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15 스승의 날. 문학의 사부 이성복 시인은 평생 스승이다

문학역사기행을 함께 가서 자연과 역사가 어우러진 인문학 형상과 의미를 기록하고 있는 박상봉 시인 / ⓒ 문홍주 기자
문학역사기행을 함께 가서 자연과 역사가 어우러진 인문학 형상과 의미를 기록하고 있는 박상봉 시인 / ⓒ 문홍주 기자

[뉴스프리존,대구=문홍주 기자] 시인 박상봉은 문학청년으로 지난날 삶과 추억의 여행을 더듬어 찾아가는 글을 발표했다

박 시인은 지난 젊은 시절 10·26사건으로 겨울공화국에 이른바 ‘서울의 봄’ 이 찾아왔다. 그러나 봄날은 오래 가지 않았다. 12·12 신군부 쿠데타로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서울의 대학생은 교내시위에 그치지 않고 거리로 뛰쳐나와 가두시위가 확산되었다.

이어 전두환 신군부의 휴교령 및 파업금지조치가 내려졌다. 신군부독재는 계엄령의 전국 확대조치로 ‘서울의 봄’을 끝장냈다. 광주에서는 계엄군의 폭력진압이 본격화되고, 이에 맞서 5·18광주민중민주화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던 ‘박덕규 시인’이 휴교령이 내려지자 대구 집으로 내려와 지내고 있을 때다. 그 당시 대구지역의 문학청년들이 무슨 레지스탕스운동 하듯이 은밀하게 모이던 장소가 있었다.

바로 중앙파출소 옆 심지다방 그곳에서 덕규를 종종 만났다. 덕규는 서울 광화문 일대에 계엄군의 전차가 들어서 있고, 곳곳에 군인수송차량과 장갑차까지 집결해 있다는 긴박한 서울의 소식을 생중계 하듯 은밀한 목소리로 전해주었다.

어느 날 계간『문학과지성』가을호에 수록될 시라며 가방에서 교정지 한 묶음을 꺼내 보여주며 『문학과 지성』을 통해 등단할거라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창간 10주년을 기념하여 마무리편집까지 다 마쳤다고 했다. 그런데 계엄령 때문에 책이 나오기 힘들 수도 있다는 얘기도 얼핏 덧붙였다. 아니나 다를까, ‘문지’(문학과 지성)뿐 아니라 ‘창비’(창작과 비평) 등 정기간행물이 전두환 신군부정권에 의해 등록취소처분을 받고 강제 폐간되어 덕규는 『문학과지성』을 통한 등단의 꿈을 결국 깨어지고 말았다.

다만 가제본 상태로 남아 떠돌다가 35년이나 세월이 흐른 다음에 복각본(復刻本)으로 복원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날 그 자리에서 ‘이성복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는 덕규한테 처음으로 듣고 그의 존재를 비로소 알게 됐다. 이성복이 시단에 등장한 것은 1977년 겨울, 『문학과 지성』에 ‘정든 유곽에서’ 등을 발표하면서부터다.

내가 처음으로 본 이성복 시인의 시(詩)는 아마도 ‘숨길 수 없는 노래’였다. // 숨길 수 없는 노래 3 // 이성복 // 내 지금 그대를 떠남은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 돌아보면 우리는 길이 끝난 자리에 서 있는 두 개의 고인돌 같은 것을 / 그리고 그 사이엔 아무도 발 디딜 수 없는 고요한 사막이 있습니다 / 나의 일생은 두 개의 다른 죽음 사이에 말 이음표처럼 놓여 있습니다 / 돌아보면 우리는 오랜 저녁 빛에 눈먼 두 개의 고인돌 같은 것을 / 내 지금 그대를 떠남은 내게로 오는 그대의 먼 길을 찾아서 입니다 //

나는 이 시가 마치 고등학생이 쓴 설익은 연애시 같다고 여겨져 그다지 눈 여겨 보지 않았다. 그 당시 나의 관심은 강은교, 김수영 등에 있었고 한국문단을 변화시킬 유망한 젊은 시인으로 ‘문학과 지성사’에서 시집 『메이비』를 낸 장영수 시인과『동두천』을 낸 김명인 시인 등을 손꼽고 있었다.

나는 덕규의 말을 듣고 나서도 한참 뒤에야 ‘이성복 시인’의 진면목을 알게 됐다. 그의 첫 시집『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구입해 읽었을 때 온몸에 전율이 돋을 만큼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때까지 한국문단의 시세계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비어와 속어가 등장하고 우상파괴적인 표현법과 묘한 비유법 불규칙한 시행의 배열 역설과 반어를 보고 ‘시란 무엇인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라는 원초적인 물음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충격을 받았던 시는 ‘어떤 싸움의 기록’이다. // 어떤 싸움의 기록(記錄) // 이성복 // 그는 아버지의 다리를 잡고 개새끼 건방진 자식 하며 / 비틀거리며 아버지의 샤쓰를 찢어발기고 아버지는 주먹을 / 휘둘러 그의 얼굴을 내리쳤지만 나는 보고만 있었다 / 그는 또 눈알을 부라리며 이 씨발놈아 비겁한 놈아 하며 / 아버지의 팔을 꺾었고 아버지는 겨우 그의 모가지를 / 문 밖으로 밀쳐냈다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신발 신은 채 / 마루로 다시 기어올라 술병을 치켜들고 아버지를 내리 / 찍으려 할 때 어머니와 큰누나와 작은누나의 비명 /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땀 냄새와 술 냄새를 맡으며 / 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소리 질렀다 죽여 버릴 테야 / 법(法)도 모르는 놈 나는 개처럼 울부짖었다 죽여 버릴 테야 / 별은 안 보이고 갸웃이 열린 문틈으로 사람들의 얼굴이 / 라일락꽃처럼 반짝였다 나는 또 한 번 소리 질렀다 / 이 동네는 법(法)도 없는 동네냐 법(法)도 없어 법(法)도 그러나 / 나의 팔은 죄(罪) 짓기 싫어 가볍게 떨었다 근처 시장(市場)에서 / 바람이 비린내를 몰아왔다 문(門) 열어 두어라 / 되돌아올 때까지 톡, 톡 물 듣는 소리를 지우며 아버지는 말했다 //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 지성사, 1980>  

그의 첫 시집이 나오자마자 우리세대는 ‘이성복 신드롬’에 빠져 들었다. 어느 자리를 가나 이성복 이야기뿐이었고 펑론가 김현 선생을 필두로 많은 비평가들이 이성복시(詩)에 대한 찬사로 떠들썩거렸다. 이성복 시세계는 그 당시 나와 같은 문학도에게 큰 영향을 끼쳐 그의 시와 비슷한 아류시(詩)가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지금도 나는 ‘김수영 시인’이후 한국시의 방향을 바꾸어놓은 최고 시인으로 서슴없이 ‘이성복 시인’을 손꼽는다.

내가 ‘이성복 시인’을 실제로 만난 것은 대학 2학년 무렵이다.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다닐 때 이성복 시인이 불어불문학과 강사로 대구에 왔다. 그가 계명대학교 강사로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몹시 반갑고 얼른 만나고 싶어 개강도 하기 전에 연구실로 찾아다녔다. 몇 차례 헛걸음을 하고 나서 수강 신청을 하던 어느 봄날에 크게 기대하지 않고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가 운이 좋게도 그와 맞닥트렸다.

첫 대면에서 카프카를 닮은 날카로운 인상에 가슴이 서늘해졌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 강의가 비거나 수업 없는 날은 그의 연구실을 찾아가 두런두런 경청하다왔다. 귀찮을 정도로 꽤나 자주 들락거렸다.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시인이 나랑 비교나 됐을까? 말 상대도 안됐을 법한데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고 밥 때가 되면 그냥 보내는 법이 없었다.

계명대학교 대명동 캠퍼스 뒷문을 나가면 ‘희망고물상’이 있다. 그 고물상 옆 허름한 분식집으로 가자하며 라면을 사줬다. 어떤 날은 서 너 명을 더 붙이고 찾아가 가난한 강사의 얄팍한 주머니를 축나게 했다. 그렇게 대학 졸업할 때까지 상당히 오랫동안 가깝게 지냈다.

// 인형을 업은 한 아이를 // 이성복 // 인형을 업은 한 아이를 또 한 아이가 업고 갔다 / 희망고물상 옆 희망목욕탕 좌판에 떡을 벌여놓은 여인은 시름없이 파리를 쫓았다 / 한 사내가 아이 둘을 데리고 강가로 걸어갔다 / 물 속에서 빨리 해가 끓고 비누거품에 엉킨 물고기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 사내가 먼저 작은 아이를 물속에 밀어 넣었다 / 겁에 질린 큰 아이가 울면서 달아나다가 사내의 손에 잡혀 물속으로 떨어졌다 // 아버지, 거짓말같이, 아버지... // <남해금산, 문학과지성사, 1986>

이성복 시인은 인간적으로 매우 따뜻하고 후한 사람이지만 문학얘기를 꺼내면 차갑고 냉정한 분위기로 돌변했다. 어떤 글에 관심 있는지? 요즘 어떤 시를 쓰고 있는지? 그런 질문하면 아무 관심 없다는 듯 굳은 표정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비밀작업을 하는 레지스탕스운동가처럼 자신의 글 쓰는 일은 쉬쉬하고 함구했다. 어쩌다 입을 떼더라도 나의 질문은 항상 기대에 어긋난 대답을 듣기 일쑤였다.  

어떤 날은 ‘요즘 읽은 시들 중에 어떤 게 좋으냐’고 물었더니 ‘별로 읽어본 시가 없다’고 대답했고 ‘앞으로도 뒹구는 돌처럼 시를 쓸 거냐?’고 물으니 ‘요즘 시 안쓴다. 시는 써서 무엇하냐?’고 말해 자리를 머쓱하게 만들었다.   또 ‘좋은 시집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더니 국어교과서에서 배운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한 번 읽어보라며 문고본 한 권을 책장에서 뽑아주었다.

어떤 날은 밤을 새워가며 애써 쓴 자작시를 부끄럽게 내밀었더니 ‘두 줄 밖에 쓸게 없다 나머지는 다 버리고 다시 써라’며 눈물이 쑥 빠질 정도로 혹평을 해 얼굴을 화끈거리게 했다. 그를 만날수록 더 헛갈리고 찐 맛없는 만남이라고 생각되어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마음 한구석이 황량해지는 것이었다.  

// 단풍 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더군요 / 몸이 하나니 두 길을 다 가 볼 수는 없어 / 나는 서운한 마음으로 한참 서서 / 잣나무 숲 속으로 접어든 한쪽 길을 / 끝 간 데 까지 바라보았습니다... //  

이성복 시인이 준 ‘프로스트’시집 문고본은 제법 열심히 읽었다. 나중에 졸업논문까지 프로스트에 대해 쓸 정도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즐겨 애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성복 시인의 시집을 얼마 지나지 않아 내던져버렸다. 내가 가야할 길이 아니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서운한 마음으로, 되도록이면 멀리 서서 뒷모습만 바라보려고 생각한 때도 있었다.

그가 내게 준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의 한 구절처럼. 이윽고 나는 시(詩)의 길(路)을 잃어버렸다. 나에게 이성복 시인은 큰 상처였다. 고교 시절과 대학 다닐 때 일찍이 문학상을 제법 많이 타서 어린 나이에 문학에 대가를 이룬 듯 겉멋만 잔뜩 들어 자만에 빠졌던 어리석은 시절이었다.

너무 강한 비적(比敵)을 만나 그 벽을 뛰어넘을 자신이 없었고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작아지고 자꾸 초라해지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가까이하면 할수록 상처를 받았다. 그의 세계관을 이해하려고 더 다가가면 갈수록 나는 혼란에 빠졌고 더 이상 시를 못 쓰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중에 좀 더 깊이 있게 더 치열한 정신으로 파고들어 그의 시세계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면 인생이 바뀌었을 것인데 라는 후회를 한 적이 없지는 않다. 그 당시에는 왜? 그랬는지? 누구나 닮고 싶어 하는 시인이기에 나는 닮지 않겠다는 엉뚱한 고집을 부렸던 것 같다. 그런 편견으로 그의 시(詩)를 의도적으로 더 멀리 밀어내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러해도 ‘이성복 시인’은 나의 정신을 지배하는 평생의 큰 스승이었다 그가 문예창작학과로 옮긴 뒤에는 찾아가 뵐 때마다 학생들 지도하는 교재도 공부하라고 챙겨주고 새 시집이 나오면 사인해서 꼬박꼬박 챙겨주었다. 나중에 청장년(성인)이 되어 만난 어느 날에는 헤어져 돌아서는 자리에서 ‘상봉아’ 하고 불러 세우더니 ‘시 3편 가져와라 너도 발표할 때 됐다’고 말씀 하셨다.

내심 반갑고 고마웠지만 ‘선생님 신세 지고 싶지 않습니다 발표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하고 사양했다. 큰 시인이 배려해줄 때 넙죽 받아 챙겼어야 했는데 사실 예의도 아니고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좋은 기회를 놓쳐버렸다 그러나 나는 정말로 선생님께 불편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 주위에는 대학교 문창과(문예창작과) 제자를 비롯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줄을 대려고 서성거리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 나 하나라도 빠져주는 게 선생님을 제대로 위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어느 해 신년 하례인사라도 드리려고 만났을 때는 이제는 내가 밥 사드려야 하는데 마다하고 여전히 밥 사주시고 카페로 데려가 바쁘다면서 한 시간 넘도록 문창과 학생들 가르치듯 오십이 넘은 굼뜨고 답답한 제자의 눈을 뜨게 만들어주려고 뜨거운 열강을 토했다. 그런 뒤 지금은 서울로 이주해 만나기 힘들게 되었다.

이 땅의 위대한 시인을 20대 문청(문학청년)시절에 만났다 그리고 하해(河海)와 같은 은총을 내려 받은 만남의 시간을 생각했다. 이어 지금 스승의 날을 생각하면 그때가 참으로 복되고도 귀한 선물임을 알겠다.   이제 나의 정신을 지배하는 평생의 큰 스승 ‘이성복 시인’에게

//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나는 한숨지으며 / 가끔 ‘프로스트’처럼 중얼 거렸다 // 그리고 내 앞에 두 갈래 길이 숲속으로 나 있었다 / 그래서 나는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 며 답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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