 본국 외무부도 바빠졌다. 바레인 현지 상황을 청와대 등에 급히 보고하는 한편, 2가지 버전의 대국민 발표문안을 미리 작성한다. 즉 김현희 신병 인도가 바레인 정부와 원만하게 합의될 경우와 14일 오후 이후에도 보류 상태가 이어질 경우를 각각 상정한 발표문을 작성해 놓은 것이다. 그러니까 바레인과의 협상이 어떻게 되든 대선 전날인 15일에는 김현희 관련 대국민 발표를 내놓겠다는 의미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바레인 정부의 김현희 인도 최종 결정 사실을 본국에 보고한 전문

하지만 결국 바레인 정부는 14일 저녁 6시 35분 김현희 신병 인도 결정을 최종 통보해 왔다. 이에 따라 14일 밤 9시 40분 바레인 국제공항을 떠난 김현희는 대통령선거 전날인 15일 오후 2시 5분 김포공항에 도착해 언론사들의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게 됐다. 김현희가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는 장면은 대통령 직선제 부활, 군사정권 종식, 이른바 양김의 대결 등 모든 대선 이슈를 집어 삼키고 말았다.

외무부, 사실상 ‘무지개 공작’의 공동 주역

87년 6월 항쟁으로 이뤄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첫 대선에서 선거 막판 안보몰이를 통해 군사정권 연장에 큰 역할을 한 김현희 압송 작전은 안기부 ‘무지개 공작’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그 실행 과정에서 외무부는 사실상 안기부와 한 몸처럼 움직였다. 이는 당시 김현희 신병 인수 협상을 위해 바레인에 갔던 박수길 전 차관보가 뉴스타파 취재진과 만나 나눈 대화에서도 확인된다.

박 차관보는 “당시 외무부의 차관급 인사가 안기부에 파견을 나가 있었다. 역시 안기부로 파견된 외무부 직원 가운데 정 모 국장 같은 경우는 그 당시 안기부에서 파악하고 있는 KAL 관련 정보 등을 바레인 현지에 나가 있는 나와 안기부 수사팀에게 전달해 주는 연락관 역할을 했다. 안기부와 공조가 상당히 잘 이뤄졌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밝혔다.

12월 17일 외무부가 작성한 ‘KAL 사건 관련 서훈 대상자 명단’. 하단에 검게 칠해진 부분은 포상 대상인 안기부 직원들의 명단으로 추정된다.

이런 사실과 정황은 30년이 지나 군사정권 연장으로 마무리된 13대 대통령 선거 바로 다음날인 12월 17일, 외무부는 박수길 차관보를 비롯한 11명의 직원들을 대상으로 훈장과 포장, 표창 등 각종 서훈을 상신한다.

앞서 지난 2006년 국정원 과거사위에서 KAL 858폭파 사건을 조사했던 안병욱 카톨릭대 교수(현 한국학중앙연구원장)는 “17년 만의 직선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권위주의 정권이 계속될 것이냐 민주화가 될 것이냐의 기로에 서 있을 때 마침 KAL기 폭파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정부 기관들은 장기적인 한국 사회 민주화를 위해서 이 사건에 관한 진실만을 있는 그대로 밝혀내려 노력했어야 하는데, 정권의 최첨병이었던 안기부 입장에서는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생각이 더 강했고, 외무부는 안기부의 기획 대로 김현희를 대선 전 압송하는 목적을 위해 충실한 조력자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사진, 영상 뉴스타파, 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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