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애자 장편소설 모델하우스제12회

테니스 대회

지선은 애춘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그러나 몇 번을 계속해서 눌러도 불통이었다. 지선은 남편의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는 고요하며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테이블 위의 컴퓨터를 부팅했다. 당분간 독일에 체류 중인 남편에게 이메일을 쓰기 위해서였다.

〈별일 없으신지요. 취재는 잘 진행되고 있으리라 믿어요. 식사는 거르지 말고 꼭 챙겨 드세요. 성공적인 취재가 되길 바라며…. 그리고 저는 학교에서 새로운 미술교사와 친하게 지내고 있어요. 장애춘이라고! 무척 내적으로 외로워하고 있는 것 같아요. 나중에 소개해 드릴께요. 그럼 이만….〉

컴퓨터를 마치고 테이블 위에 세워진 사진을 바라보았다. 레이스가 화려하게 달린 하얀 블라우스에 빨강색 스커트를 받쳐 입은, 언젠가 공원 산책길에서 남편이 찍어준 사진이었다. 짧은 단발머리가 철쭉꽃을 배경으로 강렬하게 돋보이며 잘 어울리는 사진이었다. 남편은 아주 멋있는 사진이라며 확대해 자신의 테이블 위에 세워 두고 있었다.
‘언제나 이 모습을 남편은 사랑하였나…!’
지선은 새삼스럽게 자신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동안 몰랐던 자신의 얼굴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눈매가 크고 아름다워 보였다. 자신은 늘 어렸을 때부터 외꺼풀 눈에 열등감이 있었다. 그래서 눈이 크고 쌍꺼풀이 진 여자는 무조건 예뻐 보였다. 애춘이 예쁘게 느껴지는 것도 크고 동그란 쌍꺼풀이어서 그랬는지 모른다. 그런데 자신의 외모가 새롭게 인식되었다. 비록 쌍 꺼풀은 아니지만 눈이 크고 깊고 길었다. 상당히 매력적인 눈이라고 스스로도 감탄했다.
‘이런 눈은 흔치 않은 눈이다. 아…, 나는 개성 있는 아름다운 눈매를 가졌구나!’
지선은 자신의 용모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다. 환하게 웃는 입가의 보조개와 진주처럼 튼튼하고 단단한 하얀 고른 이가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이때는 삼십대 초반이었지? 그때만 해도 꽤나 괜찮았지만 지금은 사십대잖아!’

지선은 어떤 위기의식을 느꼈다. 사십대는 불혹의 나이라 확실한 삶의 주관이 서 있는 행로를 걷고 있을 나이이다. 그런데 자신은 아직도 뚜렷한 행로가 없는 듯 세월만 무상히 흘려보낸 듯했다. 지선은 피곤하지만 꼼꼼히 클렌징을 하고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누우면 언제나 ‘사랑스런 나의 와이프…!’하며 포옹과 키스를 해주던 남편이 떠올랐다.
“당신은 나의 보물이야. 갈수록 소중하게 빛나는 나의 보배…!”
그는 언제나 이런 사랑의 고백을 아끼지 않았다.
 ‘내가 늙은 할망구가 되어도 남편은 이같이 노래를 해줄까!’
언제나 듣던 사랑의 고백에 느끼는 반응은 전율도 없고 로맨스의 감정도 엷어지고 이제는 하나의 생활이 되어갔다.
‘왜 이렇게 맹맹해졌을까.’
지선은 위기의식에 사로잡혔다. 남편은 언제나 자신에게 뜨거운 것일까! 아니다. 남편도 식어지는 사랑의 곡선을 끌어올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하는 듯했다. 이제 사랑보다 서로에게 든 ‘정’이었다. 연민과 정…, 이것이 부부의 사랑이라고 문득 깨달았다.

지선은 남편과 동행한 은 기자가 떠올랐다. 떠나는 공항에서 한 팀이 되어 나타난 삼십대 초반의 여인! 그녀는 젊고 아름다웠다. 사십대 후반의 남편과 삼십대 유부녀의 동행이었다. 물론 그들만이 아니라〈복지 탐사팀〉으로 여러 사람들이 동행했으나 지선에겐 두 사람만이 떠나는 듯 하였다. 지선은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르며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남녀 사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정숙을 미덕으로 삼고 있는 자신도 다가오는 사랑의 전율에 떨 때가 있고, 때로는 은밀한 사랑의 환상을 품을 때도 있지 않은가! 정세원의 흠모함을 즐기듯 남편도 그런 분위기에 충분히 노출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지선은 다시 한 번 다짐하듯 고개를 저었다. 그 모든 것은 생각뿐이지 더 이상 진전시킬 뻔뻔한 에너지가 자신과 남편에게는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싶었다.

정세원이 커피를 마시자고 한다든지, 산책을 함께 하자고 해도 자신은 아예 동행하지를 않았다. 정숙한 척 정중하게 피했으며 그에게 달려가는 자신의 감정을 자제했다. 이 같은 현상은 남녀에게 잠깐 반짝이는 신기루 같은 것이라 여겼다. 그것은 단지 마음을 설레게 하여 이성을 잃게 하며 마취된 것처럼 광기를 동반하며 순간의 행복에 젖게 한다. 연인들은 그것을 ‘운명적 사랑’이라 미화하여 부르며 그 아른거림에 취해 다가가 마주할 것이다. 그러나 다가가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실체 없는 공허함뿐이다. 부적절한 이성과의 관계가 무슨 사랑이며 가치가 있단 말인가. 결국 허무만 배설할 뿐이다. 그것은 학창시절부터 지선이 친히 체득하지 않았던가!

 haj20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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