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소멸시효완성채권 소각까지 하는 이유는/일부 업체 시효완성채권 매입/법률지식 없는 서민상대 악용/채권규모 1인당 평균 1199만원/빚 갚을 능력없는 214만명 혜택

소멸시효 완성 채권은 채권자가 돈을 돌려받기를 포기한 채권이다. 채무자에게는 더 이상 갚지 않아도 되는 돈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소멸시효 완성 채권이 채무자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경우가 적잖다.

자영업자 A씨는 외환위기 이후 빚이 늘어 20년간 생활고에 시달렸다. 어느 날 ‘○○대부’에서 발송한 채무변제 안내장을 받았다. “일부 선납금만 납부하면 원금을 대폭 감면해준다”는 내용이었다. 금융거래에 어려움을 겪던 A씨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선납금을 납부한 뒤 감면 금액의 채무이행각서를 썼다.

함정이었다. ‘○○대부’는 소멸시효 완성 채권을 헐값에 매입해 법률지식이 없는 서민들을 상대로 더 이상 갚을 의무가 없는 소멸시효 완성 채권을 부활시켜 다시 추심하는 업체였다. 채권은 소멸시효가 지났더라도 채무자가 일부 변제하는 경우 시효의 이익포기로 인정되어 채무가 부활한다. 상당수 추심업체들이 이 점을 악용한다. ‘○○대부’는 A씨에게 다시 강한 추심을 재개해 A씨의 고통은 더욱 커졌다. 

금융위원회가 소멸시효 완성 채권 25조7000억원어치를 소각하기로 한 것은 수많은 A씨들이 빚의 굴레를 벗고 재기하도록 도우려는 것이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31일 ‘소멸시효완성채권 처리방안 금융권 간담회’에서 “시효 완성으로 상환의무가 없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채무자에게 일부 상환을 유도하거나 법원의 지급명령 등을 활용해 편법적으로 시효를 부활시키는 사례가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면서 “이런 피해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채무자의 부담을 완전히 해소하기 위해 채권의 소각이라는 추가적 조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채권 소각으로 혜택을 보는 채무자들은 총 214만3000명에 달할 전망이다. 전체 채권규모는 1인당 평균 1199만원인데, 보유기관별로 차이가 있다. 국민행복기금(73만1000명, 5조6000억원)은 766만원, 금융공공기관(50만명, 16조1000억원)은 3220만원, 민간 금융회사(91만2000명, 4조원)는 439만원꼴이다. 비교적 소액의 빚 상환에 오랜 세월 시달리다 결국 빚을 갚지 못하고 시효가 완성되었는데도 다시 채무 재발생 위험에 처한 숱한 A씨들이 빚의 고리를 끊고 새출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일각에선 “버티면 된다”는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를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는데, 이에 대해 금융위는 “채무자의 상환의무가 없는 채권을 소각하는 것이므로 그럴 우려는 없다”고 밝혔다. 금융위 관계자는 “시효를 연장해가며 채권 추심을 할 만큼 하다가 더 이상 갚을 능력이 없다고 보고 소멸시효를 완성시킨 채권들”이라며 “돈이 많은데도 악의적으로 빚 상환을 하지 않는 사례는 없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위는 이번 조치가 일회성 이벤트에 그치지 않도록 제도화·법제화하겠다는 방침이다. 최 위원장은 간담회에서 “(시인은) 맨 처음 울기 시작해서 마지막까지 울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읊은 김초혜 시인의 시구를 인용하며 금융인의 역할을 다짐하고 당부했다. “금융인에게는 금융 문제로 곤란을 겪는 분들에 대해 어려움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이분들이 재기해서 정상적인 경제활동으로 복귀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책임지고 지켜봐야 하는 소명이 있다”는 것이다.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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