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애자의 소설-<딱새의 성> 제18회

남자는 허심탄회한 과거를 털어 놓았던 상대에게 무슨 말을 시작해야 할지 언뜻 대화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 게시판에 붉은색과 검정색의 대비로 눈에 확 뜨이는 연극광고 모델이 보였다. 반라의 모습에 다리를 벌리고 망사 스타킹이 벗겨질까 말까 하는 여배우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이마를 찌푸리며 대중성과 문화 예술성의 거리에 대해서 동시에 생각하고 있었다.

“문화가 병들면 사람도 병들어가죠. 드라마 많이 보십니까?”

“아뇨, 별로. 가끔 <인간극장>이나 <동물의 왕국>의 프로그램을 보면서 생각을 많이 하죠!”

“요즘 드라마 천국이죠. 모두가 불륜, 폭력, 복수, 기계적인 오락성……, 진부한 내용들이죠!”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정말 그렇다는 동의의 표정과 경외의 표정이었다.

“모두가 대중성과 상품적 가치를 추종하듯 저속한 문화가 유행하고 있지요. 이제 사람들의 정신을 고양시키는 정화수 같은 새로운 문화예술이 진정 필요한 시기입니다!”

“그렇지만 요즘 사람들, 철학적인 것, 참된 것에는 관심 없어요. 단지 재미있는 것, 음란한 것, 때리고 부수고, 피 흘리는 것 이런 것에 중독이 되어가고 있어요. 바쁜 현대인은 그저 생각 없이 시대의 조류에 끌려가는 노예와 같아요. 정말 걱정입니다!”

“다 그런 것만은 아니죠. 거센 파도처럼 시대는 휩쓸려 가나 그 거센 파도를 거슬러 올라가는, 참된 의인도 있으니까요!”

어느덧 임대 아파트 입구에 도착하였다. 정의식이 지하상가로 잠시 내려갔다. 그는 귤과 초콜릿과 아이들의 과자와 세제를 사들고 웃으며 인영에게 내밀었다.

“자, 그럼 다음 주 토요일에 꼭 나오셔야 합니다!”

아이들은 과자 봉지에 마음이 쏠리고 삼촌도 우리 집에 함께 가자며 응석을 부리며 매달렸다. 그는 선뜻 대답하지 않고 서 있었다.

“오늘 인형극 너무도 훌륭했고, 무척 즐거웠습니다.”

인영은 환한 미소를 보냈다. 왜 이렇게 마음에 감격의 홍수가 넘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삶의 이력을 들으면서부터 가슴이 뭉클하였다. 웬일인지 그의 이야기가 마치 자신과 깊은 일치감이 있었다.

“참 신기하지요. 이렇게 자꾸 우연하게 만나는 것이…….”

“운명이 아닐까요?”

그는 확고한 신념에 찬 표정으로 말하였다.

“운명이라고요?”

인영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그들은 잠시 서로 바라보다가 아쉽게 헤어졌다.

돌아가는 길에 의식은 생각에 잠겼다. 평소의 자신답지 않았다. 침착하고 절제된 모습이 신기하였다. 확 달려드는 자신의 애정에 대한 감정을 미리 알아서 시험해 보려 하였던가. 그런 종류의 사랑의 감정은 언제나 빨리 식어버리곤 하였던 지난날의 기억 때문일까! 아니면, 그 사랑의 완성을 위해서 다음 기회를 아끼고 싶어서일까! 아마 더 서로가 얘기를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이후의 감정에 대해서는 미래에 좀 더 영글어진 상태를 기대한 묘한 심리가 감추어져 있는지 모른다. 왜 잠시 들러서 커피 한잔이라도 들고 가라고 권하지 않았을까?

인영의 냉정함이 야속하였다. 그녀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혼자 사는 여자의 집에 남자가 내방하는 것이 어색할 것이다. 자신이 어떤 의도로 ‘운명’이라는 말을 하였는지 세밀하게 되뇌었다. 운명이라는 단어만이 애정을 표시하는 적절한 단어였다. 자신과 그녀를 굵게 묶을 수 있는 매개체였다. 난생 처음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왜 그렇게 속이야기를 많이 쏟아 놓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가슴에 자신의 언어가 흠뻑 흡수되고 있었다. 영롱한 이슬이 눈동자에서 반짝였다.

갑자기 인영에 대한 그리움이 엄습해 왔다.

‘쌍둥이 아줌마, 일용직 잡부, 생과부…….’

그녀의 조건은 초라하였다. 연민과 함께 가슴이 아팠다. 연민이라는 감정은 그의 인생에서 한 번도 없었다. 여자 때문에 처음으로 자신이 울고 있었다. 그것은 장엄함이었다.

의식은 인영을 향하여 달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현대여성들에게 보기 드문 여자였다. 인영을 처음 보았을 때, 연극 속에 담고자 하는 이상형의 여자를 발견하였다. 가슴에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시대에 휩쓸리지 않고 묵묵히 사는 순수한 여자, 질서 속에 있기를 갈구하는 여자. 어쩌면 세상에서 볼 때는 고리타분하고 어리석은 아웃사이더이다.
haj20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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