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4일 새벽,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전 법무부장관 조국씨의 부인 정경심 교수가 마침내 구속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사태의 이면에는 ‘증오의 종교’가 자리 잡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라가 이렇게 시끄러운 것은 아무래도 보수적인 정치이념을 갖고 있는 일부 종교인들의 그림자가 얼른 거리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래 전 어느 성당 주일미사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신자들이 자유로이 기도문을 지어 염송(拈頌)하는 ‘신자들의 기도’ 시간에 북핵문제로 긴장이 고조되던 시기여선지, 한 청년이 “김정은 일가가 하루 빨리 몰살당해 북한이 망하고 이 땅에 평화가 오게 하소서.”라는 기도문을 올렸습니다.

미사를 집전한 사제는 미사 후 청년을 따로 불러 “우리 크리스천은 기도 중에 누구를 잘못 되라고 저주는 못해요. 심지어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라고 타일러 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청년은 대뜸 ”내 맘대로 기도도 못하면 성당엔 왜 나와야 하죠?“ 하고 반문했습니다.

이튿날은 청년의 모친이 찾아와서 신부님에게 불쑥 한 마디 던지고 갔다고 합니다. “신부님, 북한 좋아하시나본데 이북 가서 사시죠.”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기독교의 본질은 ‘사랑’이라고 배웠습니다. 사랑은 증오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던가요?

‘평화의 사도’를 자처하는 크리스천들이, 비록 일부지만, 민족화해와 경제정의라는 정치문제만 나오면, 견해가 다른 진보인사들에게 집단적 증오를 가차 없이 쏟아내는 언행이 고스란히 보수언론에 보도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부 종교인과 정치인들은 광화문 광장에서 국가원수에 대한 막말을 쏟아 내며 심지어 청와대로 쳐들어가자는 말을 실제로 행동에 옮기려는 모습까지 보여줍니다.

이는 기독교 2000년 역사가 그만큼 굴절된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요? 로마 제국 300년 박해를 벗어나고 유럽전역이 기독교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종교는 자기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까지 믿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장검에 새겨 이단자 박해, 십자군 전쟁, 마녀 화형, 유대인 학살, 30년 종교전쟁을 자행하면서 ‘증오의 종교’로 변신해 온 것에서 시작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한국기독교는 신구교가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에 열중하였습니다. 그리고 해방을 맞고 38선으로 국토가 양분되자 ‘반탁운동’에 앞장섰습니다. ‘반공의 보루’로 변신한 것이지요. 신실한 믿음으로 국가를 위해 기도하고 행동하는 신구교도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런데 일부 기독교인들이 보여주는 행동을 보면, 후대의 역사가 자칫 기독교를 반공을 명분으로 삼는 ‘증오의 종교’로 기록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듭니다.

‘움베르토 에코’라는 종교학자는 “우리가 진리임을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은 믿음 바로 그것이 악마다!” 라는 경고를 했습니다. 아마 이 경고를 무시하면 어느 종교도 마귀 들린 집단으로 표변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1980년 3월 24일, 기독교 나라 엘살바도르에서 크리스천 장군이 보낸 ‘죽음의 부대’는 엘살바도르 내전에 국민 20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크리스천 병사들이 성당으로 들어와 미사를 드리던 로메로 대주교를 쏴 죽였습니다. 대주교가 ‘빨갱이’라는 이유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10월 14일, 로메로 대주교는 ‘정의와 인권을 위해 목숨 바친’ 순교자로서 바티칸 광장에서 성인으로 시성(諡聖)되었습니다.

증오의 종교는 이제 멈추어야 합니다. 몇 년 전,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는 ‘사회학의 입장에서 한국교회의 문제점 비판’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국기독교는 화해의 종교라기보다는 증오의 종교에 가깝다. 전쟁, 분단, 독재의 희생자들에게 눈물을 닦아주는 역할보다는 그들을 따돌리고 차별하는 편에 서서 그들의 고통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진단했습니다.

김 교수는 “한국 교회는 식민주의 정신과 결별하면서 사회적 영성(靈性)을 기르고, 부자들의 불안을 해소하는 역할이 아닌 약자를 감싸주고 균등사회의 실현에 앞장서는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 “약자의 편에서 화해사업을 추구할 때, 시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실 자기를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권력을 믿는 것은 아닌지, 돈을 믿는 것은 아닌지, 건물을 믿는 것은 아닌지, 사람 수를 믿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을 진짜로 믿는 신앙인이라면, 이제 ‘증오의 정치’를 한다는 오명에서 벗어나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실행하는 신앙공동체로 거듭나면 어떨 까요!

단기 4352년, 불기 2563년, 서기 2019년, 원기 104년 10월 25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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