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애자의 소설-<딱새의 성> 제10회

인영의 냉담하고 단호함에도 그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누나가 이 근처의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이들 때문이라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어쨌든 저하고는 상관없는 듯합니다. 죄송합니다.”

자리에 일어나 돌아서려 할 때였다.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등 뒤에서 한숨과 함께 들려온 목소리였다.

연극의 주인공? 자신은 주인공과는 거리가 먼 인생이다. 학창시절의 영자를 따라 다니며 가방이나 들어주는 시녀와 같은 존재! 지금까지 영자의 시녀로 살고 있듯, 그것이 자신의 타고난 운명처럼 여겨졌었다. 영자의 가방을 들어주고 미술도구나 챙겨주는, 그저 황후를 돋보이게 하는 엑스트라가 자신에게 어울렸다. 주인공은 언제나 최고를 구가하는 영자와 같이 언제나 세상의 주목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많이 배우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소유한 잘난 선남선녀들!

왠지 ‘주인공’은 자신에게 낯설고 어울리지 않는다. 주인공이라니! 무척 생소하게 들리는데 이 사람이 자신에게 억지춘향의 쇼를 하는 듯하다.

‘자신의 자리를 찾으셔야죠. 진정 하고 싶은 일은 연극이 아니었소!’ 하고 암시하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자신의 잠재적인 모든 것, 마음의 비밀의 방을 훔치는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안개 같은 몽롱함에 휩싸인다. 정의식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자신의 연극적인 기질을 꿰뚫고 있었다.

가까스로 혼란스런 마음을 다잡고 집에 돌아와 보니 두고 온 휴대전화에 문자메시지가 떠있었다. 바로 영자로부터 온 것이다.

‘파티 장 개업일에 긴히 의논할 일도 있으니 꼭 참석해주기 바란다. 금요일 오후 7시에 차를 보내마.’

휴대전화를 닫으며 영자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을 챙겨주고 어떤 조직 속의 우두머리처럼 부하를 배려하는 의리가 있었다.

‘영자는 왜 하필이면 나를 불러 그 일을 맡기는 것일까! 잡부들도 많을 텐데, 하필 가난하고 별 볼일 없는 나에게 다가오는 저의가 무엇일까? 아마 영자는 나에게 경쟁을 초월한 듯 낙천적이고 느슨한 성격에 끌렸을 것이다. 영자 쪽에서 보면 나는 수준이 맞지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영자는 나를 계속 찾았다. 최고가 되어야 직성이 풀리며 악바리처럼 매사에 곤두세우는 영자와는 달리, 나의 여유로운 큰 공간을 공유하고 싶어서일까. 사람들은 서로 상반되는 것에 끌리고 매력을 느낀다. 마치 내가 영자를 대단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영자도 나를 좀 부러워하는 구석이 있어서일까!’

인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머릿속에서 그 저의를 더듬거렸다.

‘나는 그저 인덕이 있는 사람.’

이렇게 여기니까 열등감이 사라지고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화창한 봄날의 학교의 점심시간이었다. 인영과 영자는 각자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꺼내어 펼치기 시작하였다. 인영은 단무지와 신 김치가 반찬의 전부였다. 하지만 영자는 윤기 있는 쌀밥에 쇠고기 장조림과 계란말이, 참기름을 듬뿍 넣은 시금치나물, 멸치볶음으로 언제나 진수성찬이었다.

영자는 짝꿍인 인영에게 그 반찬을 자신과 함께 먹게 하였다. 영자의 남은 반찬을 처리하는 동안, 영자는 창가에 다가가서 소니 이어폰을 끼고 영어회화나 팝송을 중얼거렸다. 점심을 다 먹고 나면 인영은 모여 든 친구들에게 소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고정멤버들인 그들은 인영의 이야기에 빨려들곤 하였다.

『폭풍의 언덕』의 그 애달픈 사랑의 얘기를 들려줄 때, 그들은 숨을 죽이며 귀를 기울였다. 『닥터 지바고』의 이야기를 해줄 때, 여학생의 특유한 감수성으로 로라의 운명에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인영은 그들을 울리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는 그야말로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그녀는 오직 소설 속에 신바람을 일으켰다. 이런 장점이 있어 영자의 품위에는 손색이 없다고 여겼는지 모른다.
haj20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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