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해독

이 세상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고기 눈(魚眼)으로 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마음으로 봐야 하는 것이지요. 마음이 다른 곳에 있으면 눈으로 본다고 해도 잘 보이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고민과 괴로움이 있기 마련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의 삶을 잘 살펴보면 은혜(恩惠)로운 삶보다 고통스러운 삶이 더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은혜란 즐겁고 기쁘고 발전적이고, 내가 복을 받는 것이 은혜이며, 해(害)는 괴롭고 손실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와 해독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느끼는 것입니다.

소태산(少太山) 부처님은 이 세상을 '은혜'로 보았고, 서가모니부처님께서는 '고해(苦海)'로 보셨습니다. 같은 성자의 눈으로 봤지만 보기에 따라서 다른 것인데 이세상은 고해도 있고 은혜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은혜도 나오고 해도 나오게 되는 것이지요. 이 세상은 은혜와 해로 인해서 4가지 결과가 생깁니다.

은혜에서 은혜를 낳고, 은혜에서 해를 낳고, 해에서 해를 낳고, 해에서 은혜를 낳는 것입니다. 지난 8월 30일자 각 언론에서는 <시간강사 해고 대란은 현실이었다. 강사 법 시행 앞둔 1학기 4704명 실직> 이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우리 원불교의 교리 중의 하나가 ‘은혜가 해에서 나온다.’는 은생어해(恩生於害)와 ‘해가 은혜에서 생겨난다.’는 해생어은(害生於恩)입니다.

우리는 흔히 은혜를 베풀면 은혜가 나오고, 해독을 끼치면 해독이 나온다는 고정관념을 갖기 쉽습니다. 그러나 상대적 현상세계에 있어 은과 해는 반복되기도 하지만 교차하기도 합니다. 아마 종교계에서 이런 <은생어해 해생어은>의 교리를 가진 종교는 거의 원불교가 유일할지도 모릅니다.   

대학 시간강사의 법적지위 보장과 처우 개선을 주된 내용으로 담은 고등교육법(강사법) 개정안이 작년에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법 제정 후 7년간 시행이 미뤄져온 시간강사의 법적 지위 보장이 올해부터 현실화 된 것이지요.

그런데 대학 시간강사에게 교원 지위를 보장하고, 사실상 3년간 임용을 보장하는 강사 법 시행의 은혜가 지금 완전이 해독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이달 초부터 시행된 강사 법을 앞둔 올 1학기 각 대학에서 일자리를 잃은 시간강사는 7800여 명으로 나타났습니다.

4년제 대학에서는 총 5497명이, 전문대에서는 2421명이 강사 자리를 잃은 것입니다. 이 가운데 4700여 명은 전업강사였습니다. 이들에게는 완전히 은혜로 시작한 강사법이 생계를 빼앗은 해독으로 변한 것이지요.

고부갈등의 원초적 잘못을 남편의 중간 역할에서 찾는 이들이 많습니다. 시어머니 앞에서 아내 편을 들거나 칭찬을 하는 것이 은혜같이 보이지만 ‘해’로 나타낼 경우도 많지요. 그리고 중고교에서 왕따의 최고 공헌자가 담임선생일 경우도 예외는 아닙니다.

학생들 앞에서 특정 학생을 공개적으로 칭찬하는 것은 은혜같이 보이지만, 칭찬받은 그 학생을 왕따로 보내는 지름길입니다. 그러니까 칭찬은 무상보시(無相報施)여야 합니다. 보시는 과수에 거름을 하는 것 같아서 과수 위에다가 흩어 준 거름은 그 기운이 흩어지기 쉽고 잘못 주면 과수를 죽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독이 없는 약이 없고 약 되지 않는 독은 없습니다. 남용하면 약이 독으로 변하고 신중하면 독이 약이 됩니다. ‘은혜와 해독’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베풀 때는 은혜가 해가 되는 일은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덕화만발 가족이 멋지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첫째, 해에서 은혜를 발견하고 생산할 수 있도록 살아야 합니다.

해에서 해를 만들면 돌고 돌아 자신만 고달픕니다. 원망을 하기 시작하면 한이 없는 것으로 은혜와 해독이 변할 때, 은혜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둘째, 은혜에서 은혜가 나와야 합니다.

나에게 잘못하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잘하는 사람으로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현재에 감사하며 복을 짓고 봉사를 할 때 나에게 은혜가 돌아오지요.

셋째는, 해생어은이 가장 큰 공부입니다.

우주를 움직이는 것은 인과의 법칙입니다. 해에서 은혜를 생산하는 것은 인과를 알아 감사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중생들은 열 번 잘 해준 은인이라도 한 번만 잘 못하면 원망으로 돌립니다. 그러나 도인들은 열 번 잘못한 사람이라도 한 번만 잘하면 감사하게 여기지요. 우리 해에서도 은혜를 발견하여 평화와 안락을 불러 오면 어떨 까요!
단기 4352년, 불기 2563년, 서기 2019년, 원기 104년 9월 3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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