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조선이 온통 일제 친인매국노 구렁텅이에서 도육됐지만 나라를 위해 의연한 자주독립투사의 용맹을 꺾지 못했다

왕산 허위 111주년 기념행사에 참여했던 구미시민 및 관련단체인사 / ⓒ 문해청 기자
왕산 허위 순국 111주년 기념행사에 참여했던 구미시민들 및 관련단체인사 / ⓒ 문해청 기자

[뉴스프리존,대구=문해청 기자] 민족문제연구소구미지회(지회장 전병택)와 왕산기념사업회 및 왕산 허위 선생 기념관(사무국장 최기준), 구미참여연대(집행위원장 박찬문) 등 구미지역시민사회단체는 20일 구미지역 독립운동정신계승 선양을 위해 왕산 허위 선생 순국 111주년 추모식을 개최했다.

연대단체는 몽양 여운형 선생 기념사업회(이사 이재섭), 애국지사 박선광 선생 기념사업회(사무처장 박정용), 독립투사 민족시인 이육사기념사업회(상임대표 강창덕), 조국통일 범민족연합남측본부대경지부(의장 한기명), 영남민요연구회(임규익), 광복회대구지부(지부장 노수문), 생명사랑(대표 송성진), 민주화운동원로회의(김병길) 등이다.

다음은 추모식순이다. 개회 노래, 국민의례 국기 경례, 임시정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 호국영령 묵념, 지회장 인사말 내빈소개, 왕산 선생 공적보고, 유언낭독, 추모사 - 박원순시장 추모사(대독), 광복회 김원웅 회장 추도사(대독), 추모시낭송(해마루초등) 조예원, 정아린, 의병아리랑공연(영남민요연구회, 독립군가 제창, 분향, 헌화, 폐회 순이다.

다음은 왕산 허위 선생의 생애이다.

1855년 4월 2일 구미 임은동 청추헌 허조의 넷째 아들로 출생. 1896년 3월 김산(김천)에서 창의하여 성주, 충청도 진천 등지에서 활동 중 고종의 명에 따라 의병을 자진해산 후 청송에서 학문에 전념.

1899년 3월 벼슬길에 나서 5년간 성균관 박사, 중추원 의관, 평리원 재판장, 의정부 참찬, 비서원승을 역임하고 종2품 가선대부에 이름. 1905년 외교활동을 위한 비밀 독일방문계획 실패, 일본의 만행규탄 격문 살포로 구속 되어 4개월간 투옥, 벼슬에서 물러나 김천 지례로 은거.

1907년 경기도에서 의병을 모아 포천, 양주, 철원, 장단, 연천 등지에서 의병장으로 활동. 해산당한 관군까지 받아들여 전국연합의병인 ‘13도 창의군 결성’ 경기대장 겸 군사장으로 추대. 창의군은 일제 통감부 공략을 결정하고 각 의병대가 분산 출발,

왕산은 300여명의 선발대를 지휘하여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이르렀으나 후원군의 도착 지연과 일본군의 기습으로 연천으로 패퇴. 부친상을 당한 총대장 이언영 귀향으로 왕산은 임진강 유역에 재집결하고 연합 의병의 총대장으로 활동했다.

이때 총리대신 이완용이 관찰사나 내부대신 자리로 왕산을 유혹했으나 꾸짖고 거부함. 1908년 5월 24일 연천에서 일본 헌병부대의 기습으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같은해 10월 21일(음력 9월 27일) 교수형으로 순국. 1962년 건극공로훈장 대한민국장(1등급) 추서.

다음은 서울특별시 박원순 시장의 추도사 전문이다.

1908년 10월 21일 우리민족은 일제에 의해 위대한 지도자 한분을 잃었다. 바로 한성감옥(서대문형무소)에서 첫 번째로 사형집행을 당한 왕산 허위 선생이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던 선생의 순국에 주권을 잃은 우리민족은 목 놓아 울지도 못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책이 아닌 칼을 든 선비가 되어야 했던 선생의 전 생애는 애국을 향한 대장정이었다. 1855년 경북 구미의 명망있는 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항거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민족이 처한 깜깜한 현실에 잠시만 눈감으면 어쩌면 수많은 학자와 관료가 그랬던 것처럼 편하게 살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더 높은 지위와 더 많은 부를 거머쥘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성균관 박사, 중추원 의관, 평리원 수반판사, 평리원 재판장과 의정부 참찬과 같이 수많은 관직을 역임한 선생에게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일신의 편함이 아닌 항일투쟁이었다. 전국의병연합체인 ‘13도 창의군’을 결성하여 서울 진공작전을 이끈 선생의 항일투쟁은 수많은 독립운동가에게 귀감이 되었다.

이처럼 선생의 숭고한 항일투쟁이 있었기에 우리역사는 3.1운동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품을 수 있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책이 아닌 칼을 든 선비가 되어야만 했던 선생의 의기에 진심어린 존경을 표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너무나 부끄럽다. 선생께 역사를 빚진 후손으로서 너무나 죄송하다.

한 집안에 14명이나 되는 독립운동가를 배출할 만큼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신 선생과 선생 가족의 후손들은 아직도 대한민국에 돌아오지 못한 체 중국과 러시아 등지에서 뿔뿔이 흩어져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

저는 오늘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온 생애를 불태운 선생의 영전 앞에서 다시 널리 퍼질 수 있도록 기억하고 기리겠다. 다시 한 번 한 없는 존경과 추모의 마음을 담아 선생의 평안한 안식을 기원한다. 아울러 오랜 시간 고통과 시련의 세월을 감내해 왔을 후손들게 감사와 사죄의 마음을 전한다.

왕산 허위 순국 111주년 기념행사에 참여했던 왕산 허위 가문 후손 및 구미시민들과 관련단체인사ⓒ 문해청 기자
왕산 허위 순국 111주년 기념행사에 참여했던 왕산 허위 선생의 가문 후손 및 구미시민들과 관련단체인사ⓒ 문해청 기자

다음은 광복회 김원웅 회장의 추도사 전문이다.

대일항쟁기에 여느 독립운동가보다도 앞장서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신 왕산 허위선생님의 순국 111주기를 맞아 경건히 추모의 예를 올린다. 왕산께서는 1855년 이곳 임은동에서 나시어 33세의 적지 않은 나이로 벼슬에 올라 성균관 박사를 거쳐 중추원 의관, 비서원승 등을 지내셨다.

을사늑약이 일어나자, 격문을 살포하고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54세의 나이로 서대문형무소 제1호 사형수로 순국하신 선생님께서는 ‘전국 13도 연합의병 창의군’을 이끄셨다. 평생 구국의 일념으로 항일투쟁의 일관된 삶을 사신 분이 바로 왕산이며, 이는 가풍의 영향이 컸다. 애국자 집안에서 애국자가 나고, 친일파의 집안에 친일파가 나는 법이다.

오늘 추모식의 주인공이신 왕산 선생 집안은 무려 14분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곳 구미시의 자랑은 말할 것도 없고, 경북인의 자랑이자, 대한민국의 자랑이다. 그런데 편협한 지역주의에 갇혀 왕산의 정신계승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아마도 구미시민은 물론, 역사와 국민 앞에 떳떳하지 못할 것이다. 독립유공자는 한 집안의 조상이 아니다. 특정지역의 인물로만 인식되어서도 안된다.

구미는 왕산이라는 큰 인물의 고장이다. 왕산은 이곳 임은동에서만 모실분이 아니다. 구미시민 전체, 아니 우리국민 모두로부터 존경을 받아야 할 분이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100주년이 되는 해이자 왕산 허위 선생 기념관 건립 10주년이기도 한 의미 깊은 해를 맞아 관내 공원의 시설물 명칭 변경을 막지 못해 그로 인해 후손된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고 상심이 크신 유족분의 마음을 깊이 위로한다.

관계관청, 당국은 이번 일로 유족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에 앞서, 극소수 지역민의 민원에 의해 역사와 구미시민의 명예를 실추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높은 기상과 절개의 왕산이시어. 선생님의 올곧은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 국민 모두가 지역주의를 극복하여 마음을 하나로 모아 더 크게 나라와 민족의 번영을 이룰 수 있는 가르침을 주시옵소서.

다음은 해마루초등 4학년 조예원(이육사 “광야”), 정아린(심훈 “그날이 오면”) 학생이 추모시를 낭송을 했고 아래는 심훈 “그날이 오면” 이다.

// 그날이 오면 // 심훈 //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 이 목숨이 끓기기 전에 와주기만 할양이면 /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 두 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 //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에 가슴이 미어질듯 하거든 /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 커다란 불을 들쳐 메고는 /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 우렁찬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

다음은 민족문제연구소구미지회 장상수 감사의 왕산 허위 유언낭독 요약이다.

왕산 허위 선생은 고종에게 을사오적 친일매국노 목을 베라고 상소를 올릴 정도로 나라를 구하려고 온 몸을 던진 분이다. 그러나 선생은 결국 친일매국노 이완용 일당에게 체포되어 일제에 의해 사형을 당할 정도로 일찌감치 항일투쟁전선에 나선 대한민국 톡립투사의 상징적인 분이다.

왕산 허위 가문은 그의 형제와 후손을 포한하여 왕산가 외손인 이육사 형제, 사위 이기영과 3형제, 직계제자인 대한광복회 총사령광 박상진 의사를 비롯하여 가문 전체와 제자까지도 항일무장투쟁으로 조국의 해방, 자주독립을 위해 희생되었다.

왕산 허위 선생은 죽음에 임하여 다음과 같이 유언을 남겼다. “국가의 부끄러움과 백성의 치욕이 이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이 하리오. 아버지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나라의 주권도 회복하지 못했으니 불충불효한 몸이 죽은들 어찌 눈을 감으리오.” 했다하며 왕산 허위 선생과 그 가문의 숭고한 나라사랑정신이 구미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전체에 알려지기를 소원한다며 담담하게 밝혔다.

SNS 기사보내기
뉴스프리존을 응원해주세요.

이념과 진영에서 벗어나 우리의 문제들에 대해 사실에 입각한 해법을 찾겠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요.

정기후원 하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뉴스프리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