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김현태기자] 1998년 영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는 더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줬다. 휴대폰 감청, 인터넷 해킹, 인공위성 감시가 총출동하는 영화에서 주인공은 NSA의 감청 행위를 합법화하려는 음모에 맞서 싸운다. 그리고 2013년, CIA 요원인 스노든은 NSA가 ‘프리즘’이라는 정보감시 프로그램을 이용해 인터넷을 감찰한다고 폭로했다. 구글, 페이스북 등 기업들의 서버에 접근해서 이메일, 동영상, 채팅 등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저장해온 것이다. 폭로는 곧 전세계적 논쟁으로 이어졌다. 스노든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됐지만 미국에서는 범죄자로 수배 중이란 사실은 양 극단의 시각을 상징한다.

국가 기관의 민간인 사찰과 정치개입

이라는 스캔들을 겪었던 한국에서 감청 옹호는 더 극적으로 등장한다. ‘내란 음모’를 밝히는 데 큰 공헌을 한 것은 녹취록이었다. 국정원은 정당에 대한 3년 동안의 감청 사실을 공개하면서 정면 돌파를 선언한다. 국가기관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개인의 이메일과 통화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사회적 승인을 얻는 듯하다.

사람들이 감시기구의 확장을 수용하는 것은 범죄와 전쟁에 대한 공포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통제받지 않는 권력이 통제받지 않는 감시와 결합된 한국에서, 불행히도 안전을 위한 ‘사소한’ 권리의 양보는 다만 권력에 대한 공포로 변할 뿐이다. 국정원장이 회의 자리에서 “정부·여당에 반대하는 사람은 종북”으로 “강에 처박아야지”라고 발언하는 현실에서, 적어도 국민의 절반은 당연스레 적으로 규정되어 감시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대국민 심리전’이 종북 좌파 척결을 위한 것이라고 강변하는 상황에서, 그들이 어떤 정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지 끊임없이 파악하고, 뜻에 맞지 않은 이를 내치기 위해 사생활에서 흠결을 찾아내는 것. 자신만이 정보를 가졌다는 점을 악용해 정보를 유리한 방향으로 흘리고 나아가 조작하는 것. 이러한 모습들은 이미 현실에서 드러나고 있다. 지난 5년 MB정부와 4년 박근혜정부은, 문재인 정부 방송 정상화 방침을 ‘언론 장악’이라고 주장하는 친 박근혜 성향의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MB 정부 국가정보원의 방송사 사찰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명박 정부 당시 국가정보원의 무차별적 ‘비판세력 제압 활동’이 양파 껍질 벗겨지듯 드러나고 있다. 정치인은 물론 연예인, 교수 등 각계각층 인사들의 숨통을 끊기 위한 일을 벌였다는 의혹의 실체가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26일엔 군사이버사 심리전단이 연예인 비방물을 만든 사실도 드러났다.

국정원 등의 행태는 

앞서 이명박 전 대통령 재임 당시 불거졌던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불법 사찰과 중첩되면서 정권 자체가 ‘총체적 사찰공화국’이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당시 집권세력들은 국가기구와 사정기관 등 권력기구들을 사유화했고, 이 전 대통령의 보위에만 힘쓰는 친위대로 전락시켰다. 원세훈 원장 시절 MB 정부 국정원은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해 전부터 ‘라디오 시사 프로 편파 방송 실태’ 조사를 벌이고 “방송사 차원의 노력과 함께 행정 제재와 왜곡 활동에 대한 대응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정원이 조사한 대상은 KBS, MBC, CBS, SBS, PBC, BBS 등 6개 방송사 아침 프로그램으로 진행자 및 제작진을 ‘현미경 사찰’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정원이 ‘출근길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을 장악하겠다는 의도였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석 달 만인 2008년 5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에 데었다. 대선에서 530만표 차로 압승하고 18대 총선까지 승리한 이 전 대통령은 겉으로는 일방통행식 국정운영을 사과했다.

▲ ⓒ참여연대.

하지만 속내는 ‘촛불은 누구 돈으로 샀는지 파악하라’는 것이었다. 정권은 ‘배후 세력 캐내기·비판 세력 옥죄기’에 착수했다. 곧바로 7월 신설된 공직윤리지원관실은 소속은 총리실이었지만 실제로는 청와대 지휘를 받는 관가의 저승사자였다. MBC 라디오 진행자였던 손석희 아나운서(현 JTBC 보도 담당 사장)나 방송인 김미화씨가 사찰 대상으로 부각됐지만 MB 정부 국정원은 현재 ‘친박’으로 분류되는 정치인들을 사찰하기도 했다.

‘특명사항은 VIP(이 전 대통령)께 일심(一心)으로 충성하는 친위조직이 비선에서 총괄지휘’ 등 무협지에 나올 법한 표현이 내부 문건에 등장했다. 친위대의 증거는 조직 구성에 있었다. 지원관부터 주요 구성원, 컨트롤타워 역할의 이영호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 등은 모조리 경북 포항·영일 인근 출신의 영포라인이었다.

공식적으로 공직기강을 담당한 이 조직은 2010년 6월 김종익씨 사찰건이 언론에 들통날 때까지 민간인까지 ‘반정부’ 딱지를 붙여 마구잡이로 사찰하며 압박을 가했다. 불법 사찰이 드러난 이후에는 연루 공무원들에게 대포폰과 관봉에 싸인 현금을 쥐여주며 증거인멸에 총력을 다했다.

국정원도 촛불집회 반년 후인 2009년 1월 수뇌부가 교체됐다. 이 전 대통령의 ‘심복’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취임 직후부터 심리전단 조직·인원을 확대해 사회 각계 인사를 압박하고 목줄을 죄었다.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에 따르면 국정원은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정부 비판 인사에 대한 대응 활동을 강화했다. ‘노 자살 관련 좌파 제압논리 개발·활용 계획’ 등의 보고서까지 작성해 주도면밀하게 여론전을 폈다.

보수당 의원까지 가리지않은 사찰

대표적인 것이 김재원 한국당 의원이다. 2008년 18대 총선 공천을 받지 못했던 김 의원은 그해 10월 BBS(불교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김재원의 아침저널’을 진행했다. 국정원은 ‘김재원의 아침저널’에 대해 “진행자가 박근혜 캠프 출신으로 세종시 원안 고수 입장 등 편파 방송을 한다”고 문제 삼았다.

실제 김 의원은 2007년 박근혜씨가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을 때 캠프 대변인과 기획단장을 역임하는 등 한국당 내에서도 대표 친박으로 꼽힌다. 미디어오늘은 김 의원 입장을 듣기 위해 수차례 연락했지만 그는 문자만 읽을 뿐 답변하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 대변인을 맡았던 KBS 기자 출신 민경욱 한국당 의원도 사찰 당하긴 마찬가지였다. 민 의원은 기자 시절 KBS 라디오 ‘열린토론’ 진행자였는데 국정원은 “진행자 민경욱씨가 중량감이 떨어져, 발언 시간 배분에만 급급해 일방적 정치공세를 방치한다”고 혹평했다.

민 의원 역시 미디어오늘 취재에 응하고 있지 않지만 자신의 페이스북에는 “정치적 편향성이 없이 토론자들에게 고르게 발언 기회를 주는 것은 토론 진행자가 갖춰야 할 덕목”이라는 댓글을 남겼다.

PBC(평화방송) 보도국장 출신인 이석우 한국당 디지털정당위원장도 MB 국정원 사찰을 피할 수 없었다. 국정원은 그가 진행한 PBC ‘열린 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의 오아무개 PD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좌편향 종교인들의 발언을 부각해 보도한다”고 지적했다.

이 위원장은 지난 4월 조선일보 편집국장 출신 강효상 한국당 의원과 우익단체 ‘바른언론연대’가 주최한 국회 토론회에서 “김재철 전 MBC 사장의 경우 MB가 뒤를 받치고 있어 본인 소신이 관철됐다. KBS 사장은 이에 비하면 약하다”며 언론을 권력 쟁취 수단으로 간주하는 발언을 해 물의를 빚었다. 이 위원장은 박근혜 정부에서 ‘국무총리실 공보실장’ ‘시청자미디어재단 이사장’ 등을 지내며 승승장구했다.

이들이 소속된 자유한국당은 MBC를 상대로 한 고용노동부의 특별근로감독과 방송통신위원회의 방송문화진흥회(MBC 대주주) 관리·감독 조치를 ‘문재인 정부의 언론장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민 의원의 경우 한국당 ‘방송장악저지 투쟁위원회’에서 활동하며 김장겸 MBC 사장을 비호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원세훈 원장 시절 국정원의 언론 장악 시도와 전 방위적 사찰이 드러났고 현 한국당 소속 정치인들도 사찰 피해자라는 점에서 문재인 정부를 겨냥한 한국당의 방송 정상화 ‘발목잡기’ 명분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 전 대통령 1인을 위한 특명부대 성격의 공직윤리지원관실과 외곽 여론전에 정보력이 총동원되는 등 ‘투 트랙’ 권력 사유화가 최고조에 달한 시기도 이때쯤이었다.

▲ ⓒ참여연대.

당시 사정기관의 활동 목표는 1인 권력 공고화에 있었다. 얼핏 보면 ‘좌파·진보 세력 제압’ 등을 내걸면서 정치적 대결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정권 보위에 거슬리는 인물들은 모두가 사찰과 공격의 대상이었다.

이번 보도자료에 당시 한나라당 홍준표, 안상수, 권영세 의원 등 여권 인사가 표적으로 등장한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앞서 공직윤리지원관실은 당시 한나라당 정두언, 남경필, 정태근 의원, 이완구 충남지사 등 이 전 대통령과 대척점에 선 여당 정치인들을 전방위로 사찰해 충격을 줬다.

이완구 충남지사는 이명박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하며 2009년 도지사직을 사퇴해 정권의 미움을 샀다. 그는 훗날 국가인권위 직권조사에서 “공포감이 들고 분노를 느꼈다”고 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여론전·심리전에 동원하던 국정원은 2010년 지방선거에서 여권이 참패한 이후 더 위기감을 느낀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국정원은 천안함·연평도 도발 등 안보 이슈를 적극 제기하고, 4대강 사업 홍보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국정원 개혁발전위는 2011년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와 2012년 총선·대선에 국정원이 특정 정치인들을 집중 공격하는 등 본격적인 선거개입을 한 것으로 파악했다.

결과적으로 국정원의 선거개입 활동은 일정 부분 성과를 거뒀다. 2012년 총선에서 당시 집권여당인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이 승리하고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정권 친위대 활동 내역은 4년 동안 묻혀버렸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정권이 교체되면서 총체적 사찰 공화국의 베일은 벗겨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권력에 대한 공포가 진화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스스로 ‘감시자’임을 자처한다. 수업 내용을 고발하고 누군가의 트윗을 국정원에 신고한다. 영화는 상영이 중단되고 강연회는 취소된다. 자신이 권력과 맞서지 않는다는 것을 늘 보여주어야 하는 시대에, 국정원이 신고자에게 증정하는 ‘절대시계’는 말 그대로 국민의 자격이 된다. 하지만 시계를 찬 사람이 늘어날수록, 민주 공화국 대한민국은 더 위험해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백 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에게 눈 몇 개를 더 붙여주는 것이 아니라, 괴물에게 인간의 심장을 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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