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사건(中)

■ “목사들은 전도나” “군인들은 국방을”
 

긴급조치 제1호 위반 두 번째 사건의 첫 공판이 열리던 날, 2월 초의 날씨답게 흰 눈이 내린 싸늘한 아침나절, 긴장된 얼굴로 총을 받쳐 든 헌병들이 둘러싸고 있는 비상보통군법회의 법정으로 정어리 엮이듯 줄줄이 묶인 피고인들이 들어왔다. 법정 안은 단상·단하가 모두 납덩이처럼 굳어 있는 분위기였다. 방청석엔 불과 몇 사람의 여인들(가족)이 불안한 표정으로 웅크리고 앉아 있었고, 그밖엔 기관원과 기자들 몇 사람의 모습만 보였다. 공개 재판이 아니었다. 기자들도 풀제인 듯 몇 안되었고, 그나마 필기 메모조차 금지된 상태에서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공소사실에 적힌 행위 자체에 대한 문답은 별반 논쟁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행위의 동기, 정당성, 시국관, 유신과 긴급조치에 대한 평가에서는 피차 팽팽한 평행선을 그었다.

단상의 심판관(군 장교)이 단하의 피고인(성직자)에게 질문이라기보다는 문책을 하는 어조로 묻는다.

“이 비상사태에 목사들이 어찌하여 기도나 전도는 하지 않고 이렇게 정치 활동을 하여 세상을 소란스럽게 만드는가?”

단하에서 즉각 받아치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김진홍 전도사의 반격이었다.

“이 비상사태에 군인인 당신들이야말로 어찌하여 국방의 임무를 망각하고 여기 와서 민간인을 재판한다고 앉아 있는가?”

이것은 답변이 아니라 준엄한 호통이었다. 단상의 표정들은 노기와 곤혹스러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 검찰관 구형 그대로의 ‘정찰제’ 판결
 

단하의 성직자들은 입을 모아 자기들은 하느님을 믿는 자의 신앙적 결단에 따라 박 정권의 유신통치를 반대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사명으로 안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크리스천이 아닌 나는 ‘피고인’들이 신념과 행동의 근거로 삼고 있는 성서적 진리를 대변하기 위해 밤늦도록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펼쳐가며 소나기식 공부를 해서 법정에 나갔다. 그리고 그들이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을 이끌어내고자 힘썼다. 그들은 차츰 개정 벽두의 긴장에서 풀려나 자신들의 신앙고백적 진술을 거침없이 이어가며 유신통치와 긴급조치 철폐의 당위성을 역설할 정도로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변호인인 나도 목회자를 포함한 크리스천들의 사회 참여, 특히 불의한 권세를 바로잡는 일도 하느님 사역의 일부라는 점을 강조했다.

2월7일에 선고 공판이 열렸다. 김진홍·이해학·이규상·김경락에게 각 징역 15년, 인명진·박윤수에게 각 징역 10년이 떨어졌다. 각본에 의한 재판이라는 것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검찰관 구형 그대로의 ‘정찰제 판결’이었다.
 

■ 장황한 판시, 궁색한 변명

판시 이유를 보면 ‘피고인들은 위 긴급조치가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조치라고 그릇 판단한 나머지…’ 또는 ‘정상을 살피건대, …피고인들은 종교인으로서 그 본연의 자세를 저버리고 종교를 빙자하여 가지가지 교묘한 수단과 방법으로 동조세력을 규합, 국민총화에 의한 국력배양 그리고 안정과 번영 위에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추구하고자 하는 국민적 염원을 외면하고 사회질서의 혼란과 동요 그리고 국민총화의 저해와 분열을 획책한 것은 추호도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다’ 등 어쩐지 재판부의 궁색한 변명으로 들리는 정상론이 장황했다. 이날, 외국 기자의 인터뷰에 응했던 한 구속자의 부인은 남산(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밤샘 조사를 받고 다음날에야 풀려나왔다.
 

이 사건은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도, 대법원에서도 1심 판결대로 추인되었으니, 당시로서는 대법원의 선고조차도 하나의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았다. 민복기 대법원장의 1973년 신년사 첫 줄이 “10월 유신으로 빛나는 새 아침이 밝아왔습니다”로 시작되었으니(법원행정처 <역대 대법원장 연설문집> 제2집, 1973) 대법원에서도 기대할 것이 없었다. 2심 재판장인 이세호 대장은 서울에서 가장 크다는 교회의 집사였는데, 그도 이렇게 피고인들을 꾸짖었다. “왜 성직자들이 기도나 하지, 정치에 관여하느냐?”

1974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이 긴급조치 사건을 재판할 비상고등군법회의 재판장 이세호 대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 ‘성직자 구속경위서’ 우송도 ‘긴급조치 위반’
 

위에서 본 대로, 1974년 1월17일 기습적으로 열린 ‘개헌서명촉진시국선언기도회’ 사건으로 이해학 전도사 등 기독교 성직자 6명이 구속되자, ‘종로 5가’로 별칭되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와 그 회원인 진보성향의 기독교 6개 교단에서는 큰 충격파가 일어났다. 그러나 서슬 퍼런 긴급조치에 묶여 어떤 행동으로 나서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뒤, 전국 주요 도시의 교회와 목사들에게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된 목사·전도사들의 구속 경위와 그들의 시국선언기도회 선언문이 동봉된 우편물이 배달되었다. 발송인도 불명이고 우체국 소인도 각 지방으로 찍혀 있었다.
 

이에 놀란 경찰은 이미 구속된 6명의 성직자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면서 밖에서 그들을 돕고 있는 사람으로 짐작되는 김동완 전도사(약수 형제교회)를 연행해갔다. 그러나 그는 열흘 동안 조사를 받고도 무혐의로 풀려날 수가 있었다.

1974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이 긴급조치 사건을 재판할 비상고등군법회의 재판장 이세호 대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2월24일, 김 전도사는 이번에는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엄청난 고문과 생명의 위험마저 느끼는 극한상황에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성직자 구속경위서를 작성, 전국 교회에 우송하는 비밀 작업에 참여한 여덟 명의 ‘범인’이 모두 구속되고 말았다. 총책(?)이라 할 김동완(32·훗날 감리교 목사·KNCC 총무), 권호경(32·서울제일교회 부목사·훗날 기독교방송 사장), 이미경(23·에큐메니칼현대선교협의체 간사·현 국회의원), 차옥숭(23·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직원, 현 이화여대 교수), 박상희(29·한국신학대학 기독교교육학과 4년·현 나눔교회 목사), 김매자(22·이화여대 의학과 3년·현 울산병원 의사), 김용상(24·요가 강사), 박주환(25·한국신학대학 신학과 4년·훗날 목사) 등 남녀 각 4명씩 동수로 잡혀갔다.
 

■ 권호경, 이미경 주도하의 업무 분담으로

이들 중 일부는 전에도 반독재·반정부 활동을 하다가 검거되거나 재판을 받은 전력이 있었다.
 

즉, 권호경은 1973년 4월22일, 서울 남산야외음악당에서 열린 부활절연합예배에서 박형규 목사 주도하에 반정부 전단을 살포하다가 내란예비음모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보석으로 석방되어 항소심 재판을 앞두고 있었다. 이미경은 이화여대 동문들과 함께 노동현장에 뛰어들어 위장취업을 한 적도 있는 데다가 노동자의 권익옹호를 위해(당시는 기독교인도 아니었으면서) 기독교 선교 권익운동단체인 에큐메니칼현대선교협의체 간사로 일했다. 그는 기독교 각 교파의 대표들이 모인 한 인권기도회에서 ‘교회 사찰 금지’ 등 반정부 구호를 외쳐 경찰에 연행된 적도 있었다.
 

공소장에 따르면, 김동완·권호경은 ‘개헌청원운동 성직자 구속사건 경위서’를 작성, 그것을 전국 교회에 알려서 기독교인들의 여론을 환기시키기로 합의하고, 그 뜻을 전해 받은 이미경은 다른 피고인들에게 릴레이식으로 이를 알려서, 김동완은 총괄, 권호경은 비용 조달, 이미경·차옥숭은 경위서 문안 작성, 김매자·박상희·김용상·박주환 등은 문서의 등사 발송 임무를 분담해 실행함으로써 ‘김진홍 등이 대한민국 헌법의 개정을 청원하였던 사실을 위 이영찬 등에게 알린 것이다’라고 맺고 있다.
 

■ “애인이냐?” “그렇게 되기를 희망”
 

헌법 개정 청원 사실을 알린 것이 무슨 죄일까? 판결문에 보면, 피고인들의 각 판시소위는 긴급조치 위반행위를 ‘타인에게 알리는 행위’(조치 4항)에 해당되니까 처벌 대상이라는 것이다. 진짜 범죄도 그것을 누구에게 알렸다고 무슨 죄가 되는가? 그런데 폭행사실을 알리면 폭행죄가 되고, 횡령사실을 전파하면 횡령죄가 된단 말이냐, 이런 코미디가 어디 있느냐고 언성을 높이는 시민도 있었다. 공판에서는 기소 사실 자체보다는 유신과 시국관을 둘러싼 공방이 치열했는데, 딱 한 대목 예외가 돌출했다.

“김동완씨, 이미경이 애인 아니오?”
 

무슨 일을 함께하는 젊은 남녀 사이에는 이성 간의 연인관계라도 있을 법하다는 도식적 사고의 발로였는지, 단상의 심판관(장교) 입에서 이런 질문이 튀어나왔다. 참 황당한 소리였다.

“아닙니다.” 대답은 여기서 끝나도 좋았는데, 김 전도사는 이어서 천하의 명답을 남겼다. “그러나 저로서는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기상천외의 탈선 문답(모욕적 질문에 대한 통렬한 카운터 펀치)에 그 살벌하던 긴급조치 법정의 단상·단하가 동시에 폭소로 넘쳐났다. 희한한 해프닝이었다.

3월28일 선고된 1심 판결은 김동완·권호경 두 사람은 검찰관 구형대로 징역 15년, 박상희는 징역 10년(2심에서 7년), 나머지 사람들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었다.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에 대한 일부 성직자 중심의 이러한 저항과 수난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한국 기독교계에 새로운 각성과 대응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로 KNCC 인권위원회가 출범하였고, 그밖에 교계 내의 여러 기관·단체 및 교회가 박 정권의 유신독재에 대한 저항의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KNCC 인권위원회 <1970년대 민주화운동> 1~5, 1986) 이 부분은 다음에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기사 경향신문출처]
newsfreezon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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