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는 어떤 인물인가? 보통 ‘민족시인’이라 하지만 선생은 전체 생애 걸쳐 무장독립투쟁에 투신했고 자주독립운동을 하며 함께했던 동지와 끝까지 믿음과 의리를 지켰고 홀로 중국 북경 지하 감옥에서 옥사했던 독립투사이다.

일제식민지 해방 이후 현재까지 보통 '민족시인 이육사'로 알려졌던 '이육사 선생'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1기생으로 졸업했고 조선의열단 핵심 단원으로 비밀 무장투쟁단체를 통해 자주독립운동을 실천하고 펼쳤던 '독립투사'로 새롭게 발제한 여은경 박사의 강좌 '대구 폭파사건과 이원록'을 주제로 '이육사의 삶'을 '재조명했던 명쾌한 강의'를 경청한 시민들과 함께 / ⓒ 문해청 기자
일제식민지 해방 이후 현재까지 보통 '민족시인 이육사'로 알려졌던 '이육사 선생'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1기생으로 졸업했고 조선의열단 핵심 단원으로 비밀 무장투쟁단체를 통해 자주독립운동을 실천하고 펼쳤던 '독립투사'로 새롭게 발제한 여은경 박사 강좌 '대구 폭파사건과 이원록' 주제로 '이육사의 삶'을 '재조명했던 명쾌한 강의'를 경청한 시민들과 함께 / ⓒ 문해청 기자

[뉴스프리존,대구=문해청 기자] 독립투사 민족시인 이육사기념사업회(상임대표 강창덕) 은 19일 대구시민공익활동지원센터 4층 혁신홀에서 시민과 함께하는 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 인문학강의로 이은경 박사를 초청하여 “대구 폭파사건과 이원록”이란 주제로 강좌를 개최했다.

강사 이은경 박사(민족문제연구소대구지부 연구위원)는 영남일보노조위원장 출신으로 일찍부터 한반도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이론 및 참 된 주인 되는 평화통일세상을 위해 일제식민지시기부터 해방이후 현재까지 발행했던 신문(정보)을 대부분 읽으셨고 스스로 학문적 연구를 끈임 없이 연마하고 깊이 탐구하며 단련하신 탁월한 분이다.

대구사람 이육사 선생은 퇴계 후손 진성 이씨 본명은 원록(1904~1944)이다. 선생은 17세부터 가족이 대구 남산동에 거주했고 34세까지 청년기 17년을 대구에서 살았다. 대구 보문고등 수료 후 교남고등 졸업했고 약령시 약전골목 석재 서병오 한약사 점원으로 시서화문을 배웠다.

다음은 이육사 선생의 활동 경력의 요약이다.

1927년 10월 18일 조선은행대구지점(도청, 식산은행 포함) 폭탄의거 장진홍 사건으로 대구에서 일제식민지 저항 요시찰 조선인 총검거에 이육사 선생이 연루되어 피검되었다.

1932년 10월 20일부터 1933년 4월 23일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다른 이름은 ‘조선혁명간부학교’ ‘의열단간부학교’ ‘조선혁명군사훈련반’ ‘남경선인군관학교’ / 교장 김원봉, 왕현지(이영준) 등 참석) 제1기생 졸업. 이후

1934년 3월 22일 JS일보대구지국 기자 부임 직전 서울에서 피체 됐고 계속 구금됐다가 장진홍 의사가 1929년 2월 14일 일본 대판에서 검거 된 3개월 후 면소되어 1929년 12월 9일 출소했다.

이어 이육사 선생은 일제식민지 강압통치 조선총독부 비판의 글로 ‘11명 통방’사건의 ‘대구격문범’으로 일제경찰로부터 비밀결사 조직혐의 취조로 송국 됐다. 사건에 연류 된 독립운동가는 이활(이육사), 채충식, 남만휘, 이명우, 이경렬, 박상호, 이선장, 이갑기, 김영도, 이상길, 박명근이다.

이육사(264 대구교도소 수번) 선생은 이명으로 이활, 육사,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선생은 기자활동을 하며 친일매국노 박중양 대구부사가 달성읍성을 허물었고 약령시장 상권을 빼앗으려 했지만 민중과 함께 저항하며 약령시상권을 지켰다.

또한 조선민중을 계몽하는 일제 저항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선생이 비밀 무장투쟁 자주독립운동의 삶을 살았던 전체 삶에서 시창작한 것은 삶의 일부로 볼 수밖에 없다.

1943년 봄 중국 북경행 7월 귀국해서 가을에 일제 헌병대에 피체 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었지만 잔혹한 고문을 받았지만 결코 저항시를 쓴 것만을 이유로 17번을 반복해서 감옥을 오가지 않았으며 혹독하고 지독한 고문을 받아 죽음을 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육사 선생은 아나키즘 독립투사로 중국 북경에서 일제식민지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주독립 민족해방 민중민주의의를 위해 비밀 무장독립운동에 참여하신 분이다.

2차 세계대전에 일제 패망이 예견되자 중국에 주둔 중 일본군인 300만이 자중지란 되도록 조선의열단과 자주독립운동가는 비밀 무장투쟁을 은밀히 전개해 치명적 타격을 줬다.

2차 세계대전 패망에 대한 일본의 심리전 패배의식으로 흔들리는 군인 중 강제 징병된 조선인은 대규모 탈영병이 되어 중국군인과 조선인(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합부대로 다시 입대하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중국에서 통치권을 휘두르는 일제총독부(영사관)는 조선과 담당을 두고 조선인의 선전 선동 배후인물을 비밀 무장투쟁단체 조선의열단 핵심간부로 판단했다.

이육사 선생은 과거 중국 북경(베이징)에서 조선인 독립운동가 양성을 목표로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신흥무관학교, 중국(중궈)대학, 항일군관학교 조선군관반을 졸업했다. 이어 일제총독부는 중국 북경에서 수사본부를 꾸리고 열정적 경력의 광범위한 활동했던 조선의열단 핵심단원 이육사 선생을 유력한 혐의자로 보고 지명 수배했다.

일제 칼날의 엄중한 상황에 비밀 무장투쟁단체 활동을 은밀하게 했던 이육사 선생은 친족 초상을 당해 서울로 밤바람처럼 잠입했다. 그러나 얼마 후 일제 친일매국노 밀정들의 밀고로 이육사 선생은 일제 헌병대에 체포되어 다시 중국 북경 일제총독부(영사관) 수사본부로 압송됐다.

1944년 1월 16일 새벽 5시 이육사 선생은 중국 북경 일제총독부(영사관) 수사본부로 압송 되었는지? 얼마 되지 않아 일본제국주의 총독부(영사관) 지하 감옥소에서 잔혹한 모진 고문으로 두 눈과 콧구멍, 입안에서 거품을 품어내며 서거하셨다.

이날 강의를 했던 여은경 박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조국, 민족, 민중을 위한 자주독립운동의 비밀 무장투쟁단체 조선의열단 핵심단원이던 이육사 선생의 삶을 재조명하며 앞으로 제대로 자주독립운동정신과 실천을 살려나갈 것을 당부했다.

이어 이육사 선생은 단지 “민족시인”만이 아니라 “독립투사 이육사 선생”으로 삶을 새롭게 기억하며 힘세고 큰 나라를 사대하고 종속을 거부하며 자주독립운동정신계승을 위해 한반도평화통일세상을 꿈꾸는 계기가 되었다고 청강의 소회를 밝혔다.

이날 강의를 끝내고 질의시간을 갖게 됐고 나눈 토의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제식민지 해방 후 친일매국노 청산을 제대로 못했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 정부가 친일매국노를 정치적 기반으로 견인했기에 친일매국노청산을 방해해서 무산 되었다고 이유를 들었다. 그 뒤에 정부, 정당 각계각층 친일매국노세력이 승계되었다.

그 뿌리가 뻗어서 친일매국적폐성향 정당이 됐고 현재 ‘자유한국당’도 크게 다름이 없다. 그들은 과거 정치사회환경(일제식민지시기 / 한국전쟁) 친일매국적폐성향을 정당화하려고 4.19학생시민혁명으로 무너진 독재자 이승만 대통령을 아직까지 추종하며 “건국절”을 거론하고 있다.

헌법에 명시 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통성을 부인하며 일제 괴뢰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 “만주환상곡”을 지어 일제 찬양한 친일매국노이며 “나치” 독일의 프로파간다(propaganda 군대선전선동 문선대)에 부역한 안익태가 작곡(1935년)한 “애국가” 제창을 자주독립운동기념 행사에서 강요한다.

이는 ‘일제매국노’를 희석시켜 “친일”은 그냥 일본과 친한 사이로 단순화 시켜 “친일”을 미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주독립운동’을 그냥 ‘독립운동’으로 “자주” 의미를 퇴색시켜 통용하고 기록과 표현에 ‘자주’ ‘민주’ ‘통일’ ‘민족’ ‘민중’ ‘평화’ ‘노동자’ 등을 과격하단 이유로 관행적으로 사용을 금지한다.

‘대한민국’ ‘한국’ ‘민주주의’ ‘시장경제’ 명분을 내세우며 ‘자주독립운동정신계승’을 ‘질적’ 강화 보다 ‘의전’을 중시하는 ‘독립운동관제행사’로 ‘형식’에 치중했다.

현재까지 일제친일매국노세력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정치사회환경으로 ‘조선의열단’ 비밀 무장투쟁단체를 부정적 폭력단체(윤봉길 / 도마 안중근) 독립운동으로 격을 낮추었고 선교계몽운동(이승만), 국채보상계몽운동(김광제 / 서상돈), 교육계몽운동(도산 안창호)을 긍정적 온건단체로 독립운동으로 격을 높였다.

앞으로 학교의무교육개선을 위한 국회 교육제도개선 국회의원 교육위원회 법제화를 위해 교육기관이 정권을 뒷받침하는 역할에서 올바른 인재를 길러내는 인간형으로 교육기관과 교사단체가 앞장설 수 있도록 새로운 교육제도변화로 혁신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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