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사람 이육사(1920년.17세-1937년.34세) 의열단 핵심 단원. 대구교도소 264수번 대구광역시 이육사기념관 건립에 힘써야

시민과 함께하는 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함께 한 동지들과 단체사진 촬영 / ⓒ 문해청 기자
시민과 함께하는 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함께 한 동지들과 단체사진 촬영 / ⓒ 문해청 기자

[뉴스프리존,대구=문해청 기자] 독립투사 민족시인 이육사기념사업회(상임대표 강창덕)와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대구지회는 공동주최로 10일 2.28기념 중앙공원 야외무대에서 대구 최초로 시민과 함께하는 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식전행사로 난타(이우영 / 아리리가 났네 신효철 동구의회 의원) 춤사위 (박정희 북구의회 의원 / 자주독립운동가 ‘의열단’ 추념)했고 사회는 고경하 사무처장(독립투사 민족시인 이육사기념사업회)이 맡았다.

성악가 김주권의 ‘광복군가’는 다음과 같다. // 삼천만 대중 부르는 소리에 젊은 가슴 붉은 피는 펄펄뛰고 / 반만년 역사 씩씩한 정기에 광복군의 깃발 높이 휘날린다 / 칼 잡고 일어서니 원수치 떨고 피 뿌려 물든 골 영생 탑 세워지네 / 광복군의 정신 쇠같이 굳세고 광복군의 사명 무겁고 크도다 / 굳게 뭉쳐 원수 때려라 부셔라 한 맘 한 뜻 용감히 앞서서가세 / 독립 독립 조국광복 민주국가 세워보자 //

다음은 동구의회 오말임 의원이 낭송한 이육사 『광야』 『절정』 시이다. 『광야』 // 까마득한 날에 / 하늘이 처음 열리고 /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 모든 산맥들이 /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 차마 이 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

지금 눈 내리고 /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절정』 // 매운 계절(季節)의 채쭉에 갈겨 /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 서리빨 칼날진 그 우에 서다 /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이어 민족문제연구소구미지회 임규익(영남민요연구회)과 회원은 ‘구미의병아리랑’ ‘광복군아리랑’ 공연을 했다. 본 행사는 자주독립투사 ‘의열단’이여 영원하라. ‘자주독립운동 혼불은 우리에게’ 슬로건으로 시작했다.

대구지회장은 개회선언 및 ‘국기에 대한 경례’ 후 행사점검 중 논란됐던 친일매국노 안익태가 지은 애국가 제창을 했다. 이어 자주독립운동가 ‘의열단’ 순국선열 독도헬기 순직소방관을 위한 묵념에 이어 내빈소개를 했다.

시민과 함께하는 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독립투사 민족시인 이육사기념사업회 강창덕 상임대표 / ⓒ 문해청 기자
시민과 함께하는 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독립투사 민족시인 이육사기념사업회 강창덕 상임대표 / ⓒ 문해청 기자

다음은 강창덕 상임대표(독립투사 민족시인 이육사기념사업회) 인사말이다. (전략)척박한 대구경북지역에서 지난 일본제국주의 식민지(1910~1945) 해방 이후 오늘 최초로 제1회 '의열단 100주년 기념식'을 개최하게 되어 참석한 모든 분 가슴으로부터 감동의 물결이 차오를 것이다.

일제식민지 치하 대구에서 청년기 독립투쟁을 했던 대구사람 독립투사 민족시인 이육사(264 이원록)와 대구의 대표적 독립운동가 이종암 의사를 비롯하여 대구경북(본도) 시도민이 ‘의열단 창단’ '핵심 인물'로 참여했다.

대구경북지역 인물이 자주독립을 위한 항일무장투쟁에 헌신적으로 참여했지만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해방 이후 지금까지 대구경북에서 자주독립운동정신을 계승하고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의열단' 기념식을 하지 못했다.

올해는 대한민국 임시징부 100주년 기념, 3.1만세 자주독립운동 100주년 기념을 맞는 해입니다.(중략) 오늘 ‘의열단 100주년 기념식’ 통해 이 땅의 자주독립운동에 큰 흐름을 만들어 가셨던 대구경북 독립운동가 정신을 계승하고 시도민의 자존심을 새롭게 세우며 실천하는 일에 참여하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말씀을 올린다고 밝혔다.

축사를 했던 노수문 지부장(광복회대구지부)은 광복회(회장 김원웅) 축사를 대독했고 안민석(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의 축전을 권오혁 위원장(더불어민주당대구달서구 갑)이 대독했다. 다음은 안민석 국회의원 축전 요약이다.

(전략)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과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와 온 겨레의 항거가 있었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다. 우리는 독립영웅들과 이름 없이 떠난 수많은 독립운동가 한분 한분의 숭고한 삶과 정신을 잃지 않고 가슴 깊이 기억해야한다. 우리 헌법 전문에는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친일행적을 지우고 싶은 세력은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1948년 건국을 주장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일본은 1592년 임진왜란, 1910년 국권 침탈에 이어 2019년 올해에는 경제 침략을 감행하고 있다.

아베 정권이 저지른 기해왜란(己亥倭亂)은 대한민국 경제발전이 일본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발전하자 강제징용 판결을 구실삼아 대한민국을 밟아 보겠다는 치밀한 계략에 의해 시작된 경제 침략이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우리민족 우리역사에 대한 확고한 이해와 범국민적 단결이 요구되고 있다.

조선의열단은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독립운동 단체로 일본군국주의자들의 사슬을 끊고 떨쳐 일어난 3·1민중봉기를 계승 발전한 민족항일단체다. 조선의열단은 위대한 민족주의자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강령과 이념을 정립했다. 이외 김원봉 단장 김상옥 선생 나석주 선생 등 이름을 모두 열거하기 힘들 정도 많은 항일투사를 배출했다.

대구는 심산 김창숙 선생 이종암 선생 김원봉 단장과 만주로 망명해 무장독립기지를 건설한 이여성 선생, 민족시인 이육사 선생 1940년대 광복군 행진곡을 만든 이두산 선생 등 걸출한 독립투사들을 배출한 역사적 도시이다.

이밖에도 1916년 대구권총사건을 일으킨 김진만 · 김진우 형제 김진만의 아들 김영우 손자인 김일식 등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가 대구에서 활동하며 해방 때까지 국내외에서 혁혁한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친일 청산과 애국에는 진보와 보수가 없다.

100년 전 항일의 역사를 기억하고 단결된 국민의 힘으로 일본의 경제 침략에 맞서면 국민의 힘으로 승리의 역사를 만들 수 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한분 한분이 대한민국의 기적을 만드는 주역이다.(후락)

경북대 명예교수 배한동 상임대표(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는 대구경북에서 처음으로 개최하는 “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식”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대구경북 수구보수 배타적 친일정서에 눈치 보거나 흔들리지 말자” 100년 전 조선의열단이 자주독립을 위해 의로운 일을 맹렬한 결의로 헌신했듯이 “이제 대구경북시도민이 제대로 자주독립운동정신계승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축사를 밝혔다.

박원순 시장(서울특별시) 격려사 대구지회장이 대독했고 김해화 상임대표(민족작가연합) 축전은 수성구의회 김두현 의원이 대독했다. 다음은 의열단 강령 및 선언문을 요약한 의열단 공약10조와 주요활동을 낭독 구구단 김홍철 단원이 발표했다.

'의열단'(義烈團)은 1919년 11월 9일-10일 만주에서 설립된 '의열단'(義烈團, 단장 약산 김원봉)은 아나키스트 성격의 무장독립운동단체이다. 비폭력투쟁인 3.1운동 후 일본제국주의 폭력으로 실패한 것을 반성하며 이에 대한 반발로 폭력과 암살을 통해 독립을 쟁취할 것을 목표로 삼았다.

투쟁 목표는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경찰서, 기타 중요기관 등 5개소의 적 기관 파괴와 총독부 고문·군 수뇌·타이완 총독· 친일파 거물·밀정·반민족적 토호·열신(劣紳) 등 7악의 제거를 위한 파괴활동이었다.

1923년 1월 단원 김상옥(金相玉)이 독자적으로 '종로경찰서 투탄 의거'를 감행한 뒤 일경의 대대적 검속으로 단원들이 체포되었다. 이후 국내에서의 암살 · 파괴운동 준비는 김시현(金始顯)과 현직 경부 황옥(黃鈺)이 담당했다. 이들은 영국인 쇼우를 끌어들여 폭탄과 선전문건을 국내로 반입하는데 성공했으나, 1923년 3월 밀정의 밀고로 관련자 전원이 체포됐다.

1923년 상해 일본 총영사가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의열단 단원이 1천여명에 이르렀다. 1926년 이후 많은 수의 의열단원이 중국 국민당정부의 북벌을 위한 학교였던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정치교육을 받았다. 이후 상하이로 본부를 옮기고 개조파와 연합하여 임시정부의 개편과 사회주의계열의 적기단(赤旗團)과의 제휴를 모색하는 한편, 국내에서 모금활동을 했으나 일제의 집요한 추적과 부호들의 거부로 실패했다.

시민과 함께하는 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식에서 식전행사로 신효철과 어라디아의 난타공연 하는 모습 / ⓒ 문해청 기자
시민과 함께하는 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식에서 식전행사로 신효철과 어라디아의 난타공연 하는 모습 / ⓒ 문해청 기자

의열단 공약 10조는 다음과 같다. 1. 천하에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기로 한다. 2.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몸과 목숨을 희생하기로 한다. 3. 충의(忠義)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으로 한다. 4. 단의 뜻을 우선하고 단원의 뜻을 실행하는데 속히 한다. 5. 의백(義伯,올바른 성품을 가진 지도자)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하게 한다. 6. 언제 어디서든지 매월 일차씩 상황을 보고한다. 7. 언제 어디서든지 모이도록 요청하면 꼭 응한다. 8. 죽지않고 살아있어 단의 뜻을 이루도록 한다. 9. 한 사람(의백)은 다수를 위하여, 다수는 한 사람을 위하여 헌신한다. 10. 단의 뜻에 배반한 자는 척살 한다.

이어 다음은 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식 경과 및 의미를 여은경 박사(민족문제연구소대구지부 연구위원)가 발표했던 요약이다. (전략)의열단의 조직과 활동을 보면 1910년대 만주의 무장독립투쟁 기관들의 계보와 닿아 있고 그 맥을 계승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역의 인물이 협동한 신흥무관학교는 신민회의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등 항일독립운동가 중심이고 지역으로 안동 인물이 터전 됐고 풍기광복단, 국권회복단은 풍기, 대구 중심으로 항일무장투쟁 지사가 중심이 됐다.

이들은 안동과 대구의 3·1만세독립투쟁에 참여하고 주도했다. 조선의열단은 인적 텃밭과 독립투쟁의 정치적, 민족적 맥을 이으면서 항일투쟁 고장 밀양 등 경상도 남부지역 청년 지사가 중심이 됐다. 의열단 창단기 조직원은 단장 김원봉, 곽재기, 강세우, 권준, 김상윤, 배중세, 서상락, 신철휴, 윤세주, 이성우, 이종암, 한봉근, 한봉인, 이낙준, 이수택, 윤수형, 황상규이다.(출처: 의열단 노선과 활동(1919∼1925), 김태완, 단국대 교육대학원, 1996. 8. 석사논문, 14쪽 인용)

의열단은 공약에 충실하며 독립투쟁의 방편으로 암살투쟁을 전개했다. 암살대상(7가살)은 ① 조선총독 및 조선총독부 고관 ② 일본군부 수뇌 ③ 대만총독 ④ 매국적 인사 ⑤ 친일파 거두 ⑥ 적(일제)의 밀정 ⑦ 반민족적 토호(土豪) 열신(劣神),

파괴대상은 ① 조선총독부 ② 동양척식회사 ③ 매일신보사 ④ 각 경찰서 ⑤ 기타 왜적 주요기관 등이 대상이다. 의열단은 자주독립투쟁으로 거사 대상과 응징 의미를 분명히 했고 일제 국가테러 침략에 맞선 ‘천하의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함’을 선도하는 독립투쟁단체란 것을 만천하에 천명했다.

조선의열단의 조직 · 투쟁노선은 신흥무관학교에서 교육된 것을 창단인적구성에서 드러난다. 신흥무관학교와 국내 의열투쟁을 전개한 풍기광복단, 대구 조선국권회복단 두 단체는 발전적 해체 이후 대구에서 1915년 7월 15일 설립된 대한광복회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경남 밀양, 대구, 경북 안동의 독립운동자가 의열단을 창단한 곳은 무장투쟁 현장인 만주였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후략) 조선왕조시대 영남학파, 기호학파 등 지역 기반의 학파가 장기간 독창성을 유지하며 역사에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했다. 대구와 밀양은 침략국가 일본에 대한 저항의 정신사가 깊이 각인된 곳이다.

임진왜란 7년에서 대구가 차지하는 의미는 승군과 관련해서 강조되야 한다. 지금 남지장사 일대는 사명 유정의 항왜 의승군 주둔지 ‧ 훈련장이다. 밀양의 표충사(表忠祠)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대장 유정의 항일활동을 전후 왕조정부가 인정하고 경내 관료-민간으로 하여금 제례를 올리도록 한 국가호국시설이다.

사명 유정의 항일충렬 활동이 서린 밀양에서 항일민족의식이 배양되었다는 것은 당연하다. 시대를 격하고 국가의 통치권을 빼앗겨 일본의 식민통치가 잔혹하게 진행되는 상황은 무장독립투쟁에 몸을 던지려는 지사는 그에 상응하는 절실한 이유를 찾고 목표를 설정해야 했다.(중략) 민족-민중이야말로 독립국가의 빼앗길 수 없는 주권자임을 주목했다.

만주지역의 민족주의 무장항일투쟁기관의 투쟁사에서 찾을 수 있다. 지역 초월과 인물 연합을 지향한 것이다. 조선의열단의 활동상, 특히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김원봉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등을 요약한다. 조선의열단의 창단과 활동이 가지는 의미는 일제강점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대변되는 민족우파 세력과 민족좌파세력이 대한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대다수 학자는 김원봉 노선에 대해 그가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김원봉은 민주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걸었다하거나 진보적 민족주의로서 그의 활동노선을 압축하기도 한다.(중략)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 의열단 활동에서 특징은 민족혁명연합전선의 길을 자신이나 당의 이익을 뒤로 하고 추구했다는 것이다. 영화 ‘암살’로 대중의 관심을 고양한 것은 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무장투쟁을 영화로 조명한 점에서 그 영향이 작지 않다.

다음은 ‘의열단’ 과제를 몇 가지 언급한다.

첫째, 지사들이 전개한 항일투쟁의 근본 목적은 일제로부터 국가를 회복하여 통일된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의열단이 임정을 비롯한 많은 정치세력과 길항, 분리, 연합한 것은 독립된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둘째, 공동체적 삶이나 그 유산에 대한 관심이 희박해지면 집단 이기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이것은 극우적 정치세력을 스스로 키우는 것이 된다. 이에 우리 역사와 문화를 이분법적 관점이 아니라 통합적, 융합적 인식 노력이 필요하다. 약산 김원봉에 대한 일부 사시(斜視)를 녹이는 것은 김원봉만이 아니라 의열단도 적용된다. 친일파, 식민지근대화론자의 사시도 결국 우리 평화의 뜨거운 관심이 녹일 수 있다.

시민과 함께하는 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식 사회를 맡은 독립투사 민족시인 이육사기념사업회 고경하 사무처장 / ⓒ 문해청 기자
시민과 함께하는 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식 사회를 맡은 독립투사 민족시인 이육사기념사업회 고경하 사무처장 / ⓒ 문해청 기자

다음은 『조선의열단 100주년을 기념하며』 시낭송했던 전문이다.

『조선의열단 100주년을 기념하며』 // 고경하 시인 / 2017년 상주동학혁명문화제 특별상 // 지난 1919년 11월 10일 / 빼앗긴 나라 되찾겠다고 뭉쳤던 / 조선의열단 김원봉 외 12명 / 일제 밀정을 앞세운 모진 고문과 / 뼈 깎고 살 찢는 탄압 굴하지 않고 / 자주독립운동 외치던 의열단이여 // 이 땅에 살아가는 후손은 / 순국선열 호국영령 죽음으로 / 살아가는 큰 빚을 지고 있기에 / 의열단 청년투사의 한 많은 영혼을 / 이제 우리가 그 정신을 계승하고 / 그 길을 함께 걸어가야 할 때이다 // 우리 의리로 동지의 깃발을 모으자 / 제대로 해방 된 깃발을 높이 세우자 / 조선의열단 100주년을 기념하며 // 이제 우리 모두 의열단원이 되자 / 바로 이 것은 조선민중이 살길이다 / 자주독립운동 조선반도 평화통일 만만세 //

다음은 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식에 부쳐 『소설 광복회』 『소설 의열단』 저자 정만진 소설가께서 발표한 결의선언 요약이다.

강점기 초기인 1910년대의 혹독한 무단통치에도 불구하고 우리 겨레는 전국 단위 무장 항일 결사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여 일제에 맞섰다. 대한광복회의 활동은 1919년 3.1만세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이어 1920년대 독립운동의 꽃인 의열단을 탄생시켰다. 대한광복회는 대구 달성토성에서 창립했고, 의열단 최초 단원 10명 중 3명이 대구 사람이다.

대구는 무장항일운동 중심이었다. 오늘날 대구시민은 무엇을 할 것인가? 2.28민주운동이 4.19혁명을 낳듯이 우리는 이 땅의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완성시키는 민족적 과제 앞에 전국 최고 선봉이 되어야 마당하다. 오늘 이 행사는 “나라에서 가장 으뜸가는 의열단 100주년 기념식 아닌가?” “어느 지역보다 더욱 힘차게 독립운동정신을 계승하고 전파하자.” “어느 누구보다 뜨거운 촛불이 되자. 가장 아름다운 평화의 기수가 되자.” 하며 성토했다.

이어서 남구의회 정연우 의원이 ‘독립군가’ ‘홀로 아리랑’ 함께 노래했던 전문이다.

//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 용사야 /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 삼천리 삼천만의 우리 동포들 / 건질 이 너와 나로다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 독립문의 자유종이 /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 // 원수들이 강하다고 겁을 낼건가 / 우리들이 약하다고 낙심할건가 / 정의의 날센 칼이 비키는 곳에 / 이길이 너와 나로다 /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 독립문의 자유종이 /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 // 너 살거든 독립군의 용사가 되고 / 나 죽으면 독립군의 혼령이 되니/ 동지야 너와 나의 소원 아니냐 / 빛낼 이 너와 나로다 /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 독립문의 자유종이 /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 / 싸우러 나가세 싸우러 나가 // 이어서 단체사진촬영 및 폐회선언 후 만세삼창하며 행사를 마무리했다.

이날 사회를 봤던 고경하 사무처장(독립투사 민족시인 이육사기념사업회)은 “오늘 100년 만에 맞는 뜻 깊은 날에 친일매국노 안익태가 지은 애국가를 불러 두 눈에 보이지 않는 의열단과 순국선열 호국영령에게 진심어린 마음으로 사죄 하고 싶다.” 앞으로 “의열단의 정신과 뜻을 이어받아 척박한 대구에서 독립운동 성지로 탈바꿈하는데 앞장설 것이다.” 하며 당찬 소신을 밝혔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대구지회 오홍석 지부장은 “일제 식민지 이후 대구에서 100년 만에 처음 '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식' 공동주최한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대구지회(지회장 김*철)와 독립투사 민족시인 이육사기념사업회(상임대표 강창덕)에 일침을 가했다.

오홍석 지부장은 "대구에서 친일매국노 안익태가 지은 애국가를 부르지 않았다면 '우리 대구는 다르다'하며 시민에게 더 많은 응원과 지지를 받았을 것이다." 행사 점검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당시 부른 애국가" 제창 제안을 애국가 4절까지 제창을 제안한 것은 참 된 역사의식 없는 안타까운 모습이고 이제 정신 차려야한다"고 했다.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대구지회 김*철 지회장이 현실적 어떤 문제가 있어서 그렇게 결정하셨는지 모르겠다. 앞으로 민간이 주최하고 주관하는 자주독립운동정신계승관련 각종 정치문화행사에선 친일매국노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를 안 불렀으면 좋겠다.

한 쪽으론 자주독립운동정신계승 및 독립운동가 선양한다면서 기념하고 또 한쪽에선 친일매국노가 조국을 배신하고 악언행한 것을 그냥 용납한다는 것은 선과 악의 분별력 없는 어불성설이다.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는 앞으로 친일매국노 안익태의 애국가를 부르지 않겠다고 한다. 그럼에도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대구지회 김*철 지회장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대구 대표적 친일매국노 박중양이 알면 혀를 차면서 비웃겠다.”하며 성토했다.

시민과 함께하는 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식에서 밀양아리랑과 의병아리랑 공연을 하고 있는 임규익 외 4명 구미의명아리랑보존회 공연모습 / ⓒ 문해청 기자
시민과 함께하는 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식에서 밀양아리랑과 의병아리랑 공연을 하고 있는 임규익 외 4명 구미의명아리랑보존회 공연모습 / ⓒ 문해청 기자

다음은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 대표 함세웅 신부의 요약

11월 10일 서울에서 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식에서 함세웅 신부가 밤비가 내리는 것을 바라보며 "100년 전 우리 독립군 선조들이 목숨 바치며 당한 고통을 오늘 이 비로 다시 태어나라는 세례의 의미가 있다" "오늘 비를 맞으며 새로운 100년을 여는 현장으로 생각했으면 좋겠다." 했다.

함세웅 신부는 이내 친일매국노 “안익태가 작곡한 곡조에 애국가를 4절이나 부른 것은 잘못이다.” 라는 격정적 비판을 쏟아냈다. "가슴이 아프다. 안중근 의사와 의열단원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통탄할까.

일본과 나치에 부역한 작곡가(안익태, 만주환상곡 / 일제 찬양)가 만든 애국가를 의열단 100주년 기념식에서 불렀다. 너무 부끄럽고 통탄할 일이다. 의열단을 기억하는 것은 이런 것부터 바꾸는 일이다." 100년 전 조선의열단의 눈물이 서글픈 밤비가 되어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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