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애자의 소설-<딱새의 성> 제14회

다음날 찬란한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밤새 정의식과 영자의 사업에 뒤척이었는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오늘은 여유 있게 좀 쉬고 싶었다. 인영은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밖의 풍경은 신선하다.

저 멀리 월드컵 공원의 숲이 보인다. 오늘 할 일은 저쪽 가로수 건너편에 자리 잡은 친정에 가서, 아이들을 데려오는 일이다. 오월의 신록의 계절에 가까운 공원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산책하려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 정의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는 매우 담담한 어조로 내일부터 아이들을 그 주변의 ‘푸른 유치원’에 맡기게 되어 있다, 자가용으로 내일 열 시에 데리러 갈 것이다 하며 주소를 묻고 집의 위치를 물었다.

“꼭 연극을 함께 하셔야 합니다!”

그의 마지막 말에는 힘이 있었다. 그것은 삶의 강렬한 배터리처럼 전율하며 다가왔다. 마치 그가 남편인 것처럼 어떤 거역할 수 없는 분위기로 내닫고 빨려 들어갔다. 참으로 알 수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의 질문에 움츠러들 듯 거역할 수 없듯이, 집 주소와 위치를 차분히 알려주었다. 그런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고 평온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무슨 근거로 그 남자를 신뢰하고 있는 것일까.

파티 홀에서 그윽이 바라보았던 잘생기고 정감어린 모습이 떠오른다. 인영은 자신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다음날 오전 열 시의 약속장소에 바다와 별을 데리고 도착하였다. 놀이터는 운전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렸으나 정의식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쓸쓸함이 밀려왔다. 그가 보낸 운전기사는 오십 줄의 남자로서 인영에게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대하였다. 승용차는 서서히 마을을 벗어났다.

날씨는 오월의 신선한 바람과 함께 계절의 여왕처럼 찬란하였다. 약국을 지나고 빵집을 통과하고 마을 노인정이 나타났다. 노부부가 햇볕을 쬐며 다정하게 웃으며 대화하는 모습이다. 노인정에서는 노인들이 장기를 두고 있었다.

한쪽에는 빨간 스카프를 두른 할머니와 베이지색 모자를 쓴 할아버지가 수첩을 보며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마 내일모레가 기일이라는 등, 경비가 얼마정도 든다는 등, 현실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다. 차는 점점 빨라지고 아이들은 오랜만에 드라이브를 즐기듯 들떠 있었다.

“아이들이 참 얌전하고 귀엽습니다.”

기사가 흘끔거리며 인영에게 말을 붙였다.

“사실 오늘 단장님이 직접 모시려고 했는데 갑자기 중요한 연극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지요. 저에게 잘 모셔오라는 신신당부를 하셨습니다. 앞으로 이 차로 아이들을 유치원 운행에 각별히 신경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같이 연극 하십니까? 그런데 원장님과 무슨 관계세요?”

“저도 모릅니다. 왜 제가 이렇게 가고 있는지.”

“단장님의 애인?”

“전혀 아닙니다.”

“아, 죄송합니다. 이상하게 단장님과 어울려 보이는군요!”

그는 감춰둔 애인이라는 스릴감을 느끼며 자신의 일처럼 설레고 있었다.

“정의식 단장님, 참 좋은 분이죠!”

어느덧 차는 주차장에 진입하였다. 차에서 내려 둘러보니 사방이 작은 관목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가운데 위치한 층계로 올라가 정원이 달린 큰 건물로 향하였다. 입구에는 ‘푸른 유치원’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는, 5층 정도 되는 단독 주택모양으로 꽤 고급스럽게 지어진 대리석 건물이었다. 오른쪽으로 둘러진 담 벽에는 장미꽃이 만개하여 피어 있었고, 그 밑에는 연못이 둘러져 있고 붉고 푸른 물고기들이 노닐고 있었다. 꽤 고급스러운 분위기였다. 이곳 유치원은 부유층 자제들이 다니는 고가의 유치원이라고 기사가 말했다.

“자, 이쪽으로 오세요!”

텔레비전에서 가끔 보았던 사십대 후반의 연예인이 자신을 원장이라고 소개하고 길을 안내했다.

‘정보라.’

드라마에서 깔끔한 이미지로 조용하고 개성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던 배우였다. 그녀는 중년 여성의 심리를 잘 표현하였고 왠지 호감과 친근감을 느낄 수 있어, 인영은 그녀의 연기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녀는 시종 웃는 모습으로 인영과 아이들을 대하였다. 원장은 안내하는 곳에 이르니, 복도 통로를 지나서 중앙의 다목적실로 중간 크기의 방이 있었다. 그곳에 들어서자 여섯 명의 아이들이 한 명의 지도교사를 두고 찰흙으로 뭔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바다와 별이 신기해하는 모습을 보고 지도교사가 빙그레 웃으며 맞아주었다.

“너희들도 함께 하고 싶니?”

지도교사는 자리를 하나 더 만들고 재료를 나누어 주었다. 그러자 바다와 별은 신나는 표정으로 흙을 만지고 주물럭거리면서 함께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인영과 원장은 아이들을 그곳에 두고 바로 옆에 위치한 응접실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차를 마시며 중앙의 탁자에 마주앉았다. 정감이 가고 낯설지 않고 부담스럽지 않은 것이 기이할 정도다. 볕이 잘 들고 창밖에서는 상쾌한 아카시아 꽃바람이 불어왔다. 인영은 깊이 심호흡을 하였다. 긴장이 좀 풀리는 듯하였다.

“우리 의식은 아직도 철이 없어요. 그저 순수한 것만을 너무 동경하고 있지요. 장가갈 나이도 지났는데 정말 걱정입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았나요?”

무의식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반응하였다.

“올해 마흔입니다.”

인영은 내심 놀랐다. 그러면서 기쁨과 함께 어떤 소망과 같은 희망의 바람이 강하게 불어왔다.

“독신주의자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아마 마음에 드는 상대가 있으면 당장 결혼할 것입니다.”

원장은 찬찬히 인영을 살펴보더니 호감어린 표정을 지었다.

“정말 연극의 주인공과 딱 어울리는 분위기군요!”

haj20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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