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9일 “적”이라는 한 단어가 내 머리속에 들어와 일주일간 깊게 패인 흔적을 남겼다. 그 단어가 가지는 힘 때문이다. “적”은 돌이킬 수 없는 결론이기 때문이다. “적”은 적이 아닐 수도 있는 모든 가능성에 대한 탐색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적”은 적임을 알고서도 돌아설 수 있는 기회를 더 이상 줄 수 없다는 인내의 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적”이란 단어는 내가 이곳에 태어나 북녘의 동포로부터 들은 가장 치명적인 단어였다. “적”은 낯설고 혹독한 단어였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정체성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1. 6.9조치의 시작

“적”은 <동포에서 적으로>를 의미한다. 이것은 방향의 일대전환이다. 시간의 멈춤이다. 더 이상 형제도 아니고 적도 아닌 모호성을 유지한 채 조선의 인내심을 시험하며 시간을 끌 수 없게 되었다. 조선은 6월 9일 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과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통해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모호성을 다 걷어내 버리고 “적”이라는 실체를 드러냈다. “적”이라는 단어는 6월 5일 통일전선부 대변인 담화에서 처음 등장했다.

“남조선에서 공개적으로 반공화국삐라를 날려 보낸 것이 5월 31일이지만 그전부터 남측의 더러운 오물들이 날아오는 것을 계속 수거하며 피로에 시달려오던 우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적은 역시 적이라는 결론을 더욱 확고히 내리었다. 우리는 남쪽으로부터의 온갖 도발을 근원적으로 제거하고 남측과의 일체 접촉공간들을 완전 격페하고 없애버리기 위한 결정적 조치들을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뒤를 이어 6월 9일 조선중앙통신은 “김여정 당 제1부부장과 김영철 당 중앙위 부위원장이 8일 대남사업 부서들의 사업 총화회의에서 대남 사업을 철저히 대적사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전했다.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무엇이 조선으로 하여금 6.9조치에 대해 “오래전부터 생각”하게 만들었냐는 것이다. 통일전선부 대변인 담화와 조선중앙통신의 보도 내용에서 드러나는 점은 오래전부터 조선은 대적사업 전환 문제에 대해 고민해왔다는 것이다.

2. 6.9조치의 근본요인

청와대와 남쪽 정치권 그리고 언론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조선의 6.9조치가 탈북자들의 대북 전단 살포에서 비롯되었다고 믿고 싶다. 그래서 “전단 살포시 현행범 체포”가 등장한다. 즉, 문제의 원인을 탈북자 단체의 일탈행위로 규정한 다음, 정부가 그것을 적절히 통제함으로써 문제의 근본원인을 비껴가려한다는 점이다. 대북 전단이란 조선의 내부 붕괴를 노리는 엄연한 도발행위다. 그것을 은근히 부채질해놓고 현행범으로 체포하겠다는 것은 매 맞을 놈이 매를 드는 격이 아닌가. 전단 살포 행위를 조장하고 방조한 남쪽 정부의 책임을 묻고 있는데 책임져야 할 자들이 매를 들고 있다. 설마 이런 기만행위를 조선이 모를 거라 생각하는 건가?

조선이 요구한 것은 남쪽 정부의 대북정책이 가진 퇴행적인 대미의존성(괴뢰성)의 탈피다. 삐라 살포 금지와 처벌이 아니라 민족공조를 위한 근본적인 자주성 회복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대북 전단 살포를 엄단하면 또 다른 방식의 대북 도발 방식들이 나올 것 아닌가. 포털에 올라오는 수많은 대북관련 기사들에 행해지고 있는 조선에 대한 왜곡과 덧칠 작업은 대북 전단 날리기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조선은 이것을 수정할 많은 기회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쪽 정부가 그들이 원하는 민족 공조에 자주적으로 나설 의사가 없음을 확인했다. 조선은 형제냐 외세냐 선택할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정부는 미국(외세)에 기대어 조선(민족)을 내팽개쳤다. 그것이 6.9조치가 등장한 배경이다.

3. 대북정책의 증발

조선의 6.9조치에 대해 청와대가 한 일은 14일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NSC 상임위원회 긴급 화상회의를 소집한 것이 전부다. 이제 한미동맹을 송두리째 버리지 않는 한 남쪽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들은 외세와 민족 사이 어디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남쪽 정부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일관되고 실효성있는 대북정책을 수립하는 것이다. 국민의 정부가 추진한 햇볕정책은 참여정부에 들어 대북적대시 정책으로 회귀하는 강한 동력을 주었다. 한 걸음 앞으로 가고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후로 대북정책에 대한 대미의존성은 심화되었다. 미국의 입장이 곧 남쪽 정부의 입장이었다. 6월 9일 조선의 대남사업이 대적사업으로 전환된 것은 형식적으로 존재하던 대북정책이 영구히 증발되는 것을 의미한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된 것을 의미한다. 이제 바가지는 밖에서도 새는 지경에 이른다. 남쪽 정부의 외교적 지렛대는 종적을 감추게 될 것이다. 조선의 6.9조치는 정부의 “평화 프로세스”, “중재자”, “촉진자”, “운전자”같은 해괴한 낱말들을 종식시켜버렸다. 이것은 남쪽 정부를 외교적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린 것과 같다.

4. 정치 지도력의 상실

우리는 조선의 6.9조치를 통해 정부가 국가라는 형태를 유지하는데 요구되는 지도력을 상실하게 되는 과정을 본다. 조선은 6.9조치에 이르기 전에 이미 오랜 시간에 걸쳐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고민해오고 있었다. 이에 대한 남쪽 정부의 침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들은 거의 모든 것을 한미워킹그룹에 의존해왔기 때문에 독자적인 입장이 있을 수가 없다. 정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앵무새처럼 “미국과의 긴밀한 조율” 또는 “철통같은 한미동맹”을 외치는 것 뿐이다.

상황은 변화했다. 상황의 변화가 남쪽 정부에 강제하고 있는 것은 정체성의 노출이다. 이전처럼 동포도 아니고 적도 아닌 모호한 영역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 조선은 이남을 적으로 규정했다. 그런데 왜 청와대와 군은 “변한 것은 없다. 북한은 우리의 주적이다. 경계태세에 만전을 기하겠다.”라고 대응하지 못하는가? 속은 주적이되 겉으로는 주적이어서는 안 되는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1번 정부가 주적이라 외치고 2번 정부가 평화와 통일을 외치면서 구축한 정치적 차별화가 무너지면 <1번 정부 = 2번 정부>라는 등식이 노출되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에 대한 오랜 기만행위의 틀이 무너진다. 1번 정부와 2번 정부의 대북정책이 왜 이름만 다를 뿐 대미의존성이란 측면에서 쌍둥이처럼 같았는가에 대한 의문이 풀리면 기층민들은 대한민국엔 자국민에 의한 정부가 없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다.

5. 외교적 고립

조선의 6.9조치가 보여주는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조선중앙통신과 로동신문을 통해 구성원들 전체에 대해 대남사업의 성격이 바뀌게 된 과정을 공표하고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국가적 의사를 통일하겠다는 것이다. 조선 사회 전체가 하나가 되어 움직인다는 것은 6.9조치가 그만큼 오랜 인내와 고민의 결과물임을 의미한다. 생각의 일치를 사전에 구축했다는 것은 그다음에 있을 전변적인 행동 변화의 중대성을 추측케한다.

남은 변수는 미국의 개입이다. 조선이 더 이상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영향이라는 변수를 허용하지 않을 방안을 찾았다면, 남쪽 정부는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사면초가의 위기에 처할 것이다. 조선의 6.9조치가 단지 대남압박에 불과하다면 이전과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마치 남쪽 정부가 단지 대북 전단 살포를 중단시키는 것이 본질이 아닌 것처럼, 조선의 6.9조치가 단지 대남압박에 불과하다는 것 또한 본질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대미압박이 전제되지 않는 6.9조치는 성립할 수 없다. 조선의 6.9조치는 남쪽 정부가 독립된 변수로 남아있을 때 작동한다.

6. 맺음말

누구에게나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믿음은 환영받는다. 차는 분명 기름과 엔진의 폭발력과 도로면과의 마찰력에 의해 굴러감에도 불구하고 운전자는 자신이 차를 몰고 있다는 착각을 즐긴다. 핸들과 브레이크는 그런 착각을 강화시킨다. 이제 우리가 탄 차는 도로가 아닌 빙판위에 놓여졌다. 조선의 6.9조치는 더 이상 우리가 탄 차가 조선이 닦아놓은 도로 위를 무임승차하는 것을 거부했다. 민족이 닦아놓은 도로 위를 달리면서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외세가 만든 빙판위를 달리는 것 뿐이다. 빙판위에서 통제력을 상실한 차가 어디로 갈 지는 자연의 힘에 맡기는 수 밖에 없다. [탁류 / 서프라이즈 논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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