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돌
 

 
2016년 12월 19일 국회 청문회에서 이영석 대통령 경호실 차장은 최순실 씨와 차은택 씨가 대통령의 사생활과 관련된 '보안손님'으로 분류돼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 차장은 이날 ‘최순실 게이트’ 진상조사를 위한 국정조사 특위의 청와대 기관보고에 출석, 더불어민주당 박범계 의원이 “차은택 씨가 일주일에 서너 번씩 늦은 밤 청와대에 갔다 온 적이 있다고 했다. 차 씨와 최순실 씨 모두 보안손님이 맞느냐”고 묻자 “네, 보안손님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안손님이라도 대통령의 ‘집’인 관저 데스크에서는 반드시 신원 확인과 검문검색을 받아야 합니다. 이때 출입증(秘標)을 받으면서 기록이 남습니다. 전직 청와대 관계자들에 따르면 현 정권에서는 ‘보안손님’ 규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 관계자는 “최순실은 관저에서도 ‘출입증(비표)’을 받지 않았다”고 폭로했습니다.

규정 내의 ‘보안손님’이 아닌, 불법 ‘유령손님’이었단 얘기입니다. 이 문제를 지적했던 한 경호실 관계자는 한직으로 좌천되기도 했다고 하네요. 최순실 뿐 아니라 전 남편인 정윤회 씨도 보안손님으로 청와대를 출입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청와대 전 관계자는 “정 씨가 부속실 소유 차량을 타고 ‘유령 손님’ 형태로 드나들었다”라고 폭로했습니다.

이와 같이 최순실 측근들이 유령 같이 청와대를 드나들면서 대통령을 독대했다면 이는 심각한 ‘경호국기문란’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외에도 세월호 참사당일 대통령의 성형수술을 했다는 의혹을 산 의사 김영재와 그 부인 박채윤, 주사 아줌마, 미용사, 그리고 차은택 등도 모두 ‘보안손님’이었다고 하니 참으로 등골이 오싹합니다.

우리 대통령경호실의 구호는 ‘바람소리도 놓치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대통령 경호의 핵심을 상징하는 표현이지요. 그동안 청와대의 수많은 경호관은 이 구호를 자랑스럽게 마음속 깊이 새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젠 이 구호를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제 경호실의 권력은 높아졌는지 모르지만 그 명예는 땅에 떨어진 것입니다.

보이지 않음으로써 더 빛나는 직업, 절제할 때 가장 빛나는 직업이 바로 대통령경호실이고, 대통령 경호원입니다. 대통령을 구중궁궐에 가두는 게 아니라 국민과 함께할 수 있도록 보호하면서 동시에 한 점의 바람소리도 놓치지 않는 대통령경호! 그런데 그 자랑스러운 경호실은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태조(太祖) 이성계 때, 익위(翼魏) 박자청(朴子靑 : 1357~1423)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박자청은 조선개국공신인 황희석의 노비(奴婢)였습니다. 그런데 워낙 재주가 비상하고 성실하여 주인이 특별히 발탁한 덕에 대궐문을 지키는 중랑장이 되었습니다.
 

1393년(태조 2)에 중랑장 박자청은 당번이 되어 궁궐 대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때, 왕의 아우 의안대군 이화(李和)가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박자청은 임금이 부르는 명령이 없다는 이유로 굳게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의안대군 이화는 화가 나서 그를 발길로 차 박자청의 안면에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궁궐 안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태조가 이를 알고 이화를 불러서 하교(下敎)하였습니다. “옛날에 주아부의 세류영에서는 다만 장군의 명령만 듣고 천자의 조서(詔書)는 듣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제 박자청이 대군을 받아들이지 아니한 것은 진실로 옳은 일이고, 의안대군은 잘한 일이 못된다.” 그리고 바로 박자청을 호군(무관 정4품)에 임명하고 은대(銀帶)를 하사하였습니다.
 

그후, 내부의 당직을 명하여 유막(幕) 밖에서 숙직 호위하게 했습니다. 박자청은 초저녁부터 새벽에 이르기까지 순행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잠시도 잠자리에 들지 않으므로 드디어 태조의 신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태조와 태종은 우직한 그를 무척이나 신뢰하여 마침내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그는 건축물을 조성하는데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고 전해 옵니다. 그는 태조 3년(1394년)에 공역(公役)에 첫발을 내디뎌 영선(營繕)의 감역관 재질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리고 태종 5년에 제조(提調)로서 창덕궁을 완공하고 이듬해 선공감(繕工監)이 되어 이때부터 나라의 영선관계 일을 주관하게 되었습니다.

태종 7년 성균관 문묘(文廟)를 완공했고, 이듬해에는 태조의 능인 건원릉과 태조의 정비 신의왕후의 능인 제릉(齊陵)의 산역(山役)을 주관했습니다. 그 공으로 그해 10월 공조판서에 임명되니 이른바 선공인(繕工人)으로서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그리고 태종 12년에는 경회루의 대역사를 태종의 명을 받아 불과 8개월 만에 해냈다고 합니다.

우리는 정도전을 조선시대 서울의 모습을 기획한 설계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박자청은 서울의 실제 모습을 만들어 낸 건축가라고 후인들이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박자청은 배우지는 못하였으나 다만 부지런하고 곧았습니다. 그러나 간관(諫官)들의 잦은 탄핵으로 파직과 귀양을 면치 못하다 결국 마지막 벼슬인 ‘판우군도총제부사’를 끝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만약 청와대에 박자청 같은 경호원이 단 한명만 있었어도 청와대에 보안 손님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지금 유례없는 대통령의 탄핵은 없었을 것이고, 또 최순실 같은 간악한 여인의 국정농단을 없었을 것이고, 대통령의 탄핵 같은 불행한 사태는 없을 것이 아닌지요?

요즘 이 나라가 몹시 혼란합니다. 매주 토요일이면 광화문과 대한문에서는 ‘촛불’과 ‘태극기’의 시위가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완전히 국민은 두 편으로 갈라져 서로 원수 보듯 합니다. 정말 땅을 치며 통곡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이렇게 허망하게 세계의 비웃음을 당해야 하는 것인지요.
 

천만다행인지는 몰라도 아마 3월초에는 헌법재판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관한 결론을 낸다고 합니다. ‘인용’이든 ‘기각’이던 운명의 돌은 던져집니다. 그 결정에 우리는 ‘촛불’이든 ‘태극기’ 쪽이든 깨끗이 승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난국을 딛고 우리는 다시 한 번 도약을 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박자청 같은 올바른 청와대 문지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다시는 보안 손님은 없을 것이고, 최순실 같은 국정농단은 일어나지 않겠지요!

단기 4350년, 불기 2561년, 서기 2017년, 원기 102년 2월 20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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