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레스님’ ‘미치광이 중’을 자처하며 파격으로 일관하며 사신 분입니다

걸레 같은 인간

한 때, 걸레스님 중광(重光 : 1934~2002)이 한 시대를 풍미(風靡)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속명은 고창률(高昌律)이며, 제주도에서 태어났지요. ‘걸레스님’ ‘미치광이 중’을 자처하며 파격으로 일관하며 사신 분입니다. 1960년 26세 때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로 출가하였으나 불교의 계율에 얽매이지 않는 기행(奇行) 때문에 1979년 승적을 박탈당하였습니다.

중광스님 구굴 사진 갈무리

그러나 선화(禪畵)의 영역에서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하여 명성을 얻었고, 한국보다 외국에서 더 높게 평가받았습니다. 1977년 영국 왕립 아시아학회에 참석해 <나는 걸레>라는 자작시를 낭송한 후 ‘걸레스님’으로 불렸습니다. 1979년 미국 버클리대학교 랭커스터 교수가 펴낸 책『광승(狂僧)』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으며, 그로부터 ‘한국의 피카소’로 불리기도 하였지요.

중광 스님은 막걸리 통에 소주를 담아 마시는 등, 과도한 음주와 줄담배로 건강이 나빠지자

1998년 강원도 설악산에 있는 백담사로 들어가 선수행하며 달마(達磨) 그림에 몰두하였습니다. 백담사의 오현(五鉉) 스님으로부터 ‘바위처럼 벙어리가 되라’는 뜻의 ‘농암(聾庵)’이라는 법호(法號)를 받았고, 2000년부터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의 ‘벙어리 절간’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달마도 그리기에 열중하였습니다.

그리고 2000년 10월 서울 ‘가나아트센터’에서 마지막 전시회가 된 <중광 달마 전> ‘괜히 왔다 간다.’를 열었습니다. 그 후, 2002년 3월 9일 타계한 뒤 그해 3월 13일 양산 통도사에서 다비식(茶毘式)이 열렸지요. 이렇게 걸레스님 중광의 무애 행(無碍行)은 죽음의 문턱을 넘어 가면서도 자신의 무애와 파계(破戒)의 인생을 소주 한 잔 마시듯 쉽게 넘어갔습니다.

걸레스님 중광은 “나는 세속의 굴레에서 노예처럼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모든 제약에서 벗어난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며 내 생활과 내 작품 안에서 그 자유를 성취하고자 한다.”라며 하얀 도선지 위에서 춤을 추는 검은 붓 자루처럼 자유롭게 춤을 추며 일생을 산 대자유인이었습니다. 그의 시(詩), <미친 소리>와 <나는 걸레> 두 편의 시를 낭송(朗誦)해 봅니다.

<미친 소리>

나는/ 천당과 극락을/ 오른쪽 호주머니에/ 가지고 다니고/ 지옥은/ 발바닥 밑바닥에/ 가지고 다닌다./ 양심은/ 하늘에 걸어두고/ 이슬처럼 따먹는다.

<나는 걸레>

나는 걸레/ 반은 미친 듯 반은 성한 듯/ 사는 게다/ 삼천대천세계는/ 산산이 부서지고/ 나는 참으로 고독해서/ 넘실넘실 춤을 추는 거야/ 나는 걸레/ 남한강에 잉어가 싱싱하니/ 탁주 한 통 싣고/ 배를 띄워라/ 별이랑, 달이랑, 고기랑/ 떼들이 모여들어/ 별들은 노래를 부르고/ 달들은 장구를 치오./ 고기들은 칼을 들어/ 고기 회를 만드오./ 나는 탁주 한 잔 꺽 고서/ 덩실 더덩실/ 신나게 춤을 추는 게다.

어떻습니까? 대자유인의 삶이요! ‘비단’은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물건은 아닙니다. 그러나 더러운 것을 닦아 내는 ‘걸레’는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하지요. 어리석은 중생(衆生)은 인연을 만나도 인연인줄 알지 못하고, 범부(凡夫)는 인연인 줄은 알아도 그것을 살리지 못하며, 불보살(佛菩薩)은 소매 끝만 스친 인연도 그것을 살릴 줄 아는 것입니다.

19세기와 20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와 ‘파불로 피카소’ 이 두 화가 중, 누가 더 뛰어난 예술가인지를 판단하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누가 더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명백합니다. 19세기의 고흐는 생전에 단 한 점의 그림도 팔지 못해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 좌절을 거듭하다가 결국 37세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러나 피카소는 살아생전에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대접받으며 부유와 풍요 속에서 90세가 넘도록 장수했지요. 도대체 무엇이 두 화가의 인생을 갈라놓았을까요? 수많은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많은 경영학자들은 ‘인간관계의 차이’를 중요한 요소로 꼽았다고 합니다.

인생을 실패하는 가장 큰 원인은 ‘인간관계’라고 합니다. 고흐는 사후에 피카소를 능가할 만큼 크게 이름을 떨친 화가입니다. 고흐가 남겨놓은 걸작들이 피카소의 그림보다 훨씬 더 값이 더 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고 난 뒤의 성공이 살아생전의 성공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살아생전에 고흐는 불쌍했고 피카소는 행복했습니다.

옛 경전에서는 ‘진정한 친구’를 ‘붕(朋)’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붕’은 ‘우(友)’하고는 다릅니다. 진정한 벗인 ‘붕’이 되려면, 첫째, 나이를 따지지 않고(長), 둘째, 직업의 귀하고 천함을 따지지 않으며(貴), 셋째, 집안의 배경을 따지지 않아야 한다(兄弟)는 것이 경전의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훌륭한 인간관계가 가져다주는 장점은 무엇일까요? 하나는 질 높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둘은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셋은 인간관계가 일종의 권력이라는 것입니다. 걸레스님 중광은 비록 기행으로 승적을 박탈당했지만, 그는 이미 ‘심무과애(心無罣礙) 무과애고(無罣礙故)’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는’ 대자유인의 경지에 오르셨던 분이 아닌가요?

대자유인이란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마음껏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쓰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걸리고 막힘이 없이 사는 사람지요. 그러나 자유인이 하루아침에 되지는 못 합니다. 그럼 대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수행을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수행은 훈련입니다. 우리도 생사거래에 걸리지 않는 대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훈련은 심신의 수행입니다. 수행은 기질을 변화시켜 인간개조의 대혁명을 가져오게 하는 요소입니다. 결국 ‘비단’ 같은 사람보다는 인간관계에 ‘걸레 같은 인간’이 되면 어떨 까요!

단기 4352년, 불기 2563년, 서기 2019년, 원기 104년 8월 28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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