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 정은미 기자]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9일 오후 11시 50분 숙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83세. 사단법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는 "김 전 회장이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영면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빈소 조문하는 조문객 = 10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아주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빈소에서 조문객이 조문하고 있다. 2019.12.10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빈소 조문하는 조문객 = 10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아주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빈소에서 조문객이 조문하고 있다. 2019.12.10

고인은 폐렴 등으로 약 1년여 간 투병 생활을 했으며 연명치료는 하지 않겠다는 평소 뜻에 따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영면에 들어갔다.

장례식은 가족장 형태로 3일장으로 치러진다. 대우그룹은 창업 30여 년 만인 지난 1998년 41개 계열사 및 396개 해외법인 등 자산총액 76조 원에 달하는 기업이 됐다. 당시 대우그룹의 수출 규모는 한국 총수출액의 10%를 차지했다. 이때 국내 10만 명 및 해외 25만 명 등 35만 명을 고용하며 매출 91조 원을 달성해 재계 순위 2위까지 올랐다. 지난 1983년에는 공로를 인정받아 국제상업회의소가 3년마다 수여하는 국제기업인상을 아시아 기업인 최초로 수상하기도 했다.

고 김우중 전 회장은 1936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기중, 경기고,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김우중 전 회장은 삼성·현대그룹 창업주인 이병철·정주영 회장과 함께 언급되는 인물로 '창업 신화'를 기록한 1세대 창업주로 꼽힌다. 김 전 회장은 경기고와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지난 1967년 자본금 500만 원으로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이후 5년 만에 수출 100만 달러(약 12억 원)를 달성했으며, 10여 년 만에 대우그룹을 현대·삼성그룹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4대 재벌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김 전 회장은 '기술이 없으면 사 오면 된다'는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대한전선 가전사업부, 오리온전기, 광진전자공업 등을 인수하며 대우그룹을 키웠다.

무역 업체이던 한성실업에서 근무하다 만 31세이던 1967년 자본금 500만 원으로 대우실업㈜을 세웠으며 이후 수출 중심 전략과 인수합병으로 대우그룹을 만들어 한국의 대기업으로 우뚝섰다. 특히, 김 전 회장은 소련붕괴 직후 동유럽, 중동, 아프리카 등 공격적으로 제3세계 시장 개척에 나서며 독보적인 경영 스타일을 보여준 바 있다. 이 당시(1989년) 펴낸 자서전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다.

하지만 대우그룹은 1998년 IMF를 맞아 흔들렸고 1999년 유동성 위기로 해체됐다. 지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문제가 시작됐다. 대우그룹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사태를 맞으며 자금난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당시 대우그룹의 부채규모는 89조 원에 달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30조 원의 국민 세금이 투입됐지만 지난 1999년 8월 어음 만기 사태를 극복하지 못하고 워크아웃(기업재무구조개선작업)을 신청한 뒤 해체됐다. 김 전 회장은 지난 2006년 대우그룹의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징역 8년 6월 및 벌금 1000만 원, 추징금 17조9253억 원을 선고받았다. 이후 2008년 1월 노무현 대통령 집권 당시 특별사면 대상자로 선정돼 풀려났다. 이후 '제2의 고향' 베트남에서 청년사업가 양성 사업 등 경영자 교육에 주력하던 김 전 회장은 건강 악화로 지난해 귀국한 뒤 투병 생활을 하다 지난 9일 오후 11시 50분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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