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과 분배에 대한 어지러운 갑론을박을 지켜보노라면 대체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의아하고 그 주장의 난의難義가 답답하다. 성장이 알찬 분배를 실현한다는데 무슨 모순과 이의가 있는지 모를 일이다.

성장과 분배를 둘러싼 논쟁에서 가장 난해한 쟁점은, 어느 것이 더 중요하며, 어느 것을 더 우선적으로 챙겨야 하는가 하는 ‘우선시비’이다.
성서에 ‘눈물로 씨를 뿌리고 기쁨으로 수확한다.’는 구절이 있다. 비유적으로 인용컨대 ‘땀으로 성장을 성취하고 기쁨으로 그 열매를 나눈다.’고 표현할 수 있다. 성장이 전제이고 거기서 결실을 수확해야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성장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단어에는 발전, 성취, 풍요, 공격적, 눈물, 열정, 경쟁, 땀, 고통, 좌절, 낙오, 냉혹함 같은 것들이 있다. 반면에 분배는 소유, 기쁨, 달콤함, 보람, 만족, 다다익선의 칼을 품은 탐욕, 평등한 나눔의 어려움, 나눌 파이의 크기에 대한 끊임없는 허기와 불만과 다툼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성장이 우선돼야 한다고 믿는 쪽은 다분히 일반적으로 강자의 발전 논리로, 분배가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은 약자의 저항과 보호 논리로 비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정부가 주도하는 경제성장과 소득분배가 다 국민이 이룩하고 국민이 누리는 것이고, 거기서 중심적 역할을 하는 기업의 성장과 분배 역시 근로자인 종업원이 달성하고 나눠 갖는 것인 데도, 주장이 다르고 지지가 갈려 우선 여부를 가지고 갑론을박하기 일쑤라는 사실이다.

성장과 분배는 지금 아주 중요한 시대적 담론 거리의 하나가 되었다. 특히, 그 우선순위에 대한 의문이나 문제가 있을 리 없는 기업에서까지 그것이 쟁점이 되는 우려할 지경에 이르렀다. 정치성이 짙은 성장분배론은 반 기업정서를 조장했고, 그러한 바람은 냉혹한 시장원리와 따라야 할 경영 패러다임을 무시한 무책임한 분배우선주의를 기업에 웃자라게 만들었다.
그 모든 무익하고 혼란스러운 논쟁이 성장과 분배의 관계성에 대한 무지와 오해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그것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인식이 필요하다.

대체 성장과 분배는 어떤 관계인가.
넙치라는 바닷고기는 치어 때 머리 양 편에 있던 눈동자가 성어가 되면서 한 개로 겹치는데 생존경쟁에 적응하기 위해서다. 몸의 한 편을 배처럼 바닥에 붙이고 보호색을 띤 다른 한 편을 등으로 삼는 변신으로 일방 강자의 공격을 피하면서 동시에 먹이를 노린다.

그러므로 두 개의 눈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넙치에 있어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무리 암탉이라도 햇병아리가 어른 닭으로 성장해서 교미를 해야 알을 낳을 수 있다. 성장이 없는 산란이란 불가능하다. 어른 닭으로 다 자라지 못한 닭은 삼계탕감으로 인기가 좋은 영계일 뿐이며, 알을 낳지 못하는 닭은 요리해 먹는 육계일 뿐이다. 닭에 있어 성장이란 실로 산란이라는 생산에 그 최고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알을 낳지 않으면 종란種卵으로든 식용으로든 분배란 있을 수가 없다.

밤나무는 매년 제감장대로 햇볕과 비를 먹고 자양분을 빨아들여 생장하면서 꽃을 피워 벌에게 꿀을 나눠 주고 밤을 결실해 사람과 다람쥐에게 수확하게 하며, 다람쥐의 건망증이나 바람에 실려 땅에 묻힘으로써 새로운 성장을 지속한다.  만일 밤나무가 어쩌다 해거리 때문에 결실을 못할 경우 벌과 다람쥐는 굶게 될 것이다.

생물 아닌 세상사 돌아가는 사리事理로 비유컨대, 성장과 분배는 ‘수력 발전과 전기 배전’ 같다. 저수지 물로 성장 동력을 삼아 발전 터빈을 돌려 전기를 얻고 배전선로를 통해 나누면, 그것 가지고 전깃불을 켜고 밥을 지으며 전철을 운행한다.  만일 터빈의 작동이 멈춰 전력생산을 하지 못한다면 전기를 사용하는 모든 기구와 일들은 일거에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저런 자연의 이치나 사리로 본다면, 성장이란 크고 성숙하여 꽃 피우고 결실하는 생산이며, 분배란 수확한 산물을 나눠 갖는 소유인 것이다. 그러나 성장한다 해서 반드시 결실하는 게 아니며, 결실한다 해도 그 수량과 가치가 똑같을 수 없다. 그 한 가지 이치만 보아도 참으로 ‘평등’이란 말은 함부로 쓰기 어려운 것이다.

여기서, 거창하게 국가의 경제성장과 소득분배의 관계성이나 중요성을 논하거나 강조할 생각이 없다. 그것을 이해하거나 논함에 있어, 그것의 핵심 역할을 담당하는 기업의 그것을 반드시 먼저 이해해야 하므로, 여기서는 기업에 있어 성장과 분배의 관계를 다루고자 한다.

기업에 있어 성장은 그 개념이나 중요성에 있어 아주 명백하다.
매출규모, 수익성, 자금력, 유동비율, 순자산 가치, 자기자본, 신인도, 회사가치 등 이른바 총체적인 기업역인 사세社勢가 지속적으로 신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목표는 말할 것도 없이 좋은 기업이 되려는 것이며, 노사가 다 함께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이다. 잘 먹는다는 것은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게 넉넉한 보수를 준다는 의미이고, 잘 산다는 것은 인간답게 대우 받으며 희망을 가지고 안정되게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행복한 삶을 제공하고 보장하며 유지해 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고용계약이라는 도덕적 계약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것으로 경영 도의나 이익 가지고 한다. 

모든 것이 완비되고 훌륭해도 이익이 없으면 할 수 없다. 성장이 나누기에 충분한 이익을 결실하지 못하면 기쁨으로 나눌 수 없다.
이건 이론과 상관없으며 논쟁할 필요가 없는 현실의 문제다. 성장이 불안정하면 경영이 불안정하게 되며, 성장이 저조하면 재무구조 또한 취약하게 되고, 성장이 멈추면 기업은 빠르게 노쇠하여 존립이 위태로워진다. 그러므로 성장이란 우선 기업의 존립과 영속에 관건이 되는 것이다.

기업에 관련된 모든 의의와 가치와 미덕과 기여와 선은 기업이 존재하지 않으면 무위하다. 그런 맥락에서 성장하지 못하는 기업에 분배란 있을 수도 없거니와 그 단어 자체가 무가치하다. 그럼에도 성장과 분배를 따로 떼어 심지어 맞상대를 시키는 형국으로까지 갑론을박하는 것은 그 본질과 속성이 어떻게 불가분의 관계로 상관돼 돌아가는지 무지한 때문이다. 따라서 성장과 분배의 관계성을 바르게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하고 명백한 사실은, 첫째, 두 가지가 다 종업원이 노력해 얻고 결정해 누리는 것이지만, 성장은 마음대로 달성된다는 보장이 없고 자기 의도대로 통제할 수 없는데 비해, 분배는 성장이 전제되는 한 실현을 보장할 수도 통제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두 가지가 상호작용을 통해 성취된다는 점이며, 셋째로, 그것들의 성취 관건이 정부나 권력에 있지 않고 기업과 이익에 있다는 사실이다. 흔히들 그 두 가지를 별개의 것인 양 떼어 다루고 평가하며, 심지어 성장은 냉혹하고 더러우며 때로는 부도덕하고, 분배는 인간적이고 선하며 항상 정의로운 것처럼 묘사하고 그렇게 여기기까지 한다. 그 결과로 성장이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시장경제에 푹 절은 모순된 자본주의 신봉자로 몰린다.

분배를 우선 시켜야 한다는 사회주의 성향이 짙은 사람들은 ‘동반성장’이니 ‘균형발전’이니 반시장적 깃발을 요란하게 흔들어대면서 평등한 사회 구현의 사도를 자처하고 나선다. 그 때문에 우스꽝스러운 대립현상이 빚어진다.
종업원들 양 손은 한 쪽에는 성장의 깃발과 열쇠를, 다른 한 쪽에는 분배를 담을 그릇과 행복한 삶의 열쇠를 각각 나눠 쥐고 있다.

성장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분배 받을 권리는 사라지는 것이며, 만족한 분배를 받지 못하는 것 역시 성장에서의 자기 역할과 책임을 완수하지 못한 데서 생긴다. 성장을 달성하느라 땀 흘리는 노동자들이, 나눌 파이의 크기를 재고, 그 방법을 논란하며, 때로 불만하여 단체행동을 벌이는 것은 타당한 권리의 행사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런 권리의 행사가 항상 정당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분배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성장을 방해하는 부당한 행동을 예사로 한다는 현실이다. 하물며 성장의 역군으로 땀 흘려 일한 적이 없는 ‘꾼’들이나, 현학적인 이론가들이나 사회운동가들이, 성장의 의의나 가치를 제멋대로 논하고 발목을 잡으며 딴지를 거는 것은 무책임한 횡포요 질서를 어지럽히는 반기업적 도발이다.

그리고 국가의 경제성장과 소득분배를 다루고 관련 정책을 결정함에 있어 기업의 그것을 중심하지 않는 것은 매우 불합리하고 슬기롭지 못한 독선이다. 예컨대, 국가 대사를 소신 있게 제대로 추진하는 게 3년 정도가 고작인 어느 한 정권이, 그나마 기업에 무지하고 경영 마인드가 밑바닥인 탓으로, 성장 경주에 나선 기업을 도와주기는커녕 어쭙잖게 시시콜콜 매운 시어머니 노릇이나 일삼고 반 기업정서를 아무렇지 않게 방치한다면 그 어느 것보다 성장을 방해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그늘에 갇힌 빈곤층의 보다 인간다운 삶을 도와주기 위해 성장의 산물을 덜어 이른바 복지정책을 통해 나눠 준다든가, 성장이 고의적으로나 또는 불가피하게 낳는 해악을 예방하고 최소화하기 위해 그것을 규제하고 성장 속도와 방법을 조정하는 개입은 필요하다.

그러나 부자의 것을 힘과 압력으로 가져가서라도 가난한 사람들을 돕겠다는 식의 의식과 발상으로 분배의 우선론을 펴는 것은 시장경제주의에 어긋나는 위험한 사고다. 예컨대, 스웨덴이나 독일은 그런 식으로 분배를 우선하는 복지정책을 폈다가 낭패를 당한 경우다. 성장이 둔화되면서 과도한 복지비용 지출은 국가 재정을 위험수위로 고갈 시켰고 실업률은 만성적으로 증가해서 심각한 골칫거리가 된 것이다. 

성장에 호의적이지 않고 그 발목 잡기를 별로 문제시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먼저 과연 성장이 없는 분배란 가능한가 물어야 한다. 성장이 그 비정하고 악착같은 질주 때문에 설사 비판을 받고 굶주리며 속상해 눈물로 씨를 뿌려서라도 수확을 해야지 기쁨으로 분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씨를 뿌리지 않거나 흉년이 들어 수확할 게 없으면 일꾼들 품삯 새경조차 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다 대고 삶의 질이 어떠니, 기업이 무책임하다느니, 파이가 왜 이렇게도 초라한 가고 불만을 퍼붓고 책임을 따지며 설사 분풀이로 주먹질을 해댄다 한들 무슨 해결책이 생길 것도 아니며, 상황의 반전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건 그저 노사 간에 불화만 키우고 신명을 말려 기업 장래에 어두운 그림자만 드리울 뿐이다.

성장이란 이를테면 파스칼이 말한 ‘유효한 정의인 힘’과 같은 것으로 성장이 없음은 ‘힘없는 정의는 무효’인 것과 같은 것이다. 기업에 있어 정의란 곧 ‘힘’이고, 그 힘이란 다름 아닌 ‘이익’인 것이므로, 성장에 실패하여 제대로 이익을 내지 못하면 분배할 힘을 상실하는 것이며, 정의를 실천할 수 없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토록 성장이란 제구실을 다 하지 못하면 흉기가 되어 기업에 심각한 상처를 입힌다. 그건 매우 냉정해서 정의나 평등이나 동반성장이나 균형발전 같은 이상이나 대의명분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오로지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도전과 각고의 노력으로 하는 성장비행에만 동승하고 순종한다. 사실 성장이 결실하는 풍요를 누려 마땅한 자격자가 분배자임에도 불구하고 기실 성장을 방해하고 발목을 잡으며 망가뜨리는 나쁜 동행자 역시 분배다.

예컨대, 일본 토요타자동차는 현대자동차보다 훨씬 강하고 부자며 국제시장 경쟁력에 있어 월등하다.  말하자면 현대보다 훨씬 큰 파이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장과 분배의 가장 합리적이고 유익한 관계를 지향함에 있어 노사 간에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져야 되는 것은 성공적인 성장비행이요 그로 인한 알찬 수확이다. 그리고 성장의 가치는 치열하나 정당한 경쟁을 통해 성취하는 데서 나오며 분배의 윤리는 기업의 존립을 좌우하는 성장을 우선적으로 존중하고 그 질서를 지키는 데서 완수된다.

성장과 분배의 어느 편에 서더라도, 기업의 장래를 위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판단할 때는, ‘과연 이것이 환자(기업)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우리의 최선인가?’ 하는 <브라이언 간호사의 원칙>을 반드시 기조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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