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넷= 문화, 교육:   1. 개과천선 改過遷善 -지난 허물을 고치고 착하게 됨.

진 혜제때 양흠지방에 괴걸이 나타났는데 그의 이름을 주처라 불렀다.

주처의 아버지 주방이 동오, 파양 태수를 지낸 바 있어 따지고 보면 주처도 양반 세문의 자제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주처가 여남은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주처는 아버지의 가르침과 보살핌을 잃은 뒤부터 점점 외곬으로 나아가 하루 종일 할일 없이 방랑생활을 하며 나쁜 짓이라고는 안하는 것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몸이 강인하고 팔 힘은 보통 사람이 따르지 못하였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천하 패자 격으로 남을 두드려 패기가 일쑤고 야만 행위를 자행하는 등 그야말로 불량소년으로 마을 사람들은 그를 두려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주처가 차차 자라면서 마을 사람들은 점점 그를 미워했고 그를 멀리하자 주처도 자연히 철이 들어 자신의 과오를 깨달았음인지 지난 허물을 과감히 고치어 새로운 사람이 되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였다.

하루는 그가 마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세상이 편안하여 모두들 의식 걱정없이 잘 사는데 왜 당신들은 나만 보면 낯을 찡그리십니까?"

이때 어느 대담한 마을 사람이 대답했다.

"세가지 해로움도 제거하지 못했는데 어찌 태평을 논할 수 있겠나?"

"세가지 해로움이라니요?"

주처는 이상히 여겨 물었다.

"남산에 있는 사나운 호랑이, 장교 아래 있는 교룡, 그리고 주처, 자네를 합해서 세 가지 해로움을 말하는 걸세"

주처는 귀에 거슬리는 마을 사람들의 말을 듣고는 더욱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각오를 굳게 가졌다. 그리고는 격동한 어조로 다짐했다.

"제가 반드시 그 세가지 해로움을 제거할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주처가 삼해를 없애겠다는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다행한 일이라고 제각기 경하해 마지 않았다.

두 호랑이가 싸우면 반드시 하나가 상하는 소위 법인데 삼해를 한꺼번에 제거치 못하더라도 한 두 가지의 해로움을 없앨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그를 격려했다.

그리하여 주처는 칼을 차고 남산에 올라가 맹호를 잡아 죽였다. 바로 이어 주처는 또 장교아래 물에 뛰어 들어 교룡과 싸움을 벌였는데 사흘 밤낮이 지나도 주처는 돌아오질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주처가 이미 교룡에게 잡혀 먹힌 줄 알고 모두 손을 들어 환호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주처는 악전고투 끝에 교룡을 죽이고 살아 돌아왔으나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은 별로 반갑게 여기는 것 같지가 않자 주처는 아직도 자기에 대하여 미움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고 더욱더 허물을 벗고 착한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의 각오를 굳게 다졌다.

드디어 그는 정든 고향을 등지고 동오에 가자, 대학자 육기와 육운 두 형제를 만나보고 육운에게 솔직 담백하게 말했다.

"전에 저는 나쁜 짓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뜻을 세워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너무 늦은 감이 있는 것이 가장 두렵습니다."

"자네는 나이가 아직 젊네!" 육운이 격려를 했다.

"자네가 굳은 의지를 지니고 지난 허물을 고치며 새로이 착한 삶이 된다면 자네의 앞길은 무한한 것 일세."

이 때부터 주처는 뜻을 세워 동오에서 글을 배웠다. 10여년동안 덕행과 학문을 닦고 익혀 마침내 유명한 대학자가 되었다.

改 고칠 개, 過 허물 과, 遷 옮길 천, 善 착할 선


2. 고육지계苦肉之計-제 몸을 괴롭혀가면서까지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하는계책

삼국시대의 주유(周瑜)는 오(吳)나라 장수로 지모가 뛰어났다. 조조(曹操)의 위(魏)나라 수군 도독인 채모와 장윤은 주유의 계략에 빠져 조조에게 참살 당했고 뒷날 조조가 가슴을 쳤을 때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조조는 오나라를 공략하기 위해 장강(長江·양자강)에 수십만 대군을 배치했다. 유명한 적벽(赤壁)대전의 서막이었다.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본 주유는 궁여지책으로 화공(火攻)작전을 세워 보았다. 주유는 노장 황개(黃蓋)와 머리를 맞대고 각본을 짰다. 거짓 항복하는 이른바 사항계(詐降計)를 쓰기로 한 것이다.

황개가 주역인 연극은 시작되었다. 작전 회의에서 황개가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조조의 대군을 도저히 이길 수 없소. 항복하는 게 좋을 것 같소."

황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벽력같은 주유의 호통소리가 나왔고 곧이어 황개는 곤장형에게 처해졌다.

살갗이 터져 유혈이 낭자한 처절한 체형(體刑)이었다. 이 모습을 전해 들은 촉(蜀)나라의 제갈량(諸葛亮)은, "자신의 몸에 고통을 가하는 고육의 계책을 쓰지 않고는 조조를 속일 수 없었겠지. (不用苦肉計 何能瞞過曹操)" 라고 했다고 한다.

황개는 심복 부하를 시켜 거짓 항복 편지를 조조에게 전하게 했다. 편지를 읽어본 조조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첩자로 오나라 군부에 박혀 있다가 자초지종을 지켜본 채모의 두 동생이 보낸 보고서의 항복 이유가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뒤에 귀순을 가장한 황개는 인화물을 실은 배를 몰고 가 조조군의 선단(船團) 에 부딪히게 해서 화염에 휩싸이게 했다. 이리하여 고육지계(苦肉之計)는 성공했고 오(吳)는 위(魏)에 대승을 거두었다.


3. 곡학아세 曲學阿世

학문을 굽히어 세속(世俗)에 아첨한다는 뜻으로, 정도(正道)를 벗어난 학문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아첨함. 한(漢)나라 6대 황제인 경제(景帝:B.C 157-141)는 즉위하자 천하에 널리 어진 선비를 찾다가 산동(山東)에 사는 원고생(轅固生)이라는 시인을 등용하기로 했다. 그는 당시 90세의 고령이었으나 직언을 잘하는 대쪽 같은 선비로도 유명했다.

그래서 사이비(似而非) 학자들은 원고생을 중상비방(中傷誹謗)하는 상소를 올려 그의 등용을 극력 반대하였으나 경제는 끝내 듣지 않았다.

당시 원고생과 함께 등용된 소장(少壯) 학자가 있었는데, 그 역시 산동 사람으로 이름을 공손홍(公孫弘)이라고 했다.

공손홍(公孫弘)은 원고생을 늙은이라고 깔보고 무시했지만 원고생은 전혀 개의치 않고 공손홍(公孫弘)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학문의 정도(正道)가 어지러워져서 속설(俗說)이 유행하고 있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유서 깊은 학문의 전통은 결국 사설(私設)로 인해 그 본연의 모습을 잃고 말 것일세. 자네는 다행히 젊은 데다가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란 말을 들었네. 그러니 부디 올바른 학 문을 열심히 닦아서 세상에 널리 전파해 주기 바라네.

결코 자신이 믿는 '학설을 굽히어 [曲學]' 이 '세상 속물들에게 아첨하는 일[阿世]'이 있어서는 안 되네."

원고생의 말이 끝나자 공손홍은 몸둘 바를 몰랐다. 절조를 굽히지 않는 고매한 인격과 학식이 높은 원고생과 같은 눈앞의 태산북두(泰山北斗)를 알아 보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 웠기 때문이다.

공손홍은 당장 지난날의 무례를 사과하고 원고생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固之徵也 薛人公孫弘亦徵 側目而視固 固曰 公孫子務正學以言 無曲學以阿世.

曲 굽을 곡. 學 학문 학. 阿 아첨할 아. 世 인간, 세대 세.


4. 관포지교 管鮑之交

중국의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 같은 친교라는 뜻으로, 시세(時勢)를 떠나 친구를 위하는 두터운 우정을 일컫는 말.


춘추시대 초엽, 제(齊)나라에 관중(管仲 : ?∼B.C 645)과 포숙아(鮑叔牙)라는 두 관리가 있었다. 이들은 죽마고우(竹馬故友)로 둘도 없는 친구사이였다.


관중이 공자(公子) 규(糾)의 측근으로, 포숙아가 규의 이복 동생인 소백(小白) 의 측근으로 있을 때 공자의 아버지 양공(襄公)이 사촌 동생 공손무지 (公孫無知)에게 시해되자(B.C. 686) 관중과 포숙아는 각각 공자와 함께 이웃 노(魯) 나라와 거나라로 망명했다.


이듬해 공손무지가 살해되자 두 공자는 군위(君位)를 다투어 귀국을 서둘렀고 관중과 포숙아는 본의 아니게 정적이 되었다.


관중은 한때 소백을 암살하려 하였으나 소백이 먼저 귀국하여 환공(桓公 : B.C 685-643) 이라 일컫고 노나라에 공자 규의 처형과 아울러 관중의 압송(押送)을 요구했다. 환공이 압송된 관중을 죽이려 하자 포숙아는 이렇게 진언했다.

"전하, 제(齊) 한 나라만 다스리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면 신(臣)으로도 충분할 것이옵니다. 하오나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시려면 관중을 기용하시옵소서."


도량이 넓고 식견이 높은 환공은 신뢰하는 포숙아의 진언을 받아들여 관중을 대부(大夫)로 중용(重用)하고 정사를 맡겼다 한다.


이윽고 재상이 된 관중은 과연 대정치가다운 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안다 [倉弟實則 知禮節]'

'의식이 풍족해야 영욕을 안다 [衣食足則知榮辱]'고 한


관중의 유명한 정치철학이 말해 주듯, 그는 국민 경제의 안정에 입각한 덕본 주의(德本主義)의 선정을 베풀어 마침내 환공으로 하여금 춘추(春秋)의 첫 패자로 군림케 하였다.


이같은 정치적인 성공은 환공의 관용과 관중의 재능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이긴 하지만 그 출발점은 역시 관중에 대한 포숙아의 변함없는 우정에 있었다.


관중은 훗날 포숙아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나는 젊어서 포숙아와 장사를 할 때 늘 이익금을 내가 더 많이 차지했었으나 그는 나를 욕심장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를 위해 한 사업이 실패하여 그를 궁지에 빠뜨린 일이 있었지만 나를 용렬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일에는 성패(成敗)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벼슬길에 나갔다가는 물러 나곤 했었지만 나를 무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운이 따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나는 싸움터에서도 도망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나를 겁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노모(老母)가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를 낳아 준 분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이다.』"

(生我者父母 知我 者鮑叔也)


管 대롱 관. 鮑 절인 고기 포. 之 갈 지(, , , 의). 交 사귈 교.


5. 구사일생 九死一生

여러 차례 죽을 고비에서 헤매다가 겨우 살아남.

"굴평은 (굴원의 이름) 임금이 신하의 말을 듣고 분간하지 못하고 참언과 아첨하는 말이 왕의 밝은 지혜를 가리고, 간사하고 비뚤어진 말이 임금의 공명정대함을 상처 내어 마음과 행실이 방정한 선비들이 용납되지 않는 것을 미워했다. 그리하여 근심스러운 생각을 속에 달아 이소 한편을 지었다."


이 이소의 제 6단에, 다음과 같은 1절이 있다.


'길게 한숨 쉬며 눈물을 닦으며, 인생의 어려움 많음을 슬퍼한다. 그러나 자기 마음이 선 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비록 아홉 번 죽을 지라도 오히려 후회하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


이 에 대하여, 문선을 편찬한 유량주는 이렇게 말했다.


"아홉은 수의 끝이다. 충성과 신의와 곧음과 깨끗함, 이 네 마음이 선하고자 하는 바이니, 이해를 만남으로써, 아홉 번 죽어서 한번을 살아나지 못한다. 할지라도, 아직 후회하고 원한을 품기에는 족하지 못하다."


구사일생은 유량주가 말한 "아홉 번 죽어서 한번 살지를 못한다." 에서 나온 것으로, 열번 중에서 아홉 번까지는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한다. 는 뜻이기도 하며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고 간신히 살아난다. 는 뜻이다.


6. 勸善懲惡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함.

노(魯)나라 성공(成公) 14년 9월에 제(齊)나라로 공녀(公女)를 맞이하러 가있던 교여(僑如 : 宣伯)가 부인 강씨(姜氏)를 제나라로 데리고 돌아왔다.


교여라고 높여서 부른 것은 부인을 안심시켜 슬며시 데리고 오기 위해서였다.


이보다 앞서 선백(宣伯)이 제나라로 공녀(公女)를 맞이하러 갔었을 때는 선백을 숙손(叔孫)이라고 불러 군주(君主)의 사자로 높여 부르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이렇게 말한다.


"춘추(春秋) 시대의 호칭은 알기 어려운 것 같으면서도 알기 쉽고,

쉬운 것 같으면서도 뜻이 깊고,

빙글빙글 도는 것 같으면서도 정돈되어 있고,

노골적인 표현을 쓰지만 품위가 없지 않으며,

악행을 징계하고 선행을 권한다.[勸善懲惡]

성인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렇게 지을 수 있겠는가?"


'권선징악(勸善懲惡)'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7. 금란지교 金蘭之交

① 다정한 친구 사이의 정의(情義) ② 다정한 친구 사이의 교제(交際)

"사람들과 한가지로 하여 먼저는 울부짖고 뒤에는 웃는다……."


공자는 말씀하셨다.


"군자의 도는 혹은 나가 벼슬하고 혹은 물러나 집에 있으며 혹은 침묵을 지키지만 혹은 크게 말한다. 두 사람이 마음을 하나로 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를 끊고 마음을 하나로 하여 말하면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


同人 先號宖而後笑 子曰 君子之道 惑出惑處 惑默惑語 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 (易經繫辭上傳)


몹시 친밀한 사이를 [금란지교(金蘭之交)]라고 말하는 것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또 친구 사이의 사귐이 굳은 것을 [금란지교(金蘭之交)]라고 하는 말은 백낙천(白樂天)의 시구에도 나온다.


8. 누란지위 累卵之危

알을 쌓아(포개) 놓은 것처럼 위태로운 형세의 비유.

전국시대, 세 치의 혀[舌] 하나로 제후를 찾아 유세(遊說)하는 세객(說客)들은 거의 무두 책사(策士) 모사(謀士)였는데, 그 중에서도 여러 나라를 종횡으로 합쳐서 경륜하려던 책사 모사를 종횡가(縱橫家)라고 일컬었다.


위(魏)나라의 한 가난한 집 아들로 태어난 범저(范雎)도 종횡가를 지향하는 사람이었으나 이름도 연줄도 없는 그에게 그런 기회가 쉽사리 잡힐리 없었다.


그래서 우선 제(齊)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중대부(中大夫) 수가(須賈)의 종자(從者)가 되어 그를 수행했다.


그런데 제나라에서 수가보다 범저의 인기가 더 좋았다. 그래서 기분이 몹시 상한 수가(須賈)는 귀국 즉시 재상에게 '범저는 제(齊)나라와 내통하고 있다' 고 참언(讒言)했다.


범저는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거적에 말려 변소에 버려졌다. 그러나 그는 모사(謀士)답게 옥졸을 설득, 탈옥한 뒤 후원자인 정안평(鄭安平)의 집에 은거하며 이름을 장록(張祿)이라 바꾸었다.


그리고 망명할 기회만 노리고 있던 중 때마침 진(秦)나라에서 사신이 왔다.


정안평은 숙소로 은밀히 사신 왕계(王稽)를 찾아가 장록을 추천했다. 어렵사리 장록을 진나라에 데려온 왕계는 소양왕(昭襄王)에게 이렇게 소개했다.


"전하, 위나라의 장록 선생은 천하의 외교가이옵니다. 선생은 진나라의 정치를 평하여 '알을 쌓아 놓은 것보다 위태롭다.(危於累卵)'며 선생을 기용하면 국태민안(國泰民安)할 것이라고 하였사옵니다."


소양왕은 이 불손한 손님을 당장 내치고 싶었지만 인재가 아쉬운 전국시대 이므로 일단 그를 말석에 앉혔다. 그후 范雎[張祿]은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 '으로 그의 진가를 발휘했다.


累 여러, 포갤 루. 卵 알 란. 之 갈 지(…의). 危 위태할 위.


9. 다다익선 多多益善 -많을수록 더욱 좋음.

한(漢)나라 고조 유방(劉邦)은 명장으로서 천하통일의 일등공신인 초왕(楚王) 한신을 위험한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계략을 써 그를 포박한 후 회음후(淮陰候)로 좌천시키고 도읍 장안 (長安)을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어느날, 한(漢) 고조(高祖)는 한신과 여러 장군들의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한신에게 이렇게 물었다.


"과인은 몇 만의 군사를 통솔할 수 있는 장수감이라고 생각하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폐하께서는 한 10만쯤 거느릴 수 있으실 것으로 생각하나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예, 신(臣)은 '다다익선(多多益善)'이옵니다."


高帝嘗與韓信言諸將能否 各有差 上問曰 如我能將幾何臣曰 陛下不過能將十萬 上曰 於君何如 曰 臣多多而益善耳.


"다다익선? 핫핫핫……."


고조는 한바탕 웃고 나서 물었다.


"다다익선이란 그대가 어찌하여 10만의 장수감에 불과한 과인의 포로가 되었는고?"


한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하오나 폐하,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옵니다. 폐하께서는 병사의 장수가 아니오라 장수(將帥)의 장수(將帥)이시옵니다. 이것이 신이 폐하의 포로가 된 이유의 전부이옵니다." 多 많을 다. 益 더할 익. 善 착할, 좋을, 잘할 선.


10. 대기만성 大器晩成 - 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는 뜻.

① 크게 될 사람은 늦게 이루어짐의 비유.

② 만년(晩年)이 되어 성공하는 일.

③ 과거에 낙방한 선비를 위로하여 이르던 말.

⑴ 三國志 '魏志'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삼국시대, 위(魏)나라에 최염(崔琰)이라는 풍채 좋은 유명한 장군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촌 동생인 최림(崔林)은 외모가 시원치 않아서인지 출세를 못하고 일가 친척들로 부터도 멸시를 당했다.


하지만 최염만은 최림의 인물됨을 꿰뚫어 보고 이렇게 말했다.


"큰 종(鐘)이나 솥은 그렇게 쉽사리 만들어지는 게 아니네. 그와 마찬가지로 큰 인물도 대성(大成)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너도 그처럼 '大器晩成' 하는 그런 형이야. 두고 보라구. 틀림없이 큰 인물이 될 테니……."


과연 그 말대로 최림은 마침내 천자(天子)를 보좌하는 삼공(三公)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⑵ 後漢書에 보면,


후한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 25-57)때 마원(馬援)이란 명장이 있었다.


그는 변방의 관리로 출발하여 복파장군(伏波將軍)까지 된 인물이데, 복파장군 이란 전한(前漢) 이후 큰 공을 세운 장군에게만 주어지는 칭호이다. 마원이 생전 처음 지방관리가 되어 부임을 앞두고 형인 최황(崔況)을 찾아가자 그는 이렇게 충고했다.


"너는 이른바 '大器晩成'형이야. 솜씨 좋은 대목이 산에서 막 베어 낸 거친 원목을 시간과 노력을 들여 좋은 제목으로 다듬어 내듯이 너도 네 재능을 살려 꾸준히 노력하면 큰 인물이 될 것이다. 부디 자중(自重)하라."


⑶ 老子에도,


'큰 네모(四角)는 모서리가 없으며 큰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大方無隔 大器晩成)는 말이 있다. 큰 인물은 짧은 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大 클 대. 器 그릇 기. 晩 늦을 만. 成 이룰 성.


11. 마이동풍馬耳東風 -말의 귀에 동풍(東風:春風)이 불어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뜻.

①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그대로 흘려 버림의 비유.

② 무슨 말을 들어도 전혀 느끼지 못함의 비유.

③ 남의 일에 상관하지 않음의 비유.


왕십이(王十二)가‘쓸쓸한 밤 홀로 술을 마시며 회포에 잠긴다. '한야독작유회 (寒夜獨酌有懷)'’라는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읊은 시를, 이백이‘왕십이의 한야독작유회에 답한 '답왕십이한야독작유회(答王十二寒夜獨酌有懷)' 라는 장편의 시(詩) 가운데 있는 말이다.

"푸른 산을 둘러싸고 뜬구름이 하염없이 이어져 있고, 그 하늘 가운데 외로운 달이 흐르고 있다. 외로운 달은 추위에 못 이겨 빛나고, 은하수는 맑고 북두칠성은 흩어져 깔려 있는데, 밤의 많은 별들이 밝게 빛난다.


나는 술을 마시면서 밤 그늘 서리의 하얀 것을 생각하고, 자네의 집 우물의 구슬 난간에 얼음이 얼어붙은 모양을 생각하고, 얼어붙은 자네의 마음을 생각했다.


인생은 아차 하는 사이에 백년도 채우지 못한다. 자, 술이나 마셔 한없는 생각을 떨쳐 버리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햇볕이 쪼이지 않는 북쪽 창문 속에서, 시를 읊거나 부(賦)를 짓는 정도의 일일세. 일 만 마디를 지어도 고작 술 한 잔의 가치도 없네."


그리고 나서 李白은 이렇게 읊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이 말을 들으면 다 머리를 흔들 걸세.

동풍(東風)이 말의 귀를 쏘는 것 같음이 있네.


世人聞此皆掉頭 有如東風射馬耳


馬 말 마. 耳 귀 이. 東 동녘 동. 風 바람 풍.


12. 백수건달 白手乾達 -아무 것도 없이 난봉을 부리고 돌아 다니는 사람.

불교 문헌에서는 음악을 맡은 천신(天神)을 ‘건달박(乾達縛)’ 또는 ‘건달바(乾達婆)’라고 부르는데, 식향(食香), 심향행(尋香行), 향음(香陰), 향신(香神)으로 의역되기도 한다.


의역의 경우 향(香)자가 모두 들어간 이유는 그 천신이 향 만을 먹으며 유유히 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전설에 따르면 건달바는 술과 고기를 먹지 않으며 오직 향기만을 먹고 산다고 한다. 이들은 원래 브라만교에서 숭배하던 여러 신 가운데 하나로서, 불교 경전에서는 동방을 수호하는 신으로 간주하며, 또 욕계(欲界)의 중음신(中陰神) 을 가리키기도 한다.


욕계의 중생이 죽고 나서 아직 새로운 육체를 얻기 이전인 중음신 상태에서는 오직 향기만을 먹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이 가운데 복이 적은 자는 나쁜 향기를 먹으며, 복이 많은 자는 좋은 향기를 먹는다.


절에 다니는 신도들이 향을 피우는 것은 건달박에게 봉양하는 행위에서 비롯된 풍습이다. 이 건달바에 빗대어‘하는 일 없이 빈둥대는 사람’을 건달이라 부르게 되었다.


13. 살신성인 殺身成仁 -절개를 지켜 목숨을 버림.

자신의 몸을 죽여 인을 이룬다. 자기의 몸을 희생하여 옳은 도리를 행하다.

이 말은 춘추시대, 인(仁)을 이상적 덕목으로 삼는 공자(孔子)의 언행을 수록한 논어(論語) 위령공편(衛靈公篇)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높은 뜻을 지닌 선비와 어진 사람은 志士仁人(지사인인)

삶을 구하여 '인(仁)'을 저버리지 않으며 無求生以害仁(무구생이해인)

스스로 몸을 죽여서 '인(仁)'을 이룬다. 有殺身以成仁(유살신이성인)


공자 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인(仁)'의 도는 제자인 증자(曾子)가 논어(論語) 이인편(里仁篇)에서 지적했듯이 '충(忠)'과 '서(恕)'에 귀착한다.


부자(夫子:공자에 대한 경칭)의 도(道)는 '충(忠)', '서(恕)'일 뿐이다.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부자지도 충서이이의)


'충(忠)'이란 자기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정신이고,

'서(恕)'란 '충(忠)'의 정신을 그대로 타인에게 미치게 하는 마음이다.


증자(曾子)는 공자(孔子)의 '인(仁)'이 곧 이 '충서(충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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