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스센터 19층에서 내려다 본 덕수궁 전경/사진=심종대 기자

[뉴스프리존=심종대 기자]덕수궁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크게 두 차례 궁궐로 사용됐다. 덕수궁이 처음 궁궐로 사용된 것은 임진왜란 후 피난 갔다 돌아온 선조가 머물 궁궐이 마땅치 않아 월산대군의 집이었던 이곳을 임시궁궐로 삼으면서부터이다. 이후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정릉동 행궁에 새 이름을 붙여 경운궁이라 불렀다. 경운궁이 다시 궁궐로 사용된 것은 조선 말기 러시아공사관에 있던 고종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부터이다.

조선 말기 전국은 몹시 혼란스러왔다. 개화 이후 물밀 듯 들어온 서구 열강들이 조선에 대한 이권 다툼이 치열해지면서,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돌아와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새로 환구단을 지어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대한제국 선포는 조선이 자주국임을 대외에 분명히 밝혀 정국을 주도해나가기 위한 고종의 선택이자 강력한 의지였다. 대한제국의 위상에 맞게 경운궁의 전각들을 다시 세워 일으킨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고종 당시의 궁궐은 현재 정동과 시청 앞 광장 일대를 아우르는 규모로 현재 궁역의 3배 가까이에 이르렀다.

하지만 고종의 의지의 시도는 일제에 의해 좌절되고, 고종은 결국 강압에 의해 왕위에서 불러나면서부터, 경운궁은 ‘덕수궁’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고종에게 왕위를 돌려받은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고종에게 장수를 비는 뜻으로 ‘덕수’라는 궁호를 올린 것이 그대로 궁궐 이름이 됐다. 고종은 승하할 때까지 덕수궁에서 지냈고, 덕수궁은 고종 승하 이후 빠르게 해체, 축소됐다.


사진/심종대 기자

개화 이후 서구 열강의 외교관이나 선교사들이 정동 일대로 모여들면서 덕수궁도 빠른 속도로 근대 문물을 받아들였다. 덕수궁과 주변의 정동에는 지금도 개화 이후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건립된 교회와 학교, 외국 공관의 자취가 뚜렷이 남아 있다. 덕수궁이 다른 궁궐들과 달리 서양식 건축을 궐 안에 들인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고종 당시의 면모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덕수궁에는 저마다 사연을 안은 유서 깊은 전각들이 오순도순 자리하고 있다. 석어당에서 석조전에 이르는 뒤쪽에는 도심의 번잡함을 잊게 하는 호젓한 산책로도 있다. 파란만장한 근대사의 자취를 기억하는 덕수궁은 서울에서 손꼽히는 산책로 정동길과 함께 도심의 직장인과 연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 황제의 자존심을 보인–외전 ‘근대의 문을 열다’  

고종을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덕수궁(당시 경운궁)을 다시 세워 일으키면서 대한제국의 위상이 깃들도록 정성을 쏟았다. 정전인 중화전 천장에 용 문양이나 기단부 계단 중앙에 답도에 새긴 용 문양, 황색으로 칠한 창호 등이 그 예이다. 중화전도 궁궐의 위용을 갖춰 중층으로 지었으나 1904년 큰 불이 난 뒤 다시 지으면서 단층으로 축소됐다. 중화전 마당을 감싸도록 중화전 마당 둘레에 지은 행각들도 지금은 대부분 사라지고 약간의 형태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사진/심종대 기자

경복궁의 광화문, 창덕궁의 돈화문, 경희궁의 흥화문이 그렇듯이 모든 궁궐의 정문은 남쪽에, 그리고 백성을 교화한다는 의미를 담은 ‘화’자를 이름에 넣었다. 덕수궁의 본래 정문인 ‘인화문’도 정전의 정문인 중화문 앞 남쪽에 있었다. 대한제국 출범 직후 환구단이 건설되고 궁궐의 동측이 도시의 새로운 중심이 되면서 원할한 기능 수행을 위해 덕수궁의 동문인 ‘대한문(본래 이름 대안문)’을 정문으로 사용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중화전 건립으로 편전으로 쓰인 즉조당과 석어당은 덕수궁에서 가장 유서 깊은 곳이다. 선조가 임시로 거처했을 때부터 사용됐다. 석어당은 덕수궁 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층 전각이다. 1904년 화재로 소실됐으나 다시 중건 됐다. 다른 전각과 달리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고, 아래층에는 고종 어필의 현판이 걸려 있다.

# 황후의 침전이 없는-내전, ‘그래도 지켜낸 궁궐’ 

선조 당시에는 임시 궁궐로 사용됐기에 부득이 격식을 갖추지 못했지만 고종 때에는 궁궐의 영역도 한껏 넓어지고 규모와 격식도 제대로 갖췄다. 한일병합 이후 덕수궁의 전각과 부지를 조금씩 허물어내던  일제는 고종 승하 후 덕수궁을 본격적으로 해채해 나갔다.


사진/심종대 기자

1931년에는 궁궐을 아예 상가 부지로 매각하려다 반대 여론이 거세게 일어나자 한발 물러나 외전과 내전의 주요 전각을 남긴 상태로 공원화해 1933년 일반에 개방했다. 오늘날 덕수궁에 남은 전각들은 그렇게 지켜졌다.

내전의 주요 전각인 함녕전은 고종의 편전이자 침전으로 사용됐고, 고종이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다른 궁궐과 달리 덕수궁에 황후의 침전이 따로 없는 것은 명성황후가 승하한 뒤, 고종이 다시 황후를 맞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후의 침전을 대신한 것은 명성황후의 신주와 위패를 모신 경효전이었다. 경효전은 1904년 대화재로 인해 소실되고 그 자리에 덕홍전이 세워졌다. 덕홍전은 외국 사신을 접견할 목적으로, 외부는 한옥이지만 내부는 서양식으로 꾸몄다. 덕홍전에서 정관헌으로 이어지는 꽃담과 꽃담에 낸 무지개 모양의 유현문은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었던 두 전각의 분위기와 화사하게 잘 어울린다.

# 고종이 사랑한-석조전과 정관헌 ‘덕수궁의 서양 건축’


사진/심종대 기자

석조전은 대한제국의 대표적인 서양식 건축으로 1910년에 완공됐다. 석조전은 지층, 1층과 2층, 총 3개의 층으로 구성됐다. 석조전 지층은 주방, 창고 등이 있어 시종들의 공간으로 사용됐고, 1층은 황제를 만나는 접견실과 식당이 있는 황실의 공적 공간이었고, 2층은 황제의 침실과 서재 등으로 황실 가족의 생활공간이었다. 석조전은 1919년 고종이 승하 후 덕수궁이 훼손되는 과정에서 일본의 미술관 등으로 사용됐다. 대한제국의 역사적 의의를 회복키 위해 지난 2009년부터 복원을 시작해 2014년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했다.

정관헌은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이 설계했고, ‘조용한 세상을 바라보는 공간’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 속에서 잠시나마 여유를 가지고 생각에 잠겼을 고종의 모습이 짐작되는 곳으로, 한식과 양식을 절충해 설계한 건축물이다.  

광명문은 본래 함녕전의 정문이었으나 지금은 함녕전과 멀리 떨어진 석조전 맞은편 숲에 따로 서 있다. 석조전 서관을 미술관으로 개관할 때 흥천사면 동종과 창경궁 자격루를 전시하려고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 태조의 명으로 만든 흥천사명 동종은 조선시대 범종의 표준이 되었고, 창경궁 자격루와 신기전 기화차도 조선시대의 앞선 과학 기술을 알려주는 문화유산이다.

심종대 기자, simjd11@nac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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