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애자의 <빵굽는 여인>중  <딱새의 성> -제 17회

“그럼 일반 연극은요?”

“일반 연극도 합니다. 요즘 저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연극 속에 창조하려고 합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이요?”

“그래요. 인영 씨와 함께 공연할 <거꾸로 사는 여자>도 새로운 패러다임의 작품이지죠.”

잠시 말이 끊겼다. 가로수의 플라타너스의 잎은 싱그러운 햇살을 받아 윤기가 넘쳤다. 가지마다 강력한 생명력이 왕성해 보였다. 아이들은 비둘기 떼가 모인 곳에서 신나게 놀기 시작하였다. 두 사람은 벤치에 잠시 쉬려고 앉았다.

“전 그동안 하늘이 준 젊은 시절을 너무도 방탕하게 허비하였거든요. 그래서 속죄하듯 보답하는 양으로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뭔가 하고 싶었습니다. 아직 미비하지만 말입니다.”


왼쪽의 아스팔트 도로에는 차량이 꽤 붐볐다. 그는 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예쁘게 생겼다고 칭찬하였다. 순간 인영은 온몸이 전율하듯 떨렸다. 그것은 파티 홀에서 처음 느꼈던 것과 같은 아찔함이었다. 벤치에 앉아 의식은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이력을 펼쳐 보이기 시작하였다.

“현실은 나에게 너무나 가혹했지요. 권모술수와 배신, 폭력, 마약, 섹스,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현실의 광장에선 숨을 쉴 수가 없었지요. 저는 종일 술을 퍼마시고 내가 진정 있어야 할 광장을 찾아 해매기 시작하였죠. 때론 데모의 주동자가 되어 싸워보기도 하고 정치 운동으로 현실과 부딪혀보기도 하였지요. 진정한 광장, 내가 편히 숨 쉬며 눕고 바라 볼 수 있는 곳, 그곳을 찾아다니는 나의 노력은 헛것이 되고 너무나 미약했었죠.”

그는 이미 어마한 거인이 되어버린 현실을 어찌할 수 없었다. 체념한 상태에서 정부의 정치성을 선동하는 극단에 몸을 담았다. 그는 아무런 의지와 신념이 없이 자포자기 하듯 정부의 우수성을 찬양하는 그들의 정책에 휘말리는 줄 알면서도 빠져 들었다. 그는 정치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던 것이다. 진실보다 거짓을 포장한 저속한 문화로 대중들의 정신세계를 몰입시켰다.

정부는 국민들을 속이는 쇼를 벌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낙후된 정책을 정당화 하고 부자 되는 꿈의 길을 열어주는 것으로, 국민들의 눈길을 다른데 돌리기 시작하였다. 가난하고 우매한 서민들의 열정을 일확천금의 환상과 이벤트 행사로 돌렸다. 그는 정신없이 밤낮으로 일하였다.

그러던 그가 어느 순간 내적인 공허와 허탈감에 지쳤다. 썩은 고기를 포식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지금까지 자신이 걸치고 다녔던 권세나 명예가 거추장스럽고 무겁게 여겨졌다. 그리고 묻어두었던 정체모를 허위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이 진정하고픈 삶과는 거리가 먼, 그 반대의 삶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마침내 그는 자신을 혐오하고 온몸으로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순수한 인간으로 존재하는 일이 이토록 괴롭고 힘이 들어야 하는가! 내면의 깊은 갈등과 고민 가운데 모든 것을 버리고 강원도 산 속의 깊은 암자에 들어갔다. 그곳에 도착하여 보니, 포근하게 감싸는 새로운 소망의 항구가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을 수차례 들어왔지만 전에 느껴보지 못하였던 가장 큰 내적인 풍성함을 맛보았다.

그는 지나온 자신의 삶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심하게 점검하였다. 환락과 파티, 술, 섹스, 정치의 꼭두각시 속에 허위와 방탕으로 얼룩진 세월이었다. 그는 고열과 함께 침대 위에 누웠다. 계속 식음을 전폐하고 울고 또 울었다. 난생 처음으로 참회하였다. 그는 진정으로 갱생을 원하였다. 지나간 모든 것을 다 청산하고 새로운 삶에 대한 열정이 솟아나기 시작하였다. 배는 고팠지만 영혼의 더러운 불순물이 눈물에 다 녹아져 내리 듯 후련해지며 머리가 맑아지기 시작하였다.

‘씻기고 씻기어라!’

자신의 모든 과거가 씻겨 내리는 듯하였다. 이제 모든 것을 청산하자. 모두 무덤에 묻어 버리자. 그동안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권력과 돈의 쇠사슬에서 풀려나는 듯 자유로웠다. 동쪽 바닷가에서 둥근 해가 솟아오르기 시작하였다. 해의 붉은 잔영이 그의 얼굴에 점차로 번지기 시작하였다. 그의 머리 위로 독수리 한 마리가 ‘획!’ 공중으로 치솟았다. 날개 치듯 치솟는 독수리와 같은 새로운 생기가 그의 내부에서 파도치기 시작하였다.

 

잠시 말을 끊고 그는 숙연해진 표정으로 걸었다. 버스 정류장이 보였고 벤치와 그 뒤쪽엔 게시판이 있었다. 그곳엔 요즘 흥행하고 있는 영화 광고와 연극 공연, 문화행사에 대한 광고가 게시판에 진열되고 있었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의 세 그루가 이곳 정류장을 지키고 서 있는 듯하였다. 떨어지는 은행잎을 아이들이 주워 모으고 있는 동안, 두 사람은 잠시 멈추어서 말없이 게시판을 바라보았다.

 haj20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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