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맹상제(寬猛相濟)

너그러움과 엄격함의 조화를 이룬다.

춘추시대 정나라의 공손교(公孫橋)는 자(字)가 자산(子産.-흔히 정자산으로 많이 알려진 정치가다)인데 당시로서는 혁신파 정치가라 할만 했다. 정나라에서 집권 10여 년 동안 그는 완고한 수구세력을 타파하는 데 힘을 쏟았다. 충성과 근검을 강조하고 ‘사치’를 반대했으며, 토지 제도와 군사 제도를 개혁했다. 법을 통해 특권을 제한하고 정치의 기강을 바로잡았다. 작고 보잘 것 없던 정나라의 국력은 크게 증강되었고 국위도 높아졌다. 정자산이 정치 통치술로 실행한 것은 바로 이 ‘관맹상제’라는 계책이었다. 이러한 자산의 공적은 봉건시대 통치자들에 의해 높이 평가받았다.

‘너그러움과 엄격함의 조화‘를 뜻하는 ’관맹상제‘, 이 말은 기원전 522년인 ’좌전‘ ’소공(昭公)‘ 20년조에 나온다.

정나라 자산이 병이 났다. 자산은 대신인 자대숙(子大叔)에게 당부했다.

“내가 죽으면 그대가 정치를 맡게 될 것이 틀림없다. 덕 있는 자만이 너그러움으로 백성을 따르게 할 수 있다. 그 다음은 엄격함으로 대하는 것이 상책이다. 대저 불이 뜨거우면 백성이 이를 보고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불 때문에 죽는 자는 드물다. 물이란 약해 보이므로 사람들이 업신여겨 물장난을 하다가 죽는 자가 많다. 그러므로 너그럽게 다스리기란 어려운 일이다.”

정자산은 백성을 통제할 때 지나치게 엄해도 지나치게 너그러워도 좋지 않다고 했다. 지나치게 엄격하면 백성들이 무서워하고, 지나치게 너그러우면 게을러지기 쉽다. 그러나 우선은 너그러워야 하고, 그 다음에 엄해야 한다. 너그러움은 엄격함에 비해 훨씬 장악하기 힘들다. 자산이 죽은 다음 집권한 자대숙은 ‘엄격함’을 버리고 ‘너그러움’으로 정치를 했는데, 사회가 이내 혼란에 빠지고 도적이 벌떼같이 일어났다. 그는 그제야 엄격하게 다스려야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노나라의 공자는 이 이야기를 듣고는 “훌륭하도다! 정치가 너그러우면 백성이 게을러지는데, 게을러지면 엄격함으로 바로잡는다. 엄격하면 백성이 잔인해지는데, 잔인해지면 너그러움을 베푼다. 너그러움과 엄격함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바로 정치다”라고 감탄했다. ‘공자가어(孔子家語)’ ‘정론해(正論解)’에도 거의 같은 대목이 있다.

이러한 공자의 통치 이론은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 군주‧장수‧재상들에 의해 떠받들어져왔다. 통치 책략으로서 엄격함과 너그러움의 결합은 지금도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지도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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