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교수가 문학박사학위를 받은 주제도 윤동주 연구였다.

1951년 생인 마광수 교수는 6.25 전쟁 피난기 태어났다. 서울 대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마 교수는 28세에 홍익대 국어교육과 교수를 지낸 후 1983년부터 모교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마 교수는 1977년 <현대문학>에 시로 등단한 후, 1989년 소설 <권태>를 내며 이후 소설가로 이름을 알렸다. 특히 그가 1992년 출간한 <즐거운 사라>로 그는 필화 사건에 맞물려 사회에 큰 파장을 미쳤다. 당시 경찰은 이 소설이 음란물이라는 이유로 강의 중이던 마 교수를 연행했다. 마 교수는 구속 조치되었고 소설은 출간 금지 판결을 받았다. 마 교수는 이 사건으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마 교수는 필화 사건으로 인해 연세대 교수직에서도 해임됐으나, 1998년 복직했다. 하지만 <즐거운 사라>는 지금도 금서로 지정돼 있다. 마 교수는 생전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표현으로도 여러 차례 논란을 낳았다.

마 교수는 윤동주 시인 연구의 전기를 남긴 이로도 평가된다. 마 교수가 문학박사학위를 받은 주제도 윤동주 연구였다. 

1984년 연세대학교 국문과에 신임교수가 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시인 박두진 교수가 떠나고 33살 젊은 교수가 온다니 어떤 분일까 궁금했다. 그 신임교수에게 [희곡론]을 들었는데 연극사와 연극을 대하는 기본 내용을 배웠다. 수업 뒤 신임교수와 우연히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카페에서 노래한다니까 그는 카페에 와보고 싶다고 했다. 말만 그러겠지 했는데, 그는 정말 며칠 뒤 카페에 와서 한참 앉아 있다 갔다.

▲ 故 마광수 교수

“노래만 하지 말고 빨가벗고 그래야 사람들이 관심 갖지.” 다음 수업 시간 전에 내게 엉뚱한 얘기를 하셨다. 재밌는 분이다, 학생들에게 정말 관심이 많은 교수구나, 라고 생각했다.

윤동주, 잘난 척하지 않는 문학

대학원 시험을 준비하느라 마광수 교수님의 저서 [상징시학]에 실린 논문들, 연구서 [윤동주 연구]를 읽었다. 그가 가볍게 볼 수 없는 학자임을 그때 알았다. 두 책은 지금도 읽어야 할 그의 대표작이다. 아마 이 정도로 계속 글을 쓰셨다면 그만치 비난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윤동주 연구]는 당시 다른 논문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인상 깊었다. 당시 윤동주 연구는 대부분 저항시인이니, 민족시인이니, 기독교 시인이니 뜬구름 퍼나르는 허황한, 논문이라기보다 주장이었다. 작품 한편 한편을 분석한 논문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마 교수님의 학위 논문은 윤동주 시 몇 편이 아니라, 당시까지 발굴된 모든 시에 나타난 별·길·하늘 같은 상징 등을 분류해 분석한 독보적인 연구였다. 가스통 바슐라르가 국내에 널리 알려지기 전, 자생적이고 역동적인 상징 연구였다. 외국 이론을 인용하기보다 텍스트 자체를 꼼꼼히 분석한 원전 실증주의 연구였다. 윤동주 시가 윤동주 시를 설명하도록 짜놓은 책이었다.

그가 윤동주를 좋아하는 것이 의아했다. 도대체 성의식을 수줍고 철저히 감추는 윤동주를 그 반대에 있는 그가 어떻게 좋아할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이해할 수 있었다. 첫째 시의 핵심을 상징으로 보는 그의 미학에서 볼 때, 윤동주는 천상의 상징이나 보편적 상징을 가장 잘 이용하는 시인이었다.

무엇보다 ‘잘난 척하지 않는 문학’을 늘 강조하던 그의 문체 미학으로 보았을 때 윤동주는 들어맞았다. 그가 쓴 산문 ‘윤동주 생각’을 보면 그가 왜 윤동주를 좋아하는지 나온다. 마 교수님은 윤동주 문학을 이광수류의 계몽적 시혜주의와 다른 표상으로 보았다. 윤동주의 청교도주의와는 거리를 두면서 윤동주의 ‘잘난 척하지 않는 문학’을 좋아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윤동주의 표현 방식을 좋아했다. 윤동주 시의 핵심인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데까지는 마음으로만 공감했지 실천으로 함께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종이가 누렇게 변한 [윤동주 연구]를 나는 가끔 참조한다. 윤동주를 연구하고 싶다는 이들에게 세 명의 저자가 쓴 윤동주 연구서를 꼭 읽으라고 권한다. 오무라 마스오, 송우혜, 그리고 마광수.

대학원 면접시험을 볼 때 여러 국문과 교수님들이 앉아 계셨다. “국문과는 굶는 과라네. 왜 대학원에 입학하려 하나?” 신동욱 교수님의 이 질문에, 곁에 있던 마 교수님이 더 이상 면접할 필요 없다는 듯 두 문장으로 잘라 말했다. “이 학생은 대학원에 꼭 들어와야 합니다. 이 학생, 여러 가지를 할 줄 압니다.” 마 교수님의 강력한 추천에 다른 교수는 더 묻지 않았고, 면접도 거기서 끝났다.

다양한 시각, 불편했던 운동권 비판

마 교수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여기저기 강연 스케줄로 바빴던 것 같다. 월간 [문학사상]에 장편소설 [권태]를 연재하고 스포츠신문 등 여러 신문에 동시에 글을 쓰느라, 그의 책상에는 늘 원고지가 펼쳐 있었다. 그의 시집에서 도대체 마음에 드는 구절을 얻기 힘들었다. 표절까지 보여 실망스러웠다. 다만 그림으로도 그려서 남긴 한 구절은 그가 생각날 때마다 떠오른다. “태양빛이 너무 뜨거워 우산을 쓰니까 비가 온다.”

당시 마 교수님 수업은 큰 학교 강당에서 했다. 그의 조교에게 일이 생겨 내가 대신 들어가 좌석표를 따라 출석 체크를 한 적이 있다. ‘이게 무슨 수업인가’ 하며 거의 1천여 명의 좌석을 확인했다. 그런 시대였다.

학생들과 밥이나 술을 먹으러 가면 밥값, 술값도 늘 마 교수님이 내셨다.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는 새벽열차 대전발 영 시 오십 분∼” 저음으로 부르는 그의 가요 메들리는 괜찮았다.

무슨 뒤풀이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데, 마 교수님의 서울 이촌동 집까지 함께 갔다. 거리에 크리스마스 캐럴이 밝게 울려퍼지는 겨울밤이었다. 요염한 미녀들이 이 방 저 방에서 나오지 않을까 야릇한 기대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상황은 전혀 달랐다. 그냥 땅콩에 고기에 맥주에 이 얘기 저 얘기 하는 평범한 밤이었다. 거실에서 그냥 잠이 들었는데, 선생님이 덮어준 양털 같은 담요가 포근했다. 북엇국을 얻어먹고 너무도 평범하게 내 집인 듯 나왔다.

마 교수님의 대학원 수업은 자유로웠다. 창문 열어놓고 강의실에서 마 교수님과 맞담배를 피우는 선배도 있었다. 고인이 되신 하정일(원광대 교수) 형도 맞담배를 피웠던 이다. 성심리에 대해 발표하고 공부하는 수업이 있었는데, 페티시즘이며 사디즘 등을 처음 배웠다. [주역],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그리고 프로이트 얘기를 많이 하셨는데 더욱 깊이 들어가 푸코 정도의 연구 성과를 내놓지 않으신 것이 아쉽다. 내가 [주역]과 아리스토텔레스, 프로이트 공부를 시작한 것도 선생님 덕분이었다. 먼저 하늘나라에 간 이성욱 평론가는 “마 교수 수업은 수업이 아니야, 그게 대학원 수업이냐, 그건 수업이 아니라 죄악이야”라며 분노했지만 나에겐 가끔 의미 있는 내용도 있었다.

대학원 수업 때 마 교수님은 운동권 학생들이 영웅 심리에 젖어 있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참기 힘들었다. 이 상황을 참아야 할까. 그때 수업을 듣던 공지영이 선생님께 명확히 항의했다. 용기 있게 싸우듯이 지적했다. 마 교수님은 차분하게 자기 생각을 말했다. 쉬는 시간에 공지영이 말했다. “대학원 그만두려고, 더 배울 게 없어.” 정말 공지영은 그 시간 이후 수업에 들어오지 않고, 소설가의 길을 갔다.

수갑 차고 본 TV 속 교수님의 모습

석사 논문으로 시인 신동엽에 대해 쓰려던 나는 누가 심사위원이 되어줄까 염려했다. 신동엽을 시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시대였고, 나는 스티로폼 위에 엎드려 전두환을 비판하는 대자보를 쓰곤 했다. “신동엽 같은 시인 연구하면 취직하기 어려워”라며 쓰지 말라고 진지하게 권하는 선배도 있었다. 마 교수님은 내가 신동엽을 연구하겠다고 하자 선뜻 심사위원을 맡아주셨다.

지도하거나 조언해주지는 않았다. 그저 맘껏 쓰라고 하셨다. 신동엽 시인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연재소설을 쓰느라 내 논문을 볼 시간도 없었겠지만, 한편으로 나를 믿었다고 생각했다. 여러 번 “맘껏 써봐”라고 격려해주셨다. 그가 없었다면 신동엽을 연구한 내 석사 논문은 나오지 못할 뻔했다.

예감대로 1989년 나는 시국사범으로 감옥에 갇혔다. 신동엽 연구 논문을 끝으로 내 인생에서 학계는 끝일 줄 알았다. 수갑 차고 법정으로 가다 복도 끝에 있는 텔레비전에서 우연히 오락프로에 나와 예쁜 여자 탤런트 곁에서 해맑게 웃는 마 교수님을 보았다. 그는 이제 스타구나, 까마득히 멀리 떨어져 보였다.

내가 석방돼 사회에 나왔을 때, 마 교수님은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장편소설 [즐거운 사라](1991)는 8만 부가 팔렸지만 곧 외설 시비로 법정에 올랐다. 여주인공 즐거운 사라가 교수와 자유로운 성생활을 하는 이야기였다. 소설적 상상력이었지만 그저 재미로만 읽을 수 없었고, 몇 페이지 넘기다 불쾌하고 불편했다. 왜 내가 이걸 읽어야 하지? 아직도 민주화는 멀었는데 그는 왜 이런 생각을 할까? 마 교수님이 주장하는 성의 자유나 지식인의 위선 문제에 동조하기 어려웠다. 얼마 뒤 그는 강의하다 체포돼 감옥에 갇혔다. 이 과정에서 나는 방관자일 수밖에 없었다. 면회라도 갔어야 했는데 안 갔다. 방관자를 넘어 인간으로서 죄송하다.

윤동주나 신동엽이나 김수영을 좋아하는 나야말로 마 교수님이 싫어하던 ‘위선적 먹물’일 텐데 기억해주셨다. 오랫동안 섬나라에 살며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다는 선생님을 찾아뵙지 못했다. 몸도 마음도 멀리 있는 나 같은 놈이야말로 밥맛일 텐데, 그는 한번 놀러 오라고 가끔 전화를 주셨다. 그게 아직 이해되지 않는다. 외로워서가 아닐까. 혹시 심심해서 전화번호부에 문득 보이는 사람들에게 전화 건 것은 아닐까.

30년 만에 나눈 반갑고 긴 대화

마 교수님이 서울 홍익대 근처 어느 갤러리에서 ‘광마전’을 할 때 우연히 근처에 있다가 동석했다. 그는 기자들이 많이 오기를 바랐다. 기자들이 열댓 명 왔지만 주요 신문의 기자들이 안 왔다며 약간 서운해했다.

그는 신간을 내면 나에게 자주 보내주셨다. 그때마다 그림엽서를 보내주거나, 시혼무한(詩魂無限)이라고 멋지게 써서 보내주셨다. 그림엽서 중 윤동주의 시 ‘십자가’를 쓴 엽서를 보면 마음이 쓰리다.

그가 감옥에서 나온 지 10년도 안 돼 이 땅은 포르노로 채워졌다. [즐거운 사라]는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구닥다리가 됐고, 이제는 손가락 몇 번 클릭하면 눈앞에 포르노가 펼쳐지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로 변했다. 그저 ‘야한 소설’을 써서 팔아먹은 상업적 에로티시즘의 전위로도 비난받던 그는 아예 잊혀갔다.

마 교수님은 윤동주가 어느 계파나 유행에 연연하지 않았다며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다 했다. 그런데 그는 지독한 고독을 견디지 못했다. 늘 주변에 사람이 있어야 하는 분이었다. 약하디약해 교수직을 던지고 ‘치고 나가는 투사’가 되지 못한 섬약한 그를 지지하는 계파는 없었고, 작가는 몇몇뿐이었다.

감옥에 갔다와서 그에게 우울증이 생겼다고들 신문에 많이 나오는데 사실은 다르다. 감옥에 갔다왔기에 우울했다는 흔적을 사석에선 별로 보지 못했다. 수감 경험은 그에게 그럭저럭 견딜 만한 불편이었다. 자신을 쓰러뜨린 울분(鬱憤)의 원인은 같은 학과 내에서 겪었던 아픔이라고 그는 여러 번 말했다. 믿었던 관계가 공포로 다가오자 그는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수년 전 마 교수님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찾아뵈었는데 생각보다 빈객이 많지 않았다. 동문들이 전날 왔다갔는지, 나는 홀로 한참 앉아 있었다. 장례식 뒤, 몇 년 지나 그가 염려돼 집에 찾아갔다. 우울증이 심했다. 베스트셀러를 냈던 분인데 삼류작가인 내게 책 낼 출판사를 소개해달라고 했다. “이젠 내 책 내겠다는 출판사가 없어. 내겠다는 데는 신생 출판사들이야.” 그의 눈밑 그늘은 더 깊어졌고 쓸쓸해졌다.

그는 담배를 끊임없이 태웠다. 어떨 때는 입에 두 대를 물고 있듯 갈아 피웠다. 그즈음 먹는 알약이 가득 든 병과 약봉지도 여기저기 있었다. 밖에서 식사를 모시고 싶었는데 그렇게 못했다. 둘만 있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더 이상 그에게 가지 못했던 것 같다.

2016년 KBS에서 윤동주 스페셜 방송을 만든다 하여, 마광수 교수님을 꼭 인터뷰하라고 담당 PD에게 말했다. 마 교수님께 전화해 방송사에서 윤동주 스페셜 인터뷰를 하러 간다니까,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한번도 마음 열고 대화할 수 없었는데, 윤동주를 얘기하며 비로소 30여 년 만에 반갑고 긴 대화를 했다. 윤동주만이 그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접점이었다. 가끔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교수님 얼굴이 전화기 저편으로 환하게 떠올랐다.

성추행 따위랑 거리 먼 순한 분

마광수 교수님께 사랑과 격려를 받은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는 늘 남을 격려하고 잘해보라며 웃었다. 제자들이 어디에 취직했는지 비정규직인지 늘 염려했다. ‘즐거운 사라’처럼 학생들과 은밀한 관계를 맺는 일이 있었을까. 상상으로만 성의 자유를 판타지로 썼지, 실제 성추행 따위랑 전혀 거리가 먼 순한 분이었다. 늙어가면서 그의 작고 말라가는 가벼운 몸은 우울로 채워졌다. 관용이 없고 닫힌 이 사회가 몰아낸 주변인, 그는 학내에서 겪은 실망으로 무너지고 적은 연금은 그를 더욱 힘들게 했다.

마 교수님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이상하게도 그의 덕에 윤동주와 신동엽 시인 연구에 다가갈 수 있었다. 나의 윤동주 연구와 신동엽 연구의 첫 갈피에는 마 교수님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장례식에 늦게까지 남아 있던 많은 사람들은 나처럼 그에게 얻은 은혜를 뒤늦게 깨달은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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