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5년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이번 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싼 논란을 “역사전쟁”이라고 표현했다. 경제학부 이영훈 교수는 “절체절명의 이념전쟁”이라고 표현했다. 국정화에 반대하는 어떤 이들은 가치관과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국정화라는 비상식과 검인정 혹은 자유발행 이라는 상식 사이의 대결로 문제를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혹자는 국정화 문제에 국한해 싸우지 않고 정부에 대한 정치투쟁을 벌이는 민중총궐기와 일부러 선을 그으려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실상이 그러한가? 이승만과 박정희를 한층 격상하고 “투쟁일변도의 역사”를 자부심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교과서 개정의 목적은 지극히 이념적이다.

국가가 선포한 역사전쟁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대투쟁 이후 보수주의 세력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국부(國父)나 다름없었던 박정희는 쿠데타 주동세력이 되었다. 이 나라의 지배층인 새누리당과 자본가들에게 이는 이념적 위기였다.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을 전면에 폭로한 전태일이 기억에 남고, 노동조합의 공로를 인정하면 이들의 이데올로기에 파열구가 생기고, 그 파열구에서 더 나은 사회,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상상력이 피어나기 때문이다. 세계화 시대에 발맞춰 신자유주의를 전면에 도입해야 했던 지배층의 전략과는 정반대의 가치들이 역사에 기록될 상황에 놓인 것이다.

이미 파산한 한국식 민주주의나 반공과는 다른 새로운 신화가 필요했다. 그래서 1990년대 중반부터 꺼내든 카드가 한국 자본주의의 성립과 발전이었다. 군사정권도 폄하했던 이승만이 농지개혁과 초등의무교육 등 근대자본주의체제의 기틀을 닦은 인물로 격상되기 시작했다. 박정희의 공적 역시‘ 주식회사 대한민국 CEO 박정희’처럼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했다.
▲ ⓒ한국일보
이러한 흐름은 2008년 전경련의 대안경제교과서, 교과서포럼의 대안역사교과서 찬술로 이어졌다. 이후 뉴라이트 세력은 교학사의 한국사 교과서 출간으로 정식 교과서 시장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지만, 미미한 채택률에 실질적인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 직후 정부가 국정제를 검토, 준비하여 내놓은 결과가 이번 발표다. 그들만의 국가운영전략을 위해 필요한 정통성 확보, 이를 위해 선포한 역사전쟁이 2015년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추진이다.

국가로부터 배제된 기억, 기록된 기억

지금까지 우리 역사에 들어온 ‘불편한 기억’들에는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성과를 남겼다는 공통점이 있다. 전태일의 분신은 청계피복노조로, 구로동맹파업으로, 노동자대투쟁으로 이어졌다. 1990년대 초 노동법 개정 투쟁으로 노동자가 정치의 한 주체로서 다시금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독립운동의 역사는 말할 것도 없으며, 민주화 투쟁에서 처벌받은 자들이 폭도에서 민주화 유공자로 입장이 바뀐 것은 1987년 6월 항쟁의 결실이다.

반면 우리 역사에 여전히 배제된 기억도 있다. 민족해방운동에서 조선공산당의 역사와 해방정국 노동자 항쟁 및 변혁운동은 한국의 정체성인 자유주의에 걸맞지 않기에 기록되지 않는다. 6.25의 잔해에 한국군과 미군의 위안부 문제는 여전히 가려져 있으며, 경제성장과 한미동맹의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 베트남 인민을 살육한 사건은 지워졌다. 경제성장의 수치와 그들의 정통성에 필요한 기록만 남고, 다른 인간의 존재는 이토록 무참하게 소거된다. 마르크 블로크가 “ 역사학은 인간들에 관한 학문”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기계나 풍경, 제도 너머로 인간들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지만, 지배자들은 인간을 배제하고 건국과 경제성장의 신화를 써나가고 있다.

배제될 것인가, 살아남을 것인가

지금이라고 다를까. 일반해고제 도입에 앞서 해고와 노동유연화로 희생당한 노동자의 생명은 고려 요소가 되지 않는다. 유명한 사례인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의 희생자조차 해고제도의 희생자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다 죽어간 노동자는 현재 국가의 국시(國是)인 신자유주의에 반항했다는 죄를 물어 역사의 무대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국가는 역사와 미래를 동시에 손보는 대규모 공세를 펼치고 있다. 그것이 노동개악이요, 세월호 참사 진상은폐요, 민영화와 FTA를 비롯한 일련의 신자유주의 정책들이요, 마침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이다. 개별 정책을 정할 때에는 한 순간의 오판이 가능하다손 치더라도, 역사는 나름대로의 가치관과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면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영역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고시는 국가권력이 민중의 존재를 배제하려는 의도를 명백하게 드러낸 사건이다.

마찬가지로 정부를 타도하자는 구호, 다른 요구들이 결부된 민중총궐기와 국정화 반대 투쟁이 같은 자리를 지킨 것은 단순히 세력 과시를 위함이 아니다. 박근혜정부를 몰아내지 않는다면 민중은 물질도, 이념도 다 잃어버릴 수 있다는 판단의 결과다. 우리는 역사에서 배제될 사람과, 사람을 배제하는 국가 사이에 선택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살아가고 있다.

민중총궐기에 대한 철저한 탄압으로 정부는 각계각층의 다양한 요구를 원천적으로 배제하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 번 천명했다. 역사와 미래에 한 치의 양보도, 의견 수렴도 하지 않는 정부의 행정은 공권력 행사가 아니라 압제이다. 그리고 압제에 맞서는 싸움을 회피한다면 우리는 후세가 이어갈 역사에 또 하나의 과오를 저지르는 셈이다. 다양한 요구 때문에 민중총궐기에 함께하지 못한다는 판단이 아니라, 다양한 요구를 원천 봉쇄하는 국가에 맞서 민중의 총궐기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필요하다.

현실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데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블로크는 “고대의 정신상태나 소멸한 사회형태의 특징을 규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명칭 자체도, 만약 현재 살고 있는 인간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살아가는 것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과거의 기억은 한낱 골동품이나 유희거리일 뿐이다. 우리는 이 국면을 살아가는 인간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어떤 문제의식으로 역사서술을 둘러싼 투쟁 앞에 서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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