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애자의 소설 - <빵굽는 여인> 제9회

만일 아기를 낳으려면 중절수술을 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산모가 위험하다고 하였다. 숙희는 자신이 죽으면 아기도 죽게 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다고 되뇌었다. 아이만큼은 건강한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성석처럼 빵보다 찌개를 맛있어 하며 잘 먹는 건강한 아이여야 한다. 갑자기 기운이 없고 현기증이 밀려왔다. 속이 미식거리며 토할 것만 같았다.

병원의 입원실로 서서히 발걸음을 옮겼다. 병실에는 김 권사님이 와 계셨다. 임종을 앞둔 환자에게 죽음을 편하게 맞을 수 있도록 위로해 주고 기도해 주는 고마운 분이시다. 그동안의 병원생활도 이분의 도움으로 견딜 수 있었다. 숙희는 결단을 내렸다. 이분만이 자신의 아이를 선처해 줄 것 같았다.

“아이를 부탁합니다!”

숙희는 울면서 김 권사의 손목을 힘껏 붙잡았다.

 

화창한 봄날의 오후였다. 4월의 어느 날 부활절을 기념하는 예배를 치르느라고 김생려 권사는 매우 분주하였다.

50명 정도의 성도와 식사할 음식을 준비하는 책임자였기에 각별히 여러 가지로 신경이 쓰였다.

돼지편육과 팥을 듬뿍 넣은 시루떡 그리고 딸기와 오렌지의 과일, 부활절에 빼놓을 수 없는 삶은 달걀 등 음식을 준비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곁에서 함께 준비하는 이연순 권사가 말을 걸기 시작하였다.

“목사님하고 사모님은 서로가 봉사하다가 만났다면서요?”

“위탁소에 맡겨진 아이들을 입양하여 부모가 되어주기 위해서죠.”

“아, 그래도 서로 사랑했으니까 같이 부부가 되었겠죠.”

“그럼요. 두 사람 어찌나 사이가 좋고 어울리는지요.”

“그런데 정말로 다섯 명이 모두 입양한 아이예요?”

“네, 그래서 아이를 갖지 않은 것 같아요. 아이가 생기면 친자식에게 아무래도 더 애정이 가게 되니까…….”

“정말 대단해요!”

“그나저나 내가 봉사하고 있는 누리병원에서도 맡아서 길러야 할 갓난아이가 있어요. 사모님께서 그 아이도 입양하시려 하나 그 아이만큼은 제가 입양해야 할 것 같아요.”

“아! 젊은 댁이 아기를 낳자마자 사망했다던 그 아이?”

“맞아요. 참 착한 젊은 댁이었는데 본인도 위탁소에서 자랐다는데……. 아, 글쎄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내 손을 꼭 잡으면서 ‘제 아이 좀 부탁합니다’ 라고 애원하는 모습이 너무 가련하고 애달파서 어떻게 뿌리칠 수 있겠어요!”

“말이 쉽지, 입양 정말 힘들 텐데요.”

김 권사는 사모님에 대해서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다가 이연순 권사가 궁금해 하기에 그들의 사연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일산에 위치한 태양 위탁소를 경영하고 있는 목사부부는 거의 사십이 다 되어서 결혼을 하였다. 그 목사는 신학을 하면서도 버려진 아이들을 자식처럼 키우는 사랑의 실천을 좌우명으로 삼으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이때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홍신애는 겨울방학 때 교회청년의 대표로 가까운 사회 봉사단체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계기로 태양 위탁소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러다가 홍신애는 위탁소에서 남자 홀몸으로 아이들을 몸소 돌보는 젊은 목사를 보조하는 일을 자원하여 나서게 되었다. 학교의 일과를 마치고 오후 7시에서 9시까지 위탁소 아이들의 옷을 세탁해 주며 맛있는 간식으로 김밥이나 떡볶이 등을 만들어 주곤 하였다. 그런 일을 하면서 홍신애는 목사님의 곁에 자신이 있어야만 적합한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심전심이었는지 두 사람은 결혼의 일치를 보였고 신애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그 무렵의 홍신애는 신앙과 인생의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하던 시기였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님이 독실한 장로님이어서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그녀는 신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그저 관례적인 행사로 예배에 참석하였다. 그녀는 이런 생활을 대학생활 내내 지속했다가, 대학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부터는 세상의 허무함과 삶 자체에 대해서 무의미를 느끼며 정신적으로 방황하였다.

인간의 부조리, 탐욕, 생활의 고단함과 민생고와 부정부패…….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하루하루 매번 반복되는 일상의 무미건조함과 지루함... 그것들을 잊어버리려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호기심과 함께 그녀가 전혀 몰랐던 세계도 경험하였다.

샴페인을 마시고 현란한 디스코텍에도 출입하였다. 자라오면서 엄숙한 청교도적인 분위기 속에서 죄악시 되었던 그곳들을 탐색해보았다. 현란한 불빛 속에서 온몸을 불태우듯 흔들어보아도 마음은 더욱 공허하고 허전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되어서도 이런 생활이 계속되자 교단에서 가르치는 학생들 앞에 서기도 부끄러웠다. 진리가 무엇인지 혼돈되었고 단순한 학문적 지식 외에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오히려 죄책감만 더욱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이런 삶의 회의와 갈등 속에서 교원 연수원에서 선배인 함성희를 만난 것이 커다란 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함성희는 학창시절에 연애대장에다 담배를 피우고 술을 잘 먹는 대담하고도 거칠고 강한 여대생이었다. 어느 날 교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심리상담의 강사로 그녀가 초빙되어 왔었던 것이다. 홍신애는 교사의 일정자격 연수를 받는 동안 함성희의 변한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그녀의 얼굴표정은 온화하며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 마치 광풍처럼 현란함과 요란함과 방종적이었던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침착함과 성숙함, 삶의 풍요로움을 향유하듯 매우 활기차 보였다. 반항적이고 냉소적이고 방탕한 모습은 저 멀리 바닷가에 내던져버린 것 같았다.

“여러분! 인간에게 의미를 가지고 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곳에서 감금되었던 유대인들은 이제 곧 가스실에서 곧 죽을 일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처참한 감옥 속에서 소박한 꿈을 하나라도 가진 사람은 그 모진 고통을 견디고 살아났던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사랑하는 애인을 살아서 곡 만나야겠다는 꿈, 어떤 이는 고향에 돌아가서 조그마한 가게를 차려야겠다는 꿈, 어떤 이는 살아서 꼭 부모님을 찾아뵈어야겠다는 의지…….

이와 같은 삶에 대한 소박한 꿈을 가진 사람들은 끝까지 살아남아 있었고 그 외의 사람들, 즉 아무런 꿈과 의지가 없는 사람들은 그 비위생적인 감옥 안에서의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갔습니다. 그곳에서 실제로 경험한 사람이 빗다 프랭클린이라는 사람인데 그는 커다란 심리적 현상을 발견하였습니다.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 때, 죽음조차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고, 후에 그것이 ‘의미요법’의 심리학설을 창시하게 되었습니다.”

함성희는 자신의 삶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진 근본이 바로 ‘의미’를 가졌을 때였다고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며 드라마틱하게 설파하였다. 신애는 자신이 지금 무의미의 정신병의 수용소 안에 갇혀 있는 듯했다. 삶의 무의미 속에서 갇혀 지루하게 삶을 방탕하고 있는 자신을 자각하였다. 지난 날의 무의미의 방탕한 생활이 계속된다면 자살하고픈 충동 속에서 이 세상에서 살아져버린 존재가 되었을지 모른다.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그런 허탈감에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함성희는 정신적으로 포동포동 살이 찌고 풍성해 보였다. 의미의 빵을 만들고 풍성한 식사를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홍신애는 문득 삶의 활력소. 효소와 이스트와 같은 것이 ‘의미’라는 것을 자각하였다.

‘그래! 이제부터 의미의 빵을 만들며 나눠주면서 사는 거야!’

신애는 자신도 함성희처럼 의미의 빵에 배부른 삶을 산다고 생각하니 행복하였다. 그 후 삶이 소중하게 여겨지고 생동감이 넘치기 시작하였다.

 

오월의 신록의 계절이다. 노인숙은 세리의 병간호와 숙희의 병원 입원으로 마음이 지치고 짜증스러웠다. 생각하면 숙희라는 계집이 얄미웠다. 세리에게 음식을 제대로 주지 않아 영양실조로 만들어 놓았고, 거기다가 쓰러져 있을 게 뭐란 말인가. 부리나케 병원으로 실려 간 숙희는 그동안 남모르는 병이 깊어 있었다. 혈액에 염증이 생기는 일종의 병명도 알 수 없는 희귀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숙희는 임신 중이라 생명의 위험이 가중된 상태였다. 결국 숙희는 아기를 낳자마자 숨을 거두었다. 어쨌든 노인숙은 임시 보호자 역할로 그 모든 과정에 참여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늦은 가을의 오후, 창 밖에는 여전히 2층의 교회 건물이 내다보였다. 그런데 출입구에 현수막이 보였다.

‘자랑스러운 샛별 입양식의 안내 -수요일 7시에 본당에서’

숙희의 임종을 지켜보며 봉사하던 김생려 권사가 숙희가 낳은 아이를 입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계집이 화냥기까지 있다니…….’

세인들의 눈총이 있어 병원 진료비와 장례비는 자신이 부담하고 그것으로 속히 숙희와의 모든 것을 끊어 버리고 싶었다. 이제 그 근본도 없는 계집애에게 정나미가 떨어지고 지긋지긋했다.

haj20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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