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억 달러 뒤에는 전범과 전범기업이 있었고, 한국 경제가 일본에 끌려다니게 된 뼈아픈 단초가 되었다.

아베 정권은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을 얘기할 때마다 1965년의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다 끝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JTBC가 그 이면의 허구성을 5일 되짚어냈다. 2015년 일본 외무성이 전 세계에 공개한 홍보 영상을 보면 일본의 원조로 아시아가 번영할 수 있었다면서 그 대표적인 사업으로 서울지하철과 포스코(포항제철) 건설을 꼽고 있다.

일본이 1965년에 한·일청구권 협정 이후 우리에게 보낸 것은 무상 협력기금 3억 달러, 유상차관 2억 달러, 그리고 상업차관 3억 달러까지 모두 8억 달러였다.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로서 당연히 갚아야 할 책임이었지만, 이를 '원조'라는 이름으로 둔갑시키고 스스로에게 면죄부까지 준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이를 통해서 강제징용에 대한 개인 배상도 끝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JTBC 취재진이 일본 정부가 '원조'라는 이름으로 제공했던 8억 달러가 실제 어디로, 어떻게 쓰여졌는지를 추적했다. 그 8억 달러 뒤에는 전범과 전범기업이 있었고, 그것은 지금 우리 경제가 일본에 끌려다니게 된 단초가 됐다.

전범 기업 미쓰비시에 의해서 납품가가 2배 가까이 부풀려진 서울지하철 사업의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 지하철 사업은 박정희 정권 때인 1971년 착공했다. 건설 자금은 일본에게 빌린 8000만 달러로 서울 수도권 지하철 사업을 수주한 곳은 전범기업 미쓰비시와 마루베니 등이 주도한 합작사였다.

4%대 금리에 일본 기업들이 만든 객차와 부품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김명년/전 서울지하철본부 초대본부장 : 일본 것이 아니면 차관을 안 주기로 돼 있었어요. 돈을 빌려줄 때, 돈을 어떻게 쓰라고 하고…일본 것을 쓰라고 딱 돼 있어요.]

당시 우리 경제정책을 총괄했던 경제기획원 내부 문건 기록은 애초 국무회의에 보고된 지하철 객차 예산은 84억엔이었다. 그런데 미쓰비시 등이 물가 상승을 이유로 1년여 만에 40% 넘게 차량 납품가를 올려 118억엔이 됐다.

특히 해당 문건에는 우리가 공급받은 차량 가격이 일본 도쿄시가 납품받았던 가격보다 비싸다는 지적이 일본 국회에서 제기됐다는 내용도 있었다.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미쓰비시, 미쓰이 등 일본 기업들이 한국에 지하철 객차를 납품하는 과정에서 가격을 부풀렸다는 당시 구체적인 기록이 확인돼 직접 찾았다.

1973년 9월 일본 국회에서 열린 중의원 예산결산위원회의 기록에 당시 질문한 사람은 사회당의 마츠우라 의원이었다. 일본 통상대신이었던 나카소네 전 총리에게 "한국의 민생 안정을 위하겠다면서 이렇게 비싸게 객차를 팔아도 되냐"고 수차례 지적한다.

이렇게 일본 기업들이 한국에 납품한 객차는 186량, 총액 118억엔이었습니다. 한 객차당 6500만엔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도쿄 지하철에 납품한 객차는 3500만엔인 것으로 드러났다. 사실상 2배 가까이 폭리를 취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서울지하철 사업은 이후 미국에서도 논란이 됐다. 당시 미국 국회로 들어간 우리 정부의 로비 자금이 서울지하철을 수주한 미쓰비시 계좌 등을 통해 흘러간 정황이 포착됐기 때문이다. 실제 미쓰비시 상사 대표는 1977년 일본 국회 청문회에서 서울지하철의 납품가를 빼돌렸고, 일부는 한국 정부에 뇌물로 줬다고 밝혔다.

당시 일본 언론에 따르면 미쓰비시 등 일본 기업들이 서울지하철 사업에서 빼돌린 액수만 22억엔. 애초 한국이 지출하기로 한 객차 예산의 4분의 1에 달했다. 이번 아베 정권의 일본 경제침략에 대해 일본 지식인들과 함께 규제 철회를 주도했던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반성과 사죄에 의한 경제협력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일본 기업들은 돈벌이 수단으로…일종의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기회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고리로 돈 빌려주고…"일본 물자 구입 조건" 족쇄

서울지하철 건설에 투입된 일본 차관은 다시 전범기업들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당시 일본이 제공한 차관을 쓰기 위해서는 일본에서 생산된 특정 품목을 구입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화학과 플라스틱 제품이 대표적이다. 이 품목들은 지금도 일본 수입의존도가 가장 높은 품목들로 꼽힌다.

1972년 일본과 맺은 서울지하철 건설을 위한 차관계약서다. '차관을 일본의 물자와 용역을 위해 쓴다'고 돼있다. 돈은 빌려주지만 일본에서 만든 물건과 용역만 써야 된다고 못박은 것이다. 처음에는 공개 경쟁입찰이라더니 철강재 등은 전범기업 미쓰비시와 수의계약을 했다.

기술이전 약속도 어겼다. 기술용역에 우리 업체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로 계약해놓고, 뒤늦게 말을 바꿨다. 결국 우리는 기초적인 하청 작업에만 참여했다. 당시 일본이 빌려준 돈의 이율은 4.125%다. 2년 뒤 미국 차관의 이자보다 1% 넘게 높았다.
고금리로 돈을 빌려주면서도, 화학재료와 플라스틱 등 16개 핵심 품목들은 일본에서 사는 조건을 걸었다. 일본이 당시 정했던 화학·광물·플라스틱·비금속 등은 지금도 일본 수입의존도가 90%를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목재류는 70%, 방직용 섬유의 일본 수입의존도는 60%가 넘는다.

이듬해인 1973년 열린 일본 국회 중의원 예결위. 아베 스케야 일본사회당 중의원이 "우리는 36년 동안 한국의 땅과 생명을 빼앗았다"며 "지금도 일본의 검은 안개가 한국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검은 안개'는 비리와 부당한 이득을 뜻한다. 일본이 한국을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제협력이라는 허울 좋은이름으로 뒤에서 부당한 이익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환경문제로 공장 못 세운 전범기업…'공해산업' 떠넘긴 정황

일본이 건넨 8억 달러 가운데 3억 달러는 무상 경제협력기금이었다. 무상 기금이 가장 많이 투입된 곳은 포항종합제철, 지금의 포스코다. 그런데 원래 일본은 무상 기금으로 포항제철 건설에 부정적이었는데 갑자기 협력하겠다고 돌아섰다.  취재진이 입수한 당시 문건에 일본의 검은 속내가 드러나 있다. 당시 일본에서 환경문제로 공장을 짓기 어렵게 되자 포항제철로 활로를 뚫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1970년 한일협력위원회 총회 문건이다. 일본 측은 철강, 알루미늄 등의 공업을 위한 토지 이용과 관련해 공해 대책에 협력할 수 있는지 한국 측에 묻는다. 공해 물질이 나오는 공장이라도 받을 수 있냐는 것이다.

[최영호/영산대 교수 (국제학연구소장) : 60년대 말부터 환경, 일본의 제조업이 발달하면서 환경문제가 계속 일어나게 되거든요. '가급적 공해산업을 한국 쪽에 넘겨주는 것이 좋다.']

실제 1950년대와 60년대 일본은 중금속 오염병인 이타이이타이병과 미나마타병으로 환경 오염 문제가 극심했다. 당시 제철소나 화학공장 등을 늘리는 것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컸다. 이는 일본 니가타대학 논문에서도 다뤘다.

제철업이 폐수가 많이 나오는데다 생산량이 넘친다고 판단해 일본이 한국 같은 제3세계에 수출했다는 것이다. 실제 한국과 일본이 포항제철 건설에 동의한 것도 1969년 말이다. 전체 청구권 자금의 15% 수준인 1억1948만 달러를 투입하는 협약을 맺었다.

무상 협력기금 용도를 농업 분야로 국한했던 일본 정부가 갑자기 포항제철 건설에 동의해준 것이다. 포항제철 건설은 당시 이를 수주했던 신일본제철과 미쓰비시상사 등 전범 기업에게도 큰 이익을 안겨줬다.

[배석만/고려대 교수 (민족문화연구원) : (일본 기업들이) 막대한 이익을 남겼을 거예요. 당연히. 엄청나게 큰 물량이니까. 그러면 당연히 이런 관련 회사들은 군침을 흘렸겠죠.]

당시 한국이 일본기업으로부터 사들인 설비 금액만 해도 1억7765만달러로, 지원 자금보다 50% 가량 많다.

"일본과 겹치는 산업 육성 안돼"…'야쓰기 안'에 담긴 일 속내

한·일협력위원회라는 생소한 단체가 등장한다.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 이후 일본의 8억달러를 어디에 쓸지 공식적으로 논의한 것이 '한·일각료회의'다. 그런데 포항제철 사례처럼 민감한 부분을 한·일 정재계 권력자들이 모여서 논의한 곳이 '한·일협력위원회'였다.

1968년 11월 한·일협력위원회를 만들기 위해 일본 대표단이 한국을 방문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이 문제를 협의한 인물이 한·일협력위원회의 초대 회장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외할아버지로 전쟁 당시 만주국 A급 전범으로 기소돼 실형을 살았던 인물이다. 기시 전 총리가 이끌었던 협력위는 한국과 일본의 정치와 경제 문제에 깊숙이 개입했다. 한·일협력위원회 문건에는 일본의 속내가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기시 전 총리의 심복이었던 야쓰기 가즈오가 제시했던 경제협력방안, 일명 '야쓰기 시안'을 둘러싼 논의가 대표적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중화학과 같이 일본과 겹치는 산업을 키우면 안 된다는 언급이 나오는 등 한국을 하청기지처럼 보는 시각이 담겨 있었다.

1970년 4월 2차 한·일협력위원회 총회를 앞두고 일본 측이 제시한 장기 경제협력방안, 일명 '야쓰기 안'으로 한국의 포항 남쪽 공업지역과 일본의 돗토리, 야마구치에서 기타큐슈, 오이타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한·일 협력 경제권을 만들자는 것이다.

한국에서 관세를 면제해주는 보세 지역과 자유항을 늘리고, 일본 제품을 가공해주는 합작회사를 세우자는 것으로 일본의 기술력과 한국의 노동력을 결합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시아 '유럽경제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장밋빛 전망도 나온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 열린 일본 측 소위원회에선 우려들이 등장한다. 한국이 중화학 공업에 주력하면 일본 산업과 경쟁이 우려된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한국이 석유화학과 같이 기술, 자금이 들어가는 산업에 치중하는 것이 맞냐는 문제도 제기한다.

당시 한국 측에서도 일본 산업의 하청자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나왔다. 또, 일본은 중공업, 한국은 경공업이라는 식의 오래된 분업론을 그대로 적용시키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당시 언론에서도 "한국 경제를 일본의 하청계열화 체제로 몰아넣을 위험성이 있어 우리 나름의 방안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영호/영산대 교수 (국제학연구소장) : 완제품 공장에 대해서 기초 소재를 대주는 일본의 중소기업들이 (한국 공장들과) 연루된 거죠. (한국이 일본에) 하청하는 구조가 1970년대 중반 정도부터 형성됐다고 봐야죠.]

무상원조와 달리 차관 형태로 들여오는 유상원조는 오히려 공여국의 이득에 기여한다는 비판이 있는데, 일본이 유상원조를 가장 많이 하는 국가 중 하나다.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상업차관 3억 달러를 제외한 일본이 제공한 배상금 5억 달러 중에서 유상 차관이 2억 달러에 달하는 것도 일본 기업의 진출로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실제로 일본 배상금 5억 중 1억2000만 달러가 투입된 포항제철 건설도 일본은 농업용 자금이라면서 용도 변경을 반대했으며, 소양강댐 건설 자금 290억 원 중 104억 원(2160만 달러)은 일본이 이자를 받는 유상차관이었다. 무상원조마저도 현금지급이 아니라 일본의 플랜트를 구입하는 데 주로 사용하도록 용도를 지정해놨다. 게다가 일본은 그나마도 억지주장을 하면서 배상금을 깎으려고 했다.

일본이 한반도에 남겨둔 재산이 많다면서 한국에 보상금을 요구하는가 하면, 원양어선 도입자금도 삭감을 주장하기도 했다. 일본은 동남아의 다른 피해국과도 비교해도 한국에 매우 인색했다.

우리나라가 '한강의 기적'을 일궈낼 수 있었던 '마중물'은 일본이 아니라 미국에서 나왔다. 특히 한국의 경제개발 기초가 됐던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계획이 시작된 1962년부터 10년간 한국이 도입한 해외 공공차관의 61%가 미국이 지원한 원조금이었다.

일본이 최근 주장하는 "일본이 한국 및 아시아 경제개발을 도왔다"는 논리는 엉터리인 셈이다. 더구나 당시 일본의 한국 유상차관 제공은 경제적 부담이 커졌던 미국의 압력이 작용한 때문이었다. 한일청구권 협정에서 어떻게든 배상금을 깎으려고 애썼던 일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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