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

▲ 김덕권 전 원불교문인협회장,칼럼니스트

우리 인간이 죽으면서 가져 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걸 모르면 우리가 떠날 때 창황경조(蒼惶驚譟)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숨을 들이쉬고 내 쉬면서 저는 죽음이라는 속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바로 호흡지간(呼吸之間)이 삶과 죽음의 경계(境界)인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세월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늙음도 피할 수 없습니다.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병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아끼고 소중히 여기며 집착하는 모든 것들은 다 버리고 가야 할 것 들입니다. 유일하게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오직 내가 살았을 때 했던 행동, 생각, 말들입니다. 이것을 곧 업(業)이라 합니다.

‘업’은 산스크리트어로 ‘카르마(Karma)’라고 합니다. 원래는 행위를 뜻하는 말로서 인과(因果)의 연쇄관계에 놓이는 것이며 단독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행위는 그 이전의 행위의 결과로 생기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미래의 행위에 대한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업’은 어떤 사람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그림자가 형체에 따라다니듯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과관계에 입각한 행위 론은 당연히 ‘선업선과(善業善果)’ ‘악업악과(惡業惡果)’와 같은 윤리적인 인과의 법칙을 낳게 하였지요. 그 업은 몸(身) · 입(口) · 뜻(意)으로 짓는 삼업(三業)으로 나눠집니다. 이 세 가지로 선악을 짓게 하여 업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업보 설(業報說)은 이생에서의 삶이 윤회(輪廻 saṃsāra)의 사슬 중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윤회하는 동안 우리는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부처까지 자신을 완성시켜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쁜 길에 빠져 동물로 태어날 수도 있으며, 수라(修羅) 축생(畜生) 아귀(餓鬼)로도 태어 날 수 있습니다. 몸도 받지 못할 정도면 지옥(地獄)에도 떨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과거의 행위는 다음 생의 조건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닙니다. 한 생을 마치고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기 전까지 저승에 있는 기간 동안 행복할 것인가 불행할 것인가를 결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기간 동안 천상(天上)이나 지옥에서 일정 시간 있으면서 그가 지은 업은 거의 소멸됩니다.

그래서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좋은 예가 저 유명한 ‘애플’의 스티브 잡스의 마지막 글입니다.

<스티브 잡스의 마지막 글(Steve Jobs’ Last Word)>

「나는 비즈니스 세상에서 성공의 끝을 보았다. 타인의 눈에 내 인생은 성공의 상징이다. 하지만, 일터를 떠나면 내 삶에 즐거움은 많지 않다. 결국 부(富)는 내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하나의 익숙한 ‘사실’일 뿐이었다. 지금 병들어 누워 과거 삶을 회상하는 이 순간, 나는 깨닫는다, 정말 자부심 가졌던 사회적 인정과 부는 결국 닥쳐올 죽음 앞에 희미해지고 의미 없어져 간다는 것을.

어둠 속 나는 생명 연장 장치의 녹색 빛과 윙윙거리는 기계음을 보고 들으며 죽음의 신(神)의 숨결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제야 나는 깨달았다. 생을 유지할 적당한 부를 쌓았다면 그 이후 우리는 부와 무관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그 무엇이 부보다 더 중요하다면 예를 들어 인간관계, 아니면 예술, 또는 젊었을 때의 꿈을… 끝없이 부를 추구하는 것은 결국 나 같은 비틀린 개인만을 남긴다. 신은 우리에게 부가 가져오는 환상이 아닌 만인이 가진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감각(senses)을 선사하였다. 내 인생을 통해 얻는 부를 나는 가져갈 수 없다.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사랑이 넘쳐나는 기억들뿐이다.

그 기억들이야말로 너를 따라다니고, 너와 함께 하고, 지속할 힘과 빛을 주는 진정한 부이다. 사랑은 수천 마일을 넘어설 수 있다. 생에 한계는 없다. 가고 싶은 곳을 가라. 성취하고 싶은 높이를 성취해라. 이 모든 것이 너의 심장과 손에 달려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비싼 침대가 무슨 침대일까? ‘병들어 누워있는 침대이다.’ 너는 네 차를 운전해줄 사람을 고용할 수 있고, 돈을 벌어줄 사람을 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너 대신 아파 줄 사람을 구할 수 없을 것이다. 잃어버린 물질적인 것들은 다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인생’은 한번 잃어버리면 절대 되찾을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한 사람이 수술대에 들어가며 본인이 끝까지 읽지 않은 유일한 책을 깨닫는데 그 책은 바로 ‘건강한 삶’에 대한 책이다. 우리가 현재 삶의 어느 순간에 있던, 결국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삶이란 극의 커튼이 내려오는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가족 간의 사랑을 소중히 하라. 배우자를 사랑하라. 친구들을 사랑하라. 너 자신에게 잘 대해 줘라. 타인에게 잘 대해 줘라.」

어떻습니까? 세계 굴지의 부자도 결국 가져가는 것은 ‘업’ 뿐이라 하였습니다. 그럼 우리가 받을 업보(業報)는 어떤 것일까요? 업보는 자신이 행한 행위에 따라 받게 되는 운명입니다. 업보는 깨달은 존재인 부처와 윤회의 존재인 중생의 차이입니다. 중생들의 윤회하는 영역과 인간사회의 사회적 · 경제적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이른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포괄적 도덕 법칙인 것입니다.

《화엄경(華嚴經)》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여러 가지 많은 꽃들이 피지만 그러나 이름 모를 꽃들도 대단히 많다. 이런 세계가 화엄세계다. 꼭 이름을 알리지 않고 하는 보시(布施), 상(相)을 드러내 않고 하는 보시가 최고의 보시이고 공덕(功德)이다. 괜히 이름이 드날려서 불리면 그 만큼 공덕이 줄어든다고 생각하라.” 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무상공덕(無相功德)이요, 둘은 상생의 선연(相生善緣)이며, 셋은 청정일념(淸淨一念)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청정일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공덕을 쌓고 선연을 맺었다 하드래도 평소에 수행이 없는 사람은 이것이 다 아상(我相)이나 착심(着心)으로 화(化)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져 갈 수 있는 최고의 보배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의 원리를 철저히 깨달아 최후의 일념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리요!

단기 4350년, 불기 2561년, 서기 2017년, 원기 102년 9월 4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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