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훈(배우. 세종대 교수)

1. 배우 이순재와의 만남

1999년 12월, 겨울이었던으로 기억한다. 7년반의 유학으로 국내 귀국 후, 한국생활이 익숙하지 않았던 필자가 돈벌이와 현장 탐험으로 시작한 일은 당시 유행하던 ‘대형 악극 만들기’였다. 당시 MBC 제작으로 <아버님 전상서>라는 작품이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올라갔는데 필자는 조연출과 액팅코치로 참가하였다.

요즘도 현장의 현실이 그러하지만 당시 조연출은 기본 업무외에도 팀내의 모든 잡다한 일을 도맡아야 했다. 작품 만들기의 스텝적 업무 외에 필자가 해야 하는 또 다른 일은 작품의 홍보를 위한 홍보영상을 연출하는 일이었다.

당시 작품의 연출가는 공연스케일의 방대함으로 시간을 낼 수 없었고 제작부는 영상촬영을 해본 경험이 전무한 터라 자연스럽게 만능(?) 조연출에게 홍보영상제작의 특무가 떨어진 것이다.

요즘처럼 홍보 전문업체에게 하청을 주거나 영상제작 전문가를 초빙하면 되는데 왜 자체 인력으로 전문가도 필자에게 홍보영상을 연출하라 했는지 지금도 언뜻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다. 어째든 공연 할 악극의 TV 스팟 광고를 위한 영상 활영을 위해 필자는 콘티를 짰고 배우들을 연습시켜 촬영 장소로 이동하였다. 1960년대가 배경인 악극의 영상 촬영을 위해 제작부가 제공한 장소는 MBC 의정부 세트장이었다. 사극을 위한 세트가 있는데 그나마 거기가 시대물 같은 분위기 난다는 것이 이유였다.


연극 '사랑별곡'의 한 장면/사진=뉴스프리존

문제는 당시 MBC의 드라마 <허준>의 촬영으로 의정부 세트장이 전쟁터처럼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의 촬영을 위한 시간을 조금도 내 줄 수 없다고 엄포를 놓았고 우리는 사전 허가를 얻지 못한 채 잠깐의 도둑촬영을 생각하고 현장에 도착한 것이었다.

사실 <허준> 팀이 조명이나 의상 등을 교체 할 때 잠시 몇 커트만 찍으면 되니 그리 말이 안되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의기양양하게 의정부 세트장에 도착. 그러나 현장의 분위기는 결코 우리의 도둑촬영을 수용 할 상황이 아니었다. 세트장은 단 일분도 쉴 틈이 없이 돌아가고 있었고 무엇보다 촬영장의 분위기가 하도 험하게 얼어 있어서 우리의 제작부는 같은 회사의 작품임에도 잠깐의 틈을 내달라고 말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우리 팀은 그나마 세트장이 빌 수 있는 <허준> 팀의 저녁 식사 시간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어쩔 수 없이 한참을 보조 출연자들의 대기실과 복도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그때 만나게 된 분이 이순재 선생님이다. 아마도 출연중이던 <허준>드라마의 녹화 대기를 하던 모양이시었다.

당시 필자는 조연출로 참가한 ‘대형 악극’의 공연이 끝나는 이듬해 학기부터 대학에 시간강의를 나가기로 했었는데 그것이 이순재 선생님이 이미 두학기를 외래교수로서 강의하고 계시던 세종대학교 영화예술학과 연기예술전공이었다. 평소 낮가림이 있는 필자지만 같은 공간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것이 어색하고 또 어차피 이듬해 학기에 대학에서도 마주칠듯하여 필자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며 다가섰다.


연극 '시련'의 한 장면/사진=국립극단 제공

그때의 선생님의 인자함과 배려를 잊을 수가 없다. ‘필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왜 여기와 있는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다음 학기부터 세종대학교에 강의를 하게 되었기에 선생님께 인사드린다.’고 말씀드리니 선생님은 반갑게 맞아주시며 여러 조언을 해주시었다. 초면이기도 하고 또 선생님도 촬영 직전이라 귀찮을 법도 한데 선생님은 조금의 내색도 않으시며 유학파로서 가지는 국내 현장 정착의 어려움, 방송현장에서 배우가 가져야 할 도리, 대학 강의 시에 유의 할 점 등을 상세히 말씀해 주시었다.

특히 당시 연극영화과 계열로서 이제 갓 시작한 세종대학교 학생들의 특성과 학과의 문제점 그리고 연기수업의 방향 등을 이제 같이 강단에 서게 될 초보의 선생에게 애정으로 가르쳐 주시는 것이었다. 두 어 시간여 대화를 나누었을까? 시간이 허락한 여유도 있었겠지만 필자는 그동안 방송으로만 보고 처음 얼굴을 대면한 이순재 선생님에게서 인간 냄새나는 세심한 배려와 따뜻함을 느끼게 되었다.

더욱이 7년 반의 유학 후 귀국이라 모든 것이 변해버린 국내 창작현장과 교육의 환경을 두려워하던 필자에게 당시 선생님의 따뜻한 조언과 배려는 눈물 나는 고마움이었다. 필자는 배우 이순재 선생님과의 조우를 그렇게 시작하였다./다음호에 계속

김태훈/배우, 세종대교수/주요작품=에쿠우스, 고곤의선물, 비극의 일인자, 내면의악마, 갈매기, 나생문, 죄와벌 등/수상=2004년 제25회 서울연극제 연출상, 2009년 2인극 페스티벌 작품상, 2012년 33회 서울연극제 연기상, 2014년 러시아모스크바예술극장, 연기부분 공로상, 2014년 제15회 김동훈연극상, 2015 대한민국 신한국인상.문화예술부분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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