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특조위, 못다 한 이야기

 ▲ 박종운 변호사는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상임위원이자 안전사회소위원장으로, 이석태 특조위 위원장, 권영빈 진상규명소위원장과 함께 특조위의 구성부터 강제해산까지 전 과정을 일선에서 겪은 ‘특조위 트로이카’ 중의 한 사람이다. 세월호 특조위원으로서 공식 활동은 끝났지만, 그의 마음속에 세월호는 여전히 무거운 납덩이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지난 활동을 회고하는 그의 얼굴엔 만감이 교차했다.

“치아를 7개나 뽑아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무심코 이 닦다가 이빨 하나가 툭 빠지는데, 아프지도 않았어요. 안 아프고 빠지니까 좋기는 한데….(웃음)”

잇몸과 치골이 망가지면서 치아 전체에 손상이 왔다. 의사 말로는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했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해 동분서주할 때 치아 하나가 빠졌고, 세월호 특조위 활동을 하는 동안 두번째 치아가 빠졌다. 건성으로 붙어 있는 몇 개도 제 기능을 못하니 모두 빼고 인공치아로 갈아 넣으라고 하는데 한꺼번에 다 뺄 수가 없어 망설이고 있다면서, 그가 겸연쩍게 웃었다. 지난 3년간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듯했다.

박종운(52) 변호사는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상임위원이자 안전사회소위원장으로, 이석태 특조위 위원장, 권영빈 진상규명소위원장과 함께 특조위의 구성부터 강제해산까지 전 과정을 일선에서 겪은 ‘특조위 트로이카’ 중의 한 사람이다. 세월호 특조위원으로서의 공식 활동은 끝났지만, 그의 마음속에 세월호는 여전히 무거운 납덩이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지난 활동을 회고하는 그의 얼굴엔 만감이 교차했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해서 600만여명의 시민이 서명에 참여했다. 그 가운데 1차 수합분 350만1266명의 서명이 국회에 전달된 게 2014년 7월15일, 우여곡절 끝에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된 것이 그해 11월7일이다. 특별법의 시행일은 2015년 1월1일부터지만, 특별법에 의거해 구성하기로 한 특조위는 출범부터 휘청거렸다. 정부는 특조위가 독립적인 활동을 할 수 없도록 발목을 묶는 시행령을 내놓았고, 8월4일이 되어서야 당초 요구액의 44%를 삭감한 예산을 배정했다. 여당 추천 특조위원들은 ‘특조위 해체’를 주장하며 줄줄이 사퇴했고, 정부에서 파견된 공무원들은 노골적인 태업과 지시 불이행으로 특조위를 무력화시켰다. 결국 세월호 특조위는 지난해 6월30일자로 조사활동이 강제 종료되고 석 달 후인 10월1일 최종보고서도 내지 못한 채 박근혜 정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세월호 참사 900일 만이었다.

속절없이 무너지던 세월호의 불꽃을 다시 살려낸 건 촛불시민들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파면되었고 새 정부가 들어섰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이튿날인 5월11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세월호 특조위도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고 끝났기 때문에 다시 진실규명이 필요하다”며 은폐된 진상을 재규명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세월호의 진실 규명을 위해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지난 특조위 활동에서 얻어낸 성과는 무엇이고, 은폐된 진실은 무엇인가? 설립부터 해산까지 1년9개월간 세월호 특조위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지난달 31일 서초동 ‘법률법인 하민’ 사무실에서 박종운 변호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조위는 해산되었어도 우린 끝내지 않았다

-세월호 특조위가 강제 해산된 게 지난해 10월1일입니다. 그 이후 어떻게 지내셨어요?
“특조위가 종료되었다는 것에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었어요. 특조위가 활동을 시작하려면 인적, 물적 준비가 끝나야 하잖아요. 특조위에서 별정직 공무원을 채용해서 첫 출근 한 게 2015년 7월27일이고, 국무회의에서 특조위 예산안이 통과된 게 8월4일이거든요. 아무리 빨라도 그때 정도 되어야 설립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날로부터 치면 원래 법적으로 보장된 활동 시한은 올해 5월3일까지거든요.”

-원래 1년6개월까지 조사활동이 보장되고 추가 3개월간 보고서 작성을 하도록 되어 있는 거죠?
“네, 다 합쳐서 1년9개월이에요. 근데 박근혜 정부는 무조건 1월1일을 개시일로 보고, 10개월밖에 활동 못한 특조위를 강제 종료시킨 거죠. 특조위가 해산된 뒤 저도 일종의 트라우마 상태에 빠졌던 것 같아요. 아, 그렇게 많은 사람이 희생당하고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어떻게 이런 식으로 끝날 수 있을까, 분노하고 좌절했죠. 개인적으로는 세월호 참사 직후에 구성된 대한변협의 ‘세월호 태스크포스팀’ 때부터 일하기 시작해서 변협 산하 세월호특위를 거쳐서, 세월호 특조위까지 근 3년을 세월호에 몰입해 있었기 때문에 정신적 고통과 충격이 더 컸던 것 같아요.”

-트라우마가 어떤 증상으로 나타났나요?
“아…. 기억의 단절이 좀 있어요. 2014년 4월16일 이전과 이후 3년 동안 시간 사이에 군데군데 어떤 단절이…. 아마 제 마음속에서 충격이나 울분을 무의식적으로 지우려고 그러는 것 같아요.”
그는 처음 팽목항을 찾았을 때 일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세월호 특조위원이 돼서 간 건 또렷이 기억이 나는데 그 이전에 처음 참사현장을 찾았을 때 기억은 지워진 것 같다고.

-요즘엔 조금 나아지셨나요?
“마음속의 울분을 어쩌지 못해서 몇달을 고민했는데, 최근 5월3일이 지나면서부터 조금 짐을 던 느낌이에요. (박근혜) 정부는 인정을 안 하지만, 특조위 활동을 제대로 하려고 했던 사람들에겐 강제 해산이 됐든 어쨌든 올해 5월까진 특조위 사람이란 정체성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세월호 특조위원 중 9명은 강제 해산 이후에도 최근까지 매달 만나 회의를 했고, 조사관들도 그냥 헤어질 수 없다고 따로 조사관 모임을 꾸렸어요. 저도 변호사로서 영업활동을 하기는 부담스럽더라고요. 5월3일 활동 종료일이 지나기 전까지는.”

-마음속 임기가 안 끝나서요? 특조위에서 임금은 제대로 받았나요?
“지난해 7월1일 이후 특조위 조사관들 월급이 끊겼어요. 상임위원들에겐 그래도 7, 8, 9월 석 달간 급여가 나왔는데, 그걸 따로 모아서 특조위 활동 비용으로 쓰기도 했죠.”

-사비를 털어서 특조위 일을 했단 말씀이세요?
“특조위에서 청문회를 세 번 했는데 9월1~2일에 한 3차 청문회는 우리가 돈을 모아서 했다고 보시면 돼요. 정부가 특조위 조사기간이 끝났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정부 측 사람들은 증인으로 안 나올 게 뻔했고, 예산도 없고, 심지어 장소도 없었어요. 국회가 장소 이용을 불허해서, 하는 수 없이 사학연금회관 강당을 예약했는데 그마저도 교육부가 압력을 넣어서 취소되었죠. 결국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을 빌리기로 하고 청문회를 준비했지만, 장소 없지, 돈 없지, 증인 없지, 그 상태에서 청문회를 강행하는 게 맞을까, 아예 항의성 사퇴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내부적으로도 큰 논쟁이 있었어요.”

-사퇴하지 않고 강행한 이유는요?
“7월에 특별법 개정을 촉구하면서 단식농성도 했지만 아무 진전이 없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사퇴하고 나가면 그나마 10개월 정도 진행한 특조위 결과물들조차 보전이 안 될 것 같더라고요. 그 자료들이 국가기록원으로 넘어가고 나면 쉽게 찾아보기도 어려워져요. 그래서 남은 기간 이걸 잘 정리해서 서울시 추모관에 한 부, 안산시에 한 부, 국회 농해수위에 한 부….”

-믿을 수가 없으니까, 조선왕조실록 분산 보관하듯이….(웃음)
“이 정부에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었죠. 그러니 끝까지 남아서 그간의 자료라도 남겨둬야 정권이 바뀌든 새로운 특조위가 생기든 계속해서 그걸 이어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2000년 변호사 생활 시작하면서
난민·장애인 등 돕는 공익활동
우여곡절 끝 특조위 출범했지만
박근혜 정부, 활동 방해 ‘시행령'
종합보고서도 못 내고 강제해산
특조위 종료 도저히 동의 안돼
특별법 개정 등 촉구 단식농성
예산 지원도 없이 3차 청문회
“10개월 활동 자료라도 남겨둬야 
계속 이어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박종운 변호사는 난민과 이주노동자, 장애인과 탈북자들을 돕는 공익활동에 참여해왔다.

‘마이너스통장이 있어서 괜찮아요.’?

-지난해 7월 이후 특조위원이나 조사관들은 어떻게 생활하셨죠? 일은 일대로 하면서 봉급은 못 받았으니.
“그래도 변호사들에겐 마이너스통장이라는 게 있어요.(웃음) 제가 모아놓은 돈이 많지 않아서 첨엔 근근이 버티다가 마이너스로 돌아섰죠. 부모님께 생활비를 드렸었는데 부모님이 그걸 모아뒀다가 보태주시기도 했고요.”

-가족들도 고생이 많았겠어요. 자녀는 어떻게?
“고3 딸, 고2 아들 있어요.”

-고3 아빠시군요.
“뭐, 고3이라고 특별히 해주는 것도 없어요. 저나 아내나 공부하라고 닦달하는 스타일은 아니라서…. 살아보니 공부 잘한다고 좋은 사람 되는 거 아니더라고요. 공부 열심히 한 우병우 같은 사람 보세요.(웃음)”

-수험생 뒷바라지에 돈도 많이 들 텐데요.
“제가 변호사 후배들한테 하는 얘기가 있어요. ‘강남 살지 말고 사교육에 몰빵하지 마라.’ 그거 하려면 돈 많이 벌어야 해요. 그럼 변호사들이 공익활동 하기 어려워집니다. 선배들 보면 강남에 아파트 얻느라 돈 쏟아붓고, 사교육비에 엄청 돈 들이고, 그 결과는 뭐냐? 기러기아빠 되는 거예요.(웃음) 부인 딸려서 애들 유학 보내고, 자기 혼자 술 먹다가 암 걸려서 돌아가시고. 그런 삶은 아닌 것 같아요.”

-아이들은 불만 없대요?
“아빠가 변호사라고 특별할 건 없다고, 돈 많이 버는 변호사 아니니까 한 과목에 몇십만원짜리 과외 같은 건 못 시킨다고 했어요. 그런 돈 있으면 다른 데 도와야지. 애들도 얼추 동의하고요, 학원에서 시간 뺏기는 거 싫대요. 딸애는 고3이지만 사물놀이도 하고(웃음) 혼자 알아서 그럭저럭 하는 편이에요. 어차피 공부는 스스로 하는 거니까. 저도 시골에서 자라서 그렇게 공부했고요.”
박종운은 전남 함평 태생이다. 학다리초등학교, 학다리중학교, 학다리고등학교까지, 넉넉지 못한 소농 집안이라 도시로 유학 갈 생각은 못하고 고등학교까지 함평에서 나왔다. 성균관대 법대를 졸업하고 97년 사시에 합격해서 2000년부터 변호사 생활을 했다. 보험 전문 변호사로 일하면서 난민과 이주노동자, 장애인과 탈북자들을 돕는 공익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모태신앙의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에게 변호사로 일한다는 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좇아 ‘하나님나라 운동’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기우는 천칭 떠받쳐야 평화가 온다?

-하나님나라 운동이 뭐죠?
“가장 높은 가치가 전 평화라고 생각해요. 평화롭고 안전하게 잘 사는 것. 이 세상을 하나님나라가 되게 한다는 건, 사랑과 공적인 정의를 통해서 ‘형평’케 함으로써 평화를 이루는 거예요.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그들이 부자하고 같은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게끔 끌어올려주는 게 형평이죠. 단순한 공산주의적 평등이 아니고 인간의 존엄성이 구현될 수 있게 하는 거요.”

-세월호 특조위 일에 나선 것도 그런 맥락이었나요?
“변호사를 애드버킷(advocate)이라고 하는데 어떤 사람을 지지 옹호한다는 뜻이잖아요? 정의의 여신상을 보면 천칭을 들고 있는데, 어느 한쪽이 기울면 그걸 이렇게(손바닥을 위로 올리며) 끌어올려 주는 거예요. 법률적으로 대등한 당사자를 만들어주는 게 변호사의 역할이죠. 대형 참사가 발생하면 대개 그 가해자는 국가거나 대기업 혹은 지방자치단체일 가능성이 높아요. 그 참사로 가장 많은 피해를 받는 사람은 주로 사회경제적으로 약한 사람들이고요. 그들이 가해자와 대등한 당사자로 협의할 수 있게끔 법률지원을 해주는 일, 그게 변호사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지난 3월에 종교개혁 500주년 기도회에서 ‘세월호와 고통받는 이웃을 위한 기도’를 하시며 오열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봤습니다.
“제가 원래 대중 앞에서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전혀 아니고요, ‘할렐루야’ 이런 것도 잘 못하는데, 제 바로 앞 순서로 박은희 전도사, 단원고 예은이 엄마죠, 그분이 5분 메시지를 하셨거든요. 그분 얘기 들으면서 이미 울기 시작했어요. ‘가족들의 아픈 마음을 하나님이 아실 거고, 갚아주실 거다’ 생각하니 그렇게 북받치더라고요. 나중에 보니 좀 창피하데요.(웃음)”

-그 기도가 통했나 보네요. 며칠 뒤 박근혜 파면 결정이 났으니까.(웃음) 그런데 개신교 대형교회를 필두로 탄핵무효를 주장하는 태극기집회가 격렬하게 벌어졌죠.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개신교 안에도 여러 스펙트럼이 있어요. 오늘도 바로 이 앞(법원 앞)에서도 시위하고 있어요. 태극기 들고 우리 대통령 석방하라고. 그럴 자유가 있죠. 존중해야 하고요. 근데 어떤 사람들은 정치적인 의견을 신앙적으로 발언하는 게 아니라, 신앙을 빙자해서 자기의 이데올로기를 발언하거든요. 성경 말씀을 빙자하지만 개인적인 이데올로기가 담겨 있는 거죠. 전 그게 개신교 문제라기보단 사회문제라고 봐요. 교회개혁과 사회개혁은 서로 맞물려 가는 겁니다. 아무리 교회가 깨끗해지려 해도 박근혜 정부 아래선 잘 안 움직여요. 권력에 붙어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사회가 개혁되면 그 개혁된 사회로부터 깨달음을 얻는 사람들이 생기죠.”

-박근혜가 파면되었으니 좀 달라질 거란 말씀인가요?
“제가 성대 84학번인데 87년에 ‘박종철을 살려내라’고 시위에 나갔어요. 그때 사람들이 ‘니네 때문에 장사 안된다’며 우리를 발 걸어 넘어뜨리고 경찰에 넘겼어요. 후배들이 그걸 보면서 엄청 충격을 받았죠. 이른바 ‘민중’이라는 사람들을 위해서 시위에 나간 건데, 그런 우릴 잡아다가 경찰에 넘기다니…. 근데 그로부터 불과 몇달 후에 6월항쟁이 일어났어요. 사람들은 보통 이기적인 욕망에 따라 행동하죠. 그러다 어느 시점에선가 이기적 욕망엔 반하지만 사회 전체, 더 큰 자아를 위해서 변하게 되는 한계점이 있는 거예요. 전 촛불도 그런 경우라고 봅니다. 촛불 든 사람들이 옛날부터 다 그랬던 사람들인가? 아니거든요. 소시민적으로 내 일상의 삶을 위해서 살아오고 웬만한 건 참고 넘어가는데, 어느 순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한계점, 이 사회와 나라를 위해서 내가 다른 액션을 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는 거죠.”
이기적인 욕망에 휘둘리던 소시민들이 불의에 맞서서 성난 노도처럼 일어서는 장면은 장엄하고 강렬하다. 그러나 그게 언제까지 지속될지, 어떤 방향으로 이어질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3년 전 무고한 생명들이 세월호 밑바닥에 갇혀 산 채로 수장되는 걸 목격했을 때도 그랬다. 많은 이들이 노란 리본으로 긴 띠를 이루며 ‘잊지 않겠다’ ‘뭐라도 하겠다’고 눈물로 맹세했다. 그러나 그때 눈물 흘린 사람들이 끝까지 모두 세월호를 지킨 것은 아니었다. 특조위 사람들이 정부의 강제 해산에 반대해 단식농성을 벌일 때 광장에 모인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적어도 촛불광장이 다시 불을 밝히기 전까진 그래 보였다.
 
세월호의 ‘세’자도 싫다던 박근혜?

-결론부터 여쭙겠습니다. 세월호 특조위는 실패한 건가요?
“법이 정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점에서는 실패라고 봅니다. 종합보고서를 내지 못했으니. 특조위가 종합보고서를 내려면 전원위원회에서 의결된 진상규명조사보고서가 있어야 하는데 선체조사라는 핵심적인 대목이 빠진 상황에서 결론을 낼 수 없었습니다. 조사활동 기간 1년6개월이 다 채워졌으면 또 모르겠는데 10개월 정도밖엔 일을 못하고 조사활동이 종료된 것도 문제고요.”

-가장 큰 패인이 뭡니까?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청와대에서는 세월호의 ‘세’자만 들어가도 뭐라고 한다, 최순실은 지나가다가 노란색만 봐도 노란 리본 생각나서 싫다고 한다… 그런 거예요. 통상적인 정부라고 하면 해결이 되었을 거예요. 박근혜 정부라고 하는 특별한 상황,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를 언급조차 하기 싫어하고, 참사 관련해서 뭐가 올라오면 거부하고, 그런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위원회의 한계가 있더라도 특조위에서 상당 부분 해결했을 겁니다. 권력이 지지해주면 공무원들 태도가 달라지니까요.”

조직 인력·예산 갖추는 데 8개월
청와대 세월호 언급조차 꺼리고
해경 공무원은 ‘왜 날 부르나’ 대응
조사 돕던 공무원들 어려움 호소
지시 따르지 않는 파견공무원들도
2기 특조위 만들려면 법 제정 필요
여야간 협상 등에 시간 걸릴 듯
참사에서 교훈 못 얻는 게 ‘비정상’
“돈으로 끝내지 않고 끝까지 매달려
진실 밝히고 안전사회 길 찾아야”

-세월호 진상규명소위원장을 한 권영빈 변호사는 최근에 발간한 책 <머나먼 세월호-세월호 특조위와 함께한 시간>에서 “특조위 활동의 성과 중 하나는 정부 여당이 특조위 활동의 가장 큰 방해세력이라는 것을 확인했다는 점이다”라고 썼어요. 그들이 이럴 줄 몰랐던 건가요? 상황을 너무 안일하게 본 건 아닌가요?
“양극단의 평가는 피하는 게 좋겠어요. ‘특조위가 한 게 뭐 있어?’ 식의 평가나 ‘그래도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얻은 최선의 결과물이야’ 같은 평가, 둘 다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제가 처음에 실패라고 말한 건, 종합보고서가 만들어져서 그게 국회나 정부에 정책공고 형태로 가고 그걸 이행하게끔 만들었어야 하는데 못했다는 거죠. 어떤 핑계를 대도 못한 건 맞고요. 그러나 내부적으로 따져보면 우리가 일을 할 만큼 인적 물적 토대가 갖춰지는 데만 8개월이 걸렸고, 정원이 120명인데 100명을 채워본 적도 없어요. 그나마 배치된 파견공무원들도 2015년 1월16일 김재원 당시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가 ‘세월호는 세금도둑’이라고 발언하고 나서 태도가 싹 달라졌어요. 뭔가 라인이 있었던가 봐요. 대놓고 ‘세월호는 일반 사고인데 뭘 조사할 게 있다고 날 부르는지 모르겠다’고 한 해경 소속 공무원도 있었어요. 가만 놔두면 공무원들이 기본적인 일은 해요. 개중엔 우릴 진짜로 도우려는 직원도 있었고요. 근데 청와대 라인에서 전화가 왔다 그러면, 담당 직원이 우는 거야. 왜 우냐고 하면, 자긴 할 일을 한 건데 ‘너 왜 특조위 일을 그렇게 하냐?’고 지적받는다고…. 그러니 공무원들도 어려움이 있었겠죠.”

-내부 기강을 확실히 잡을 방법은 없었나요? 열심히 일하는 별정직 조사관들도 그런 느슨한 관리 구조에 불만이 많았다던데.
“충분히 그런 말 나올 수 있어요. 근데 우리가 특조위 지시를 따르지 않는 파견공무원들을 최대한 업무에서 배제하는 것 말곤 달리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없었어요. 특조위가 파견공무원들을 징계할 권한이 없거든요. 징계하라고 소속 기관에 의견을 낼 수는 있지만, 그쪽에서 징계를 안 하겠죠. 오히려 영웅 대접 할걸요.(웃음) 자기들 말 잘 들어서 징계권고 받아 왔다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게, 박근혜는 세월호 특조위에 대해서 왜 그렇게 방어적이고 적대적이었을까요?
“글쎄요, 숨겨야 할 만한 엄청난 비밀이 있어서 그렇다는 가설이 가능하죠. 그 비밀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세월호 특조위는 반민특위하고도 다르잖아요. 반민특위는 친일파의 정치적 단죄를 목적으로 한 거라서 이승만과 기득권층이 기를 쓰고 와해한 건데, 세월호는 조사할 것 조사하고 해경이든 해수부든 처벌할 것 처벌하고, 대통령이 당일 날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한 점이 있으면 솔직하게 사과하고, 그렇게 처리해도 될 일 아닌가요?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죠.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될 만큼 감추려 들기 때문에 그 안에 뭔가 거대한 음모가 숨겨져 있지 않나 추정이 되는 거죠.”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받은 문서의 목록조차 국가안보를 이유로 기밀로 봉인되어 있다. 대통령지정기록물로 분류되어 이 문건들은 최장 30년간 공개가 금지된다. 현재 이 기록물의 봉인 해제를 위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비정상의 정상화’가 필요한 시기

-이제 2기 세월호 특조위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2기 특조위가 있어야지요. 근데 그걸 하려면 다시 세월호 특별법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전 특별법을 개정하거나 연장할 순 없고요?
“아예 활동시한이 끝났으니 그건 어렵죠. 새로 법안을 제정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여야간 협상도 필요하고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 이전에 우선 대통령 직속의 행정위원회로 세월호에 대한 자문기구라도 만드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기 특조위 출범을 전제로 하되, 1기와 2기 사이에서 과도기적으로 청와대와 정부 수준에서 지시하거나 감찰할 수 있는 것들을 하도록 하면, 2기 특조위 출범 전이라도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는 것들이 꽤 있어요.”

-미완의 1기 특조위원으로, 가장 회한이 남는 점이 있다면?
“저는 사실 특조위 들어갈 때 갈등 상황을 중재하는 피스메이커 역할을 하겠다 생각했어요. 지금 와선 그 역할에 대해 회의가 들어요. 어떻게 하든 결론은 똑같은데, 내가 왜 그렇게 여당 추천 상임위원들하고 잘해보려고 그들에게 공을 들였나 싶고요. 상대의 의도를 간파하고 좀 더 분명하게 입장 정리를 할 필요가 있었다고 봅니다.”
그가 다음 약속을 위해 떠나기로 한 시간이 살짝 넘었다. 서둘러 인터뷰를 정리하려는데, 그가 꼭 덧붙일 말이 있다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왜 이렇게 안 끝나냐? 왜 이렇게 오래 끄냐?’ 그런 시각도 있는데 이렇게 되는 게 맞아요. 이게 ‘정상’이에요. 과거처럼 참사 발생하면 피해자들한테 위자료나 주고 끝내버려서 사실상 참사로 인한 교훈을 얻지 못하는 거, 그게 ‘비정상’입니다. 과거에 서해훼리호 사건이 나서 사람이 꽤 죽었죠. 그냥 배상해주고 끝났어요.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어요. 502명이 사망했어요. 그거 고치려면 건축과 관련된 제도 확 뜯어고쳐야 하는데, 처음에만 떠들다가 ‘다 배상받았대, 그러면 끝났네’ 그랬어요. 장기적인 안목으로 끝까지 싸워가는 근력이 약했던 거죠. 세월호처럼 돈으로 끝내지 않고 끝까지 매달려서 진실 밝히고 안전사회로 가는 길을 찾아야 해요. 그런 점에서 난 우리 국민들이 세월호 가족들한테 정말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월호특조위 조사관의 임무는 끝나지 않았다

외면하고 회피했다
세월호 특조위 조사관 모임 지음/북콤마·1만2500원

2015년 8월 활동을 시작해 조사 기한을 다 채우지 못한 채 2016년 9월 강제 종료된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세월호특조위). 조사관 31명은 세월호특조위가 해산된 뒤 와이엠시에이(YMCA)전국본부가 마련해준 서울 마포구의 한 사무실에 자리를 잡고 민간인 신분으로 조사 활동을 이어나갔다. 이들은 세월호 참사를 조사한 결과를 담은 책을 지속적으로 출판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외면하고 회피했다>는 그 첫번째 결과물이다.

조사관들은 책 한 권에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방대한 세목을 모두 욱여넣겠다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대신 참사 당일 정부의 대응 체계와 행적을 꼼꼼히 정리해 책임 소재를 가려내는 데 집중했다. 참사 당시 국가엔 ‘책무성’이란 개념이 없었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 말하는 책무성이란 ‘국가가 재난에 대응할 때 누가 의사 결정에 책임이 있고, 누가 그 결정을 실행했는지, 더 나아가 그 결정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할 때 시민은 거기에 어떻게 도전할 수 있는지를 시민에게 밝히는 것.’ 사건 발생 직후 ‘행정 집행’을 해야 할 해경, 안전행정부, 해양수산부, 청와대와 대통령까지 일관되게 외면하고 회피했다. 정부 책임 주체들의 머릿속엔 ‘책무성’ 대신 ‘보신’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책에는 ‘했어야 했다’로 끝나는 문장이 잦게 나타난다. 참사 당일 각 책임 주체들의 시간별 행적을 비교하면서 ‘누락된 것’과 함께 ‘조처했어야 하는 사항’을 기록해서다. 잊지 않아야 할 것은 희생자의 이름만이 아니다. 상부 보고와 부처간 떠넘기기에 매몰돼 마땅히 했어야 했던 일을 하지 않았던 이들을 잊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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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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